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서울 여의도동의 한 주유소.
“공무원들이 무능한 걸 알고는 있지만 휘발유 세금 관련해서는 너네 숨은 능력을 보여봐라.”
“비싸면 안 쓴다? 기름은 선택이 아닌 생계수단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대다수 국민의 생명수란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국민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는 못 살겠습니다. 세금은 선진국(직·간접세 포함), 복지와 국민의 권리는 최후진국인 대한민국을 바꿉시다.”
기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면서 국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인터넷 홈페이지에만 들어가봐도 이런 심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부 누리꾼은 ‘혁명’ 운운하며 극단적인 말까지 쏟아내고 있다. ‘인터넷 댓글에도 인격이 드러난다’고 점잖게 타이르기에는 이들의 불만이 너무 높다.
최근 기름값 동향을 보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국석유공사가 전국 980개 주유소를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전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6월 초 ℓ당 1554.04원으로 17주 연속 오르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유는 ℓ당 1249.45원으로 최고치였던 지난해 8월 셋째 주의 1300.22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곧 돌파할 기세다.
이에 따라 올해 들어 가계의 자동차 연료비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들어 5월 말까지 자동차 연료비가 7.8% 늘어나 같은 기간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1.9%)의 4배를 넘었다. 품목별로는 휘발유 가격이 8.9% 올라 상승률이 가장 높았고 수송용 액화천연가스(LPG)가 7.8%, 경유가 4.9% 올랐다. 서민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은 정부의 에너지 세제개편 마무리 작업. 말이 좋아 ‘개편’이지 실상은 7월1일부터 경유에 붙는 세금을 ℓ당 605원에서 640원으로 35원 인상하겠다는 얘기다. 그러잖아도 국내 기름값이 고공행진하는 마당에 또 세금 인상으로 경유값을 올리겠다고 하니 ‘정부는 도대체 눈치도 없느냐’는 비아냥거림이 나오고 있다.
“1997년 유가자율화가 실시되면서 기름값 결정권이 각 정유사로 넘어가 이를 통제할 만한 정책 수단이 없다.”
국민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하는 것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정부 관계자들의 이런 언급이다. 기름값 폭탄의 주범이 세금이라는 지적이 있는 마당에 이런 얘기는 계속 세금을 ‘쥐어짜겠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 휘발유 값의 절반 이상이 세금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그림 참조).
정부는 국내 기름값에 포함된 세금 비중이 외국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우리나라 휘발유의 가격 대비 세금 비중(58%)은 미국(12.9%), 일본(40.9%)보다 높지만 프랑스(67.3%), 영국(64.7%)보다 낮다는 것.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회원국 30개국 가운데 14위 수준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소득수준을 감안한 우리나라 유류 관련 세금 비중은 다른 나라보다 높은 수준이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국민총소득(GNI)을 고려해 우리나라의 휘발유 가격을 100으로 가정할 때 일본 31, 호주 29, 캐나다 28, 미국 17 정도다. GNI를 감안한 휘발유 세금 수준은 우리나라를 100으로 봤을 때 일본 23, 호주 19, 캐나다 15, 미국 4에 불과하다.
유류세 수입 6년 만에 10조원 늘어
그런데도 정부는 기름값 폭등 원인으로 정유사의 폭리를 지목하는 듯한 ‘꼼수’까지 부려 빈축을 샀다. 재경부가 최근 올해 들어 휘발유 가격이 급등한 것은 정유사 정제마진이 지난해 12월 ℓ당 144원에서 올 5월 229원으로 59.0%나 폭증한 데 기인한다는 자료를 발표한 것. 이 자료에 따르면 같은 기간 유류세는 ℓ당 873원에서 884원으로 1.2% 오르는 데 그쳤다.
정유업계는 이에 대해 “세금 폭탄에 대한 비난 여론을 희석하기 위한 술수”라고 반발했다. 통상 정제마진은 전 유종을 평균해 산출하는 것이 타당한데도 +로 나타나는 휘발유 정제마진만 부각하고, 생산 비중이 30% 정도 차지하면서 역마진이 생기는 중유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또 정유사 세전 공장도 가격에는 관세, 석유수입 부과금, 운임, 품질 보정비, 국내 유통비용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물론 최근처럼 국제 휘발유 가격이 가파르게 오를 땐 정유사의 마진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2001년부터 국내 휘발유 가격이 국제 원유가가 아니라 국제 휘발유 가격에 연동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상대적으로 국제 휘발유 가격이 싸다는 여론의 지적을 받고 그렇게 바꾼 것이다. 이제 와서 마진이 좋다고 기름값을 낮추라는 것은 국민 정서에는 맞겠지만 시장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 정유사들의 최근 영업 실적은 ‘폭리’라고 보기 어렵다.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인 SK㈜의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보면 석유사업부문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6조6434억원과 3280억원이었다. 매출액 5조4810억원, 영업이익 4496억원의 석유화학부문에 비해 덩치는 크지만 실속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를 다시 가공해 에틸렌, 파라자일렌, 합성수지 등을 만드는데 이를 석유화학사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부는? 당연히 유류 관련 세금 수입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유류 관련 세금은 교통세 11조3000억원, 교육세 2조원, 주행세 2조800억원, 부가세 5조5000억원 등 모두 25조9000억원으로 추산된다. 2000년 15조8000억원이던 것을 감안하면 6년 만에 10조원이 늘어난 셈이다. 박재완 의원실의 관계자는 “유류세는 정부 처지에서 보면 걷기 쉬운 세금이지만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낸다는 점에서 조세 형평성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유류세 세수가 이처럼 증가한 것은 국제원유 가격에 연동하는 부가가치세와 관세 수입 증가와 함께 에너지 세제개편이 크게 작용했다. 2001년 2차 개편 당시 2001년 6월 휘발유 가격의 47% 수준이던 경유 가격을 2007년 85%까지 올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매년 경유 세금을 올렸고, 2001년 6월 ℓ당 239원이던 경유 세금은 2007년 5월 605원으로 올랐다.
경유 가격을 이처럼 높인 이유는 2005년 경유 승용차 시판을 앞두고 시민단체에서 이를 요구했기 때문. 경유값이 낮으면 경유 승용차 구매가 폭증해 대기오염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작용한 결과였다. 경유차는 연비는 좋지만 인체에 해로운 입자상 물질과 질소산화물을 배출한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에너지 세제개편은 당초 목표를 달성했을까. 정확한 평가 작업은 환경부가 의뢰한 연구용역 작업이 끝나는 6월 말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녹색교통운동 민만기 사무처장은 “경유 승용차 폭증을 막았고, 대기오염이 개선되는 징후가 보이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민 처장은 이어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국내 기름값도 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데 여론이 정부 탓만 한다”고 덧붙였다.
값 올리면 적게 쓴다? 정부 주장 설득력 약해
그러나 정부가 내세우는 에너지 절약 효과는 미미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산업연구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석유값 변동이 소비 급증이나 급감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석유값이 비싸면 소비가 줄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정부 주장이 설득력이 약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정부가 세수 확보가 쉬운 유류세에 집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휘발유 경유 LPG의 상대 가격을 100: 85:50으로 맞춘다는 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업연구원 전재완 연구위원은 “휘발유 가격만 해도 지역별로 200원 이상 차이나 지역별로 상대 가격비를 맞추기 힘든 데다, 석유제품 가격도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이 비율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물론 정부 처지에서 보면 당장 유류세를 인하할 경우 세수 결함을 어디서 보충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처지에서는 그만한 세수가 제대로 쓰인다면 불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유류세 가운데 부가세는 일반회계로 들어가고, 교육세는 교육 예산으로 각각 쓰인다. 지방세인 주행세는 유가 보조금 재원으로 이용된다. 문제는 10조원 안팎에 이르는 교통세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교통세는 특별회계로 편성돼 건설교통부 환경부 산업자원부 등에서 각각 도로 건설, 대기환경 개선, 대체에너지 개발 등에 쓰고 있다. 그러나 대중교통을 좀더 쾌적하고 편리하게 한다거나 대중교통 요금 인상 요인을 흡수하는 데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중교통 요금은 인상 요인이 있을 때마다 오르고 있다. 서민들이 국제유가가 오르면 자동차 연료비와 대중교통 요금 양쪽에서 직격탄을 맞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