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무렵 루카의 전경.
토스카나(Toscana). 이 단어에는 많은 것들이 영글어 담겨 있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언덕,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을 향해 뻗은 키 큰 삼나무들, 중세시대의 풍경과 고적, 호텔로 비유하자면 7성급이 될 ‘슈퍼 토스카나’ 와인, 르네상스의 꽃이자 토스카나의 꽃으로 불리는 도시 피렌체, 푸근한 숨결의 농가, 깊은 산세에서 자라 쑥만큼이나 향이 진한 포르치니(Porcini) 버섯 등 토스카나를 빛내는 조각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의 여행자들은 토스카나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 평한다.
이탈리아에서 신혼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틈만 나면 남편, 딸과 함께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이탈리아관광청 김보영 소장의 말을 옮겨본다.
“토스카나란 말만 들어도 마음에 여백이 생긴다. 토.스.카.나. 네 음절만으로 ‘이번 여정에선 편히 쉬고 맛있게 먹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가 생긴다. 토스카나에서 차를 빌려 와이너리를 둘러본 적이 있는데, 굳이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와인과 함께 나온 음식들은 정말 훌륭했다. 빵에 햄 한 장만 끼워 먹어도 맛있었다.
전원식 호텔 아이 케드리의 수영장.
토스카나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져왔을 자연과 중세의 역사를 증거하는 공기를 단 몇 시간으로 재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토스카나에서는 농가에서 잠을 자야 한다. 구릉지대가 많은 토스카나에서 농가는 대부분 평지보다 높은 곳에 자리하는데, ‘위쪽’ 공기는 확실히 아래쪽과 다르다. 또 숙박을 제공하는 대부분 농가는 중세시대 귀족 가문의 영토를 구매해 개조한 것으로 시설이나 자연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산안개 피어오르는 풍경 속에서 올리브, 살구, 무화과 나무와 벗하며 산책하는 즐거움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토스카나는 우리나라의 도(道)처럼 피렌체, 시에나, 키안티 등을 전부 아우르는 지역 단위인데, 장기간 머물 장소를 추천하라면 단연 루카(Lucca)를 꼽겠다.
작약과도 같은 피렌체에 비하면 루카는 수수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에는 르네상스 미술도, 세계사에 길이 남는 대성당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잔잔하고 조용하며 고만고만하다. 이는 루카의 오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탈리아에서 치열한 영토 싸움이 전개되던 12세기부터 500년 동안 루카는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했다. 전쟁에도 연루되지 않았고 다른 국가에 땅을 내주지도 않았다. 하여 이곳 사람들은 덜 개방적이고 더 조심스러운 삶에 익숙하다.
토스카나 지역의 관문도시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왼쪽)과 피렌체 시내 거리 풍경.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토스카나, 그리고 루카에서는 느리게 여행해야 한다. 그 느린 여행의 아지트로 농가 ‘아이 케드리(I Cedri)’를 추천한다.
40에이커(약 4만9000평) 넓이의 아이 케드리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뺏는 것은 대리석으로 주변을 두른 야외수영장이다. 거목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고지 위 수영장은 하늘과 초원, 그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중세시대 마을을 향해 열려 있다. 이곳 주인은 레오나르도 모르디니(Reonardo Mordini). 아이 케드리는 대대로 레오나르도 집안의 영토였다. 800년 넘는 긴 역사 동안 와인농가, 실크공장, 별장 등으로 쓰였다.
그의 아내 다니엘라 파피(Daniela Papi)와 함께 농가를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숲 속 산책이다. 올리브나무 주변으로 체리, 무화과, 살구, 호두 나무가 심어졌다. 길은 대나무 숲으로, 작은 성당으로, 토마토와 감자가 자라는 텃밭으로 이어진다. 다니엘라는 “이것이 농약 한 줌 뿌리지 않은 유기농 토마토”라며 못생긴 토마토를 보여준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도시 피사는 루카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아이 케드리는 여행자들을 위해 4개의 별채를 갖추고 있다. 모두 전형적인 토스카나 스타일의 집이다. 외벽은 토스카나 돌이 사용됐고, 토스카나에 지천인 호두나무가 서까래와 기둥으로 쓰였다. 바닥과 벽면은 테라코타 타일로 꾸며졌다. 자연으로 지은 집은 조금 춥긴 하지만 잘 자라난 국화처럼 그윽하다.
이른 아침, 침대 밖으로 나와 농가 주변을 산책하는 시간은 달고 맛나다. 공기는 찬 듯 서늘하고 산안개는 마을 인근, 저 멀리 바르가 마을까지 강처럼 흐른다. 하루 전날 미리 냉장고에 채워놓은 오렌지주스를 빵과 함께 먹으면 차갑고 물맛 좋은 생수를 마시는 듯 기분이 상쾌해진다. 겨우 하룻밤일 뿐인데 몸 안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가 느껴지는 듯하다.
식사는 루카 시내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 ‘라 모라(La Mora)’에서 하면 좋겠다. 레스토랑은 삿포로의 성당처럼 깨끗한 얼굴이다. 짙은 갈색 테이블과 의자를 제외하고 천장, 문, 테이블보 등은 모두 흰색이다. 식당 홀 밖 야외에는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여 있는데, 그 주변으로 감나무 무화과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담쟁이덩굴 가득한 돌담 너머로는 루카 외곽의 초원이 보인다. 돌담 옆으로는 이따금씩 기차가 지나간다.
이 식당 음식은 모두 루카 지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진다. 호두, 보리, 올리브오일 등으로 만든 파스타와 빵이 대표적인 메뉴. 질 좋은 살라미와 프로슈토를 활용한 메뉴도 있다. 루카의 한쪽인 가르파그나나(Garfagnana) 지역은 고원지대라 염소 돼지 소를 방목하기에 최적의 환경. 여기서 생산되는 육류에서는 비릿함 대신 서늘한 풀향이 나는데, 라 모라는 그 육류를 활용한 토마토소스를 곁들인 토끼요리, 호박꽃잎에 치즈와 고기 다진 것을 채워 약한 불에 튀긴 피오리 디 주키니(Fiori di Zucchini) 등을 선보인다. 포르치니 버섯도 이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만큼이나 자주 접하게 되는 요리다.
포르치니 버섯을 곁들인 ‘라 모라’의 파스타.
뉴욕의 커피숍처럼 많은 교회들
루카에는 크고 작은 교회들이 뉴욕의 커피숍만큼이나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볼거리는 산마르티노(San Martino) 대성당. 이곳에는 ‘검은 얼굴의 예수’가 있다. 루카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이 예수 조각상을 ‘성스러운 얼굴’이라 부르며 모시는데, 여기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검은 얼굴의 예수’는 원래 예루살렘 인근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가톨릭과 이슬람이 종교전쟁에 얽혀 100여 년간 싸움이 계속되던 시절,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조각상을 배에 태워 바다로 띄워보냈다. 그렇게 바다를 떠돌던 조각상이 이곳 루카에 당도했다는 것.
예수가 검은 얼굴을 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만 있을 뿐 확실한 논거는 없다. 혹자는 예수의 출생지와 주변 인물들을 근거로 추론해보면 예수의 얼굴이 까무잡잡한 색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정설은 아니다. 어쨌든 이곳 산마르티노 대성당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