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 리베토의 1961~2001년 수확연도별 시음 와인들.
해발고도가 높은 언덕의 남향 언저리는 일조량이 많아 겨울 동안 쌓인 눈이 초봄에 빨리 녹는다. 또 서늘한 기후의 영향으로 일교차가 커 포도알 속의 산도와 당도가 고루 함유될 수 있는데, 바롤로의 명산지는 한결같이 이처럼 고도가 높은 지대에서 나온다. 낮은 곳은 300m, 높은 곳은 600m에 이른다.
피에몬테에는 네비올로뿐 아니라 여러 가지 품종이 재배되는데, 가을걷이가 끝난 뒤 텅 빈 포도밭을 보면 그게 네비올로 밭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네비올로 밭은 단풍도 들지 않을 만큼 푸르다. 활엽수보다는 상록수, 침엽수에 가깝다. 바르베라나 돌체토 밭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도 네비올로 밭은 좀처럼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산도와 당도 고른 고지대 포도로 만들어
금방 마실 수 있는 와인은 누구나, 어떤 밭이나 만들 수 있지만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땅이 결정하므로. 김장김치도 잘 장만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감칠맛이 나지 않는가. 묵은 맛은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까닭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하고 좋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렇다면 오래된 와인은 어떤 맛일까. 자신보다 더 숙성한 와인, 더 오래 묵은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란 참 묘해서 마셔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그 기분이란 ‘내가 이렇게 노쇠했구나’라는 언짢음일 수도 있고, ‘참 제대로 숙성되었구나’라는 안도감일 수도 있다.
오래된 바롤로의 맛을 찾으러 여러 양조장을 다녔다. 나 홀로 바롤로를 다니노라면 참 즐겁다. 굽이굽이 펼쳐진 산등성이를 운전하는 기분도 좋고, 계절 따라 돋아나는 싱싱한 채소 맛도 좋고, 산해진미로 승부하는 맛집 나들이도 좋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좋은 건 나 자신보다 더 오래 묵은 와인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양조장 리베토(Rivetto)를 찾은 것은 지방 와인협회인 알베이자(Albeisa)의 도움을 통해서다. 1902년부터 와인을 생산해온 리베토의 수확연도별 시음에서 필자보다 더 숙성한 건 1961년산과 1964년산이다. 애석하게도 1961년산은 이미 노쇠해서 빛깔로나 입맛으로나 더 버틸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굳건한 구조 위에 세워진 벽돌집 같은 질감은 벌써 녹아내렸다. 빛깔도 갈색으로 변해 누런 기미까지 보인다.
1964년산은 3년밖에 차이나지 않아도 입 안에서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타닌 기운은 미약해도 입 안을 뻑뻑하게 만든다. 과일 아로마는 흔적이 없어도 병 속에 갇혀 새로 생성된 금속성의 부케가 약간의 단내까지 느껴지는 묘한 향기를 뿜어낸다. 마흔을 훌쩍 넘긴 와인의 향기는 바롤로 땅속의 기운을 길어올려 여행자의 여독을 풀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