엿장수. 우리에게는 이미 낯선 이름이 되었지요.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동네 어귀에서 “엿 사세요” 하는 소리만 들려도 입에 침이 괴던 시절. 엿장수가 가위소리를 내며 집 앞을 지나면 아이들은 어머니 몰래 세숫대야나 고무신을 가지고 나가 엿과 바꿔 먹었습니다. 물론 엿 먹다 들켜서 어머니에게 매를 맞는 것으로 항상 이야기는 끝났지요.
그때의 엿장수와는 다른 모습으로 아직도 동네에서 엿을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울산의 명물 송영섭(宋永燮·47) 씨. 화려한 여장(女裝)에 엿가위 대신 마이크를 들고 ‘트로트’를 부르며 엿을 팝니다. 건장한 남자가 여장을 하고 27년째 엿을 팔게 된 사연, 잠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장 문을 열었다. 20여 벌, 형형색색의 여자 옷이 빼곡하다. 밤무대 가수들이 입음직한 반짝이 의상에서부터 어우동 쇼에 어울릴 만한 화려한 한복까지. ‘어떤 의상을 입을까?’ 매일 아침 송씨가 하는 고민이다. 오늘은 파란 장미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원피스에 금색 재킷으로 결정했다. 옷을 다 입고는 거울 앞에 앉아 하얀 분을 바르기 시작한다. 깊게 팬 주름과 검게 그은 피부. 분을 발라도 잘 가려지지 않는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코 밑에 미인점을 찍은 뒤 가발까지 쓰면 출근준비 끝. 마지막으로 투박한 등산화를 챙겨 신는다. 그래야 40리 길을 걸을 수 있으니까. 예전에 한번 여자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 이후 생긴 습관이다. 대문 안에 고이 세워둔 엿수레는 아직 잠에 빠져 있다. 수레 밑에 놓인 소형발전기의 스위치를 올리자 비로소 수레가 용틀임을 한다.
낮 12시. 오늘은 학성동 구 역전시장부터 시작한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라 즐겨 찾는 곳이다. 50m 정도 되는 시장거리에 100여 개 좌판과 상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송씨의 수레가 시장에 들어서자 상인들이 일손을 멈춘다. “아이고마, 인자 왔네.” 수레가 시장거리의 중간쯤에 다다르자 송씨는 수레를 멈추고 마이크를 든다. 어느새 몇몇 상인이 몰려와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송씨의 구성진 트로트. 굵은 목소리와 꺾기 창법이 어우러지며 무대는 달아오른다. 그렇게 구 역전시장에서 20분 정도 신나게 놀다 다음 목적지로 자리를 옮긴다. 엿은 한 상자도 팔지 못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엿가위 대신 마이크 들고 신나는 트로트
어린 시절, 이상하리만큼 북과 꽹과리 소리가 좋았다. 아니,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때맞춰 접하게 된 사물놀이는 결국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됐다. 풍물놀이대회에 나가면 상을 탈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던 가난은 외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중학교 이후로는 북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10년 세월을 보냈다.
1982년 4월13일. 우연히 구경 간 청도 소싸움장에서 송씨는 ‘운명’과 마주쳤다. 집채만한 소 두 마리가 씩씩거리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의 관심은 대회장 한쪽 구석에 있었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어우러져 소리만 들어도 흥겨운 그곳에는 사내 4명이 각설이 공연을 하며 엿을 팔고 있었다. 북과 꽹과리, 노래는 물론 춤까지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다 모였다.
“심장이 벌렁거려가 터지는 줄 알았어예. 어찌나 그기 멋있고 재밌어 보이던지, 내도 꼭 해보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지예.”
여기저기 누빈 거지 복장에 딸기코 분장을 한 각설이가 마이크를 들고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하자 즉석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아주머니, 할아버지, 아이까지 모두 각설이들과 어우러져 신명나게 놀기 시작했다. 그날 말을 걸어보려고 공연 뒷정리를 하는 각설이들 주변을 맴돌았지만 도저히 용기가 안 나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땅을 치며 후회했다. ‘다시 못 올 기회였다’고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괴로워하던 송씨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머리라도 식힐 겸 찾아간 유원지에서 청도 소싸움장의 각설이패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와, 억수로 멋있네예. 청도 소싸움 때도 있었지예? 지 그때도 봤습니더. 너무 멋있어서 그런데 지가 술 한잔 사도 되겠습니꺼?”
송씨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공연 뒷정리를 하던 그들은 송씨를 의아해하면서도 허락해줬다. 동동주가 몇 사발 오가며 술자리가 무르익자 송씨가 어렵사리 “엿을 팔아보고 싶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들은 흔쾌히 엿 파는 곳을 알려주며 여러 가지 비법을 전해주었다. 의외였다. 그렇게 송씨의 인생 2막이 열렸다.
엿을 떼다 팔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각설이들은 “이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얼마나 가는지 한번 보자”며 비법을 전수했던 것이다. 정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리어카(수레)를 얻어다 직접 엿수레를 제작했다. 남들보다 튀고 싶어 여자 옷을 얻어다 여장도 했다. 하지만 수레를 끌고 울산 시내로 나간 첫날, 여섯 시간을 돌아다니며 단 세 상자의 엿을 팔았다.
“지금이야 이라고 나가면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25년 전만 해도 남자가 여장한다고 그리 손가락질을 해댔어예.”
엿을 얼마에 팔아야 할지 몰라 상자에 가득 담아 턱없이 싸게 팔았다. 결국 다 팔고서도 적자가 났다.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욕은 먹어도 수레를 끌고 나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엿장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결혼했다. 자신이 여장하고 엿을 판다는 것을 알고도 시집와준 고마운 여자였다. 아내는 알뜰하고 살림도 잘했다. 지긋지긋하던 가난에서도 조금씩 벗어나며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살았다. 그러나 몸속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역마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당연히, 결혼하면서 시작한 설비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수레를 끌었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얼마간 남편을 이해했다. 아내가 처음 집을 나간 것은 1991년. 살림은 조금씩 기우는데 하루 종일 엿수레만 끌고 다니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 살림 잘하던 마누라가 하루아침에 변한 기라예. 그 정도였는지는 꿈에도 몰랐십니더.”
수소문해서 집 나간 아내를 집에 데려다 놓으면 다시 나가고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다. “엿만 열심히 팔아도 우리 네 식구 굶어죽진 않는다”며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자식들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딸은 고등학교 재학 중에 시집가버렸다. 아들 역시 고등학교를 마치자 집을 나갔다. 아내마저 영영 모습을 감췄다.
“미안해가 자식들도 못 찾겠십니더. 이젠 안부만 간간이 들리는데 얼매나 지를 원망하겠십니꺼? 지도 다른 엿장수들맹키로 전국을 떠돌면서 엿을 팔고 싶어도 혹시나 자식들이 찾아올까봐 울산을 못 떠나겠어예.”
혼자가 되었다. 이젠 수레를 끌어도 그를 원망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죄책감이 그를 옥죄어왔다. 북과 꽹과리만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눈만 뜨면 수레를 끌고 무작정 뛰쳐나갔다. 시장을 돌면서 장사하다 자식 또래를 만나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럴수록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꼬박 이틀을 걷기도 했다.
가족 생각이 나 시장 상인들에게 살갑게 대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장을 들어서면 “어머니, 안녕하십니꺼. 행님, 오늘 많이 팔았어예? 아이고마, 이모 점점 이뻐지는갑네”라며 인사를 건네는 송씨에게 많은 이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 채소 파시는 그 어머니는 안 보이네. 어디 아프신 거 아이가?”
어느덧 새벽 2시. 아파트 불이 하나 둘 꺼지고 도로에 차들의 불빛이 줄기 시작하면 송씨도 집으로 향한다. 수레를 끌며 계산해보니 오늘도 20km는 족히 걸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대문 앞에 수레를 세운 뒤 팔다 남은 엿을 정리해놓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결혼 전부터 살기 시작한 집.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내와 자식들마저 버린 집이다. 그래도 혹시나 가족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집이다. 세수를 마치자 다시 평범한 40대 아저씨로 돌아온 송씨. 아침에 먹고 남은 밥과 주인집 할머니가 주신 김치, 마른반찬으로 조촐하게 차린 식탁에서 혼자 식사한 뒤 잠자리로 향한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 3시다.
다음 날 아침 8시. 송씨는 또 다른 가족을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효도 한번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데다,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서다. 그래서 찾는 곳이 4년째 인연을 맺고 있는 백봉희 할머니(87)의 집. 할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손을 붙들고 “어여 들어오라”며 반갑게 맞이한다. 안부를 건넨 송씨가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독거노인 생필품 사주고 말동무·안마까지
“어머니, 시원하지예?” “암, 시원하제.”
봉사활동을 시작한 뒤 송씨는 하루 벌이가 얼마가 됐든 10만원씩은 백 할머니를 비롯한 30여 명의 독거노인을 위해 쓴다. 이들의 집에 생필품을 사주거나 집수리 등에 쓰기도 한다. 20여 분이 지나자 송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4~5곳 더 돌면서 노인들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만 머물 수가 없다. “다음에 올 때는 창문에 방충망을 달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송씨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장사 준비를 한다. 오늘은 어머니들과의 수다가 길어져 평소보다 바삐 움직여야 한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옷장 문을 연다. “오늘은 또 뭘 입을까?”
이 기사는 한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피처기사 작성연습’(지도교수 심훈) 수업을 받고 있는 대학생 3명이 공동 작성해 ‘주간동아’ 편집실에 보내온 것입니다. ‘주간동아’는 우리 주변의 소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필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독자 여러분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이라 판단해 글을 게재합니다.
그때의 엿장수와는 다른 모습으로 아직도 동네에서 엿을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울산의 명물 송영섭(宋永燮·47) 씨. 화려한 여장(女裝)에 엿가위 대신 마이크를 들고 ‘트로트’를 부르며 엿을 팝니다. 건장한 남자가 여장을 하고 27년째 엿을 팔게 된 사연, 잠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장 문을 열었다. 20여 벌, 형형색색의 여자 옷이 빼곡하다. 밤무대 가수들이 입음직한 반짝이 의상에서부터 어우동 쇼에 어울릴 만한 화려한 한복까지. ‘어떤 의상을 입을까?’ 매일 아침 송씨가 하는 고민이다. 오늘은 파란 장미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원피스에 금색 재킷으로 결정했다. 옷을 다 입고는 거울 앞에 앉아 하얀 분을 바르기 시작한다. 깊게 팬 주름과 검게 그은 피부. 분을 발라도 잘 가려지지 않는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코 밑에 미인점을 찍은 뒤 가발까지 쓰면 출근준비 끝. 마지막으로 투박한 등산화를 챙겨 신는다. 그래야 40리 길을 걸을 수 있으니까. 예전에 한번 여자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 이후 생긴 습관이다. 대문 안에 고이 세워둔 엿수레는 아직 잠에 빠져 있다. 수레 밑에 놓인 소형발전기의 스위치를 올리자 비로소 수레가 용틀임을 한다.
낮 12시. 오늘은 학성동 구 역전시장부터 시작한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라 즐겨 찾는 곳이다. 50m 정도 되는 시장거리에 100여 개 좌판과 상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송씨의 수레가 시장에 들어서자 상인들이 일손을 멈춘다. “아이고마, 인자 왔네.” 수레가 시장거리의 중간쯤에 다다르자 송씨는 수레를 멈추고 마이크를 든다. 어느새 몇몇 상인이 몰려와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송씨의 구성진 트로트. 굵은 목소리와 꺾기 창법이 어우러지며 무대는 달아오른다. 그렇게 구 역전시장에서 20분 정도 신나게 놀다 다음 목적지로 자리를 옮긴다. 엿은 한 상자도 팔지 못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엿가위 대신 마이크 들고 신나는 트로트
어린 시절, 이상하리만큼 북과 꽹과리 소리가 좋았다. 아니,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때맞춰 접하게 된 사물놀이는 결국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됐다. 풍물놀이대회에 나가면 상을 탈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던 가난은 외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중학교 이후로는 북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10년 세월을 보냈다.
1982년 4월13일. 우연히 구경 간 청도 소싸움장에서 송씨는 ‘운명’과 마주쳤다. 집채만한 소 두 마리가 씩씩거리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의 관심은 대회장 한쪽 구석에 있었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어우러져 소리만 들어도 흥겨운 그곳에는 사내 4명이 각설이 공연을 하며 엿을 팔고 있었다. 북과 꽹과리, 노래는 물론 춤까지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다 모였다.
“심장이 벌렁거려가 터지는 줄 알았어예. 어찌나 그기 멋있고 재밌어 보이던지, 내도 꼭 해보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지예.”
엿장수 송씨가 뽑아내는 트로트 가락에는 27년간 멍울진 삶의 애환이 묻어 있다.
땅을 치며 후회했다. ‘다시 못 올 기회였다’고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괴로워하던 송씨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머리라도 식힐 겸 찾아간 유원지에서 청도 소싸움장의 각설이패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와, 억수로 멋있네예. 청도 소싸움 때도 있었지예? 지 그때도 봤습니더. 너무 멋있어서 그런데 지가 술 한잔 사도 되겠습니꺼?”
송씨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공연 뒷정리를 하던 그들은 송씨를 의아해하면서도 허락해줬다. 동동주가 몇 사발 오가며 술자리가 무르익자 송씨가 어렵사리 “엿을 팔아보고 싶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들은 흔쾌히 엿 파는 곳을 알려주며 여러 가지 비법을 전해주었다. 의외였다. 그렇게 송씨의 인생 2막이 열렸다.
엿을 떼다 팔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각설이들은 “이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얼마나 가는지 한번 보자”며 비법을 전수했던 것이다. 정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리어카(수레)를 얻어다 직접 엿수레를 제작했다. 남들보다 튀고 싶어 여자 옷을 얻어다 여장도 했다. 하지만 수레를 끌고 울산 시내로 나간 첫날, 여섯 시간을 돌아다니며 단 세 상자의 엿을 팔았다.
“지금이야 이라고 나가면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25년 전만 해도 남자가 여장한다고 그리 손가락질을 해댔어예.”
엿을 얼마에 팔아야 할지 몰라 상자에 가득 담아 턱없이 싸게 팔았다. 결국 다 팔고서도 적자가 났다.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욕은 먹어도 수레를 끌고 나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엿장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결혼했다. 자신이 여장하고 엿을 판다는 것을 알고도 시집와준 고마운 여자였다. 아내는 알뜰하고 살림도 잘했다. 지긋지긋하던 가난에서도 조금씩 벗어나며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살았다. 그러나 몸속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역마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당연히, 결혼하면서 시작한 설비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수레를 끌었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얼마간 남편을 이해했다. 아내가 처음 집을 나간 것은 1991년. 살림은 조금씩 기우는데 하루 종일 엿수레만 끌고 다니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 살림 잘하던 마누라가 하루아침에 변한 기라예. 그 정도였는지는 꿈에도 몰랐십니더.”
수소문해서 집 나간 아내를 집에 데려다 놓으면 다시 나가고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다. “엿만 열심히 팔아도 우리 네 식구 굶어죽진 않는다”며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자식들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딸은 고등학교 재학 중에 시집가버렸다. 아들 역시 고등학교를 마치자 집을 나갔다. 아내마저 영영 모습을 감췄다.
“미안해가 자식들도 못 찾겠십니더. 이젠 안부만 간간이 들리는데 얼매나 지를 원망하겠십니꺼? 지도 다른 엿장수들맹키로 전국을 떠돌면서 엿을 팔고 싶어도 혹시나 자식들이 찾아올까봐 울산을 못 떠나겠어예.”
혼자가 되었다. 이젠 수레를 끌어도 그를 원망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죄책감이 그를 옥죄어왔다. 북과 꽹과리만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눈만 뜨면 수레를 끌고 무작정 뛰쳐나갔다. 시장을 돌면서 장사하다 자식 또래를 만나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럴수록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꼬박 이틀을 걷기도 했다.
가족 생각이 나 시장 상인들에게 살갑게 대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장을 들어서면 “어머니, 안녕하십니꺼. 행님, 오늘 많이 팔았어예? 아이고마, 이모 점점 이뻐지는갑네”라며 인사를 건네는 송씨에게 많은 이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 채소 파시는 그 어머니는 안 보이네. 어디 아프신 거 아이가?”
어느덧 새벽 2시. 아파트 불이 하나 둘 꺼지고 도로에 차들의 불빛이 줄기 시작하면 송씨도 집으로 향한다. 수레를 끌며 계산해보니 오늘도 20km는 족히 걸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대문 앞에 수레를 세운 뒤 팔다 남은 엿을 정리해놓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결혼 전부터 살기 시작한 집.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내와 자식들마저 버린 집이다. 그래도 혹시나 가족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집이다. 세수를 마치자 다시 평범한 40대 아저씨로 돌아온 송씨. 아침에 먹고 남은 밥과 주인집 할머니가 주신 김치, 마른반찬으로 조촐하게 차린 식탁에서 혼자 식사한 뒤 잠자리로 향한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 3시다.
다음 날 아침 8시. 송씨는 또 다른 가족을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효도 한번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데다,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서다. 그래서 찾는 곳이 4년째 인연을 맺고 있는 백봉희 할머니(87)의 집. 할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손을 붙들고 “어여 들어오라”며 반갑게 맞이한다. 안부를 건넨 송씨가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독거노인 생필품 사주고 말동무·안마까지
“어머니, 시원하지예?” “암, 시원하제.”
봉사활동을 시작한 뒤 송씨는 하루 벌이가 얼마가 됐든 10만원씩은 백 할머니를 비롯한 30여 명의 독거노인을 위해 쓴다. 이들의 집에 생필품을 사주거나 집수리 등에 쓰기도 한다. 20여 분이 지나자 송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4~5곳 더 돌면서 노인들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만 머물 수가 없다. “다음에 올 때는 창문에 방충망을 달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송씨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장사 준비를 한다. 오늘은 어머니들과의 수다가 길어져 평소보다 바삐 움직여야 한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옷장 문을 연다. “오늘은 또 뭘 입을까?”
이지숙, 유상희 양, 송기영 군<br>(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