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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떨지는 마시라. 이상은 가상 시나리오니까. 이처럼 섬뜩한 상황은 AI가 대변이를 일으켜 인체 면역체계를 붕괴시킨 뒤 사람을 숙주 삼아 사람과 사람, 대륙과 대륙 사이로 급속히 퍼져나가는 ‘판데믹(Pandemic)’, 즉 전염병의 대유행을 가정한 것이다.
판데믹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pan(모두)’과 ‘demic(사람)’의 합성어다. 한마디로, 막강한 전파력(전염성)을 무기로 한번 발생하면 모든 사람을 전염시킨다는 뜻이다. 1918년 전 세계에서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1968년 100만명이 사망한 홍콩 독감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 발생 한 달 만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을 강타한 AI가 주목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이번 AI는 보통 겨울철에 발생해 봄에 소멸되던 패턴을 벗어나 고온의 날씨가 이어지는 5월 중순까지 계속되면서 장기전에 접어들었고, 발생 지역도 농촌에서 도시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일각에서 베트남 등에서 발생하는 남방계 AI 바이러스가 한반도에 토착화 단계로 접어든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류인플루엔자(AI)치료제 타미플루(위).서울까지 AI가 확산된 가운데 5월12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서 공무원과 방역업체 직원들이 닭과 오리 등 가금류를 살처분하고 있다.
문제는 AI의 인체감염 가능성이다. 만약 이번 AI 바이러스가 남방계라면 인체감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003년 12월 이후 현재까지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AI 인체감염자가 발생해 2008년 4월 현재 총 382명이 감염되고 241명이 사망하는 높은 치사율(63.1%)을 보이고 있다.
고려대 의대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이런 양상을 ‘프리(pre) 판데믹’이라고 하는데, 가족 간 전염은 곧 대변이가 머지않았음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같은 상황을 견디고 헤쳐나갈 수 있는 AI 치료제와 백신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을까. 불행히도 한국의 AI 치료제 비축 창고는 전체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 국민 4900만명 가운데 겨우 2.5%(124만명)가 쓸 수 있는 양의 타미플루만 비축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WHO가 권장하는 전체 인구의 20%보다 턱없이 낮은 수준. 결국 판데믹이 도래할 경우 군인, 경찰, 정부 고위관료 등 사회지도층 인사를 중심으로 ‘선착순’에 따라 타미플루를 공급받는 최악의 사태가 올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타미플루는 예방백신이 아니라 감염 후 48시간 내에 사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사후 치료제다. 한국 창고에는 AI 백신이 하나도 없다. 미국이 590만명, 영국이 350만명분의 백신을 보유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이 5월8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한 전북 정읍시의 한 방역 초소를 방문해 철저한 조사와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타미플루 추가 구입량인 125만명분을 구입하는 데 드는 예산(약 250억원)은 예비비로 충당하면 되지만, 정작 이를 판매하는 로슈는 1년 전에 구입을 예약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I가 세계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캐나다 등은 AI 유행에 대비해 타미플루를 앞다퉈 사들였지만 그동안 한국은 예산타령에 매번 미뤄오기만 했다. 이제야 독점공급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무기화’ 가능성에 눈떴을 정도다.
학계에서는 타미플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AI 치료제 정책에 회의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영국 국립의학연구소는 5월15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에서 AI 인체감염 환자에게서 분리한 H5N1 바이러스의 표면단백질에서 타미플루(성분명 오셀타미비어)에 대한 내성을 갖게 만드는 변이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또 다른 AI 치료제인 ‘리렌자’(성분명 자나미비어)에 대해서는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이는 알약 형태인 타미플루 외에도 흡입형인 리렌자를 함께 비축할 필요가 있다는 근거가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AI 치료제를 100% 타미플루로만 비축하려는 한국 정부로서는 여간 찜찜한 연구결과가 아닌 셈이다.
녹십자 2010년 출시 목표로 백신 개발 중
AI 백신은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딘 편이다. 스위스 미국 등이 구매한 다국적 제약사 GSK의 신형 AI 백신은 아직 유럽 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선진국들이 이미 사들이기 시작했다. 원칙적으로 보건당국의 판매허가가 나야 구매할 수 있지만 AI 같은 응급용은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정부 지원을 받은 녹십자가 2010년 출시를 목표로 AI 백신을 개발 중이다. 올해 6월 완공되는 전남 화순의 백신공장이 그 중심에 있다. 하지만 기존 약물의 효능을 무력화하는 AI 변종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출현 앞에서 얼마나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할지는 미지수다.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상용화까지 2~3년이 걸리는 독성시험과 임상시험 등 까다롭고 지난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홍하일 대표는 “당장은 AI 치료제와 백신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AI의 숙주 구실을 하는 닭과 오리의 품종 획일성을 벗어나야 한다”면서 “수익성이 높은 단일품종을 열악한 환경에서 키우는 공장형 축산방식은 면역력에 취약한 단일품종의 닭과 오리를 양산해 ‘판데믹’ 재앙을 앞당길 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