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루스의 집들은 돌로 지어졌다.
에피루스(Epirus)로 가는 길은 거대한 산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여정(旅程)이다. 올리브나무 경작지와 걸프해를 지나 자동차는 한계령에 버금가는 ‘숲의 심장’으로 미끄러진다. 아테네에서 6시간. “이곳이 에피루스의 초입”이라는 가이드의 말에 눈을 뜨니 사방이 온통 울창한 숲이다. 에피루스는 우리나라의 치악산 자락과 비교할 만하다. 넓지 않은 도로는 완만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장대한 풍경을 가로지른다.
마침내 도착한 첫 여행지, 자고리(Zagori)에서 탄복하고 말았다. 해발 800m의 고지대, 산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풍경 너머로 수십여 채의 돌로 만든 집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길 역시 오돌토돌한 돌이 깔려 있어 자동차 진입이 안 된다. 여행자는 가방을 어깨에 지고 호텔까지 걸어가야 한다. 돌길은 평평하지도 넓지도 않아 바퀴 달린 가방을 무작정 끌 수도 없다. 돌로 만든 담, 돌로 만든 집, 돌로 만든 길을 걸으면서 마을 광장에 박혀 있는 수령 800년이 넘은 버즘나무를 바라본다.
버즘나무 한쪽 그늘과 벗하며 세워진 자그마한 레스토랑에서는 그리스 전통악기인 ‘부주키’의 선율이 새어나온다. 레스토랑에서는 영국 여행객 일행의 소박한 식사가 한창이다. 열 명 남짓한, 예순에서 여든가량의 ‘어르신’들이다. 유럽에서조차 ‘비밀의 땅’이라 불리는 에피루스에는 전세버스를 탄 단체관광객은 찾아볼 수 없다.
막대를 휘둘러 호두를 따는 에피루스의 노인.
호텔에 짐을 부리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돌담 사이사이엔 블랙베리, 포도, 호두나무가 심어져 있다. 안내를 맡은 가이드가 손수 따준 열매들은 달고도 고소하다. “여행자들은 그리스 하면 옥색 바다와 해변, 코코넛나무만 생각하는데, 그리스 전체의 90% 이상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산의 90% 이상이 해발 2000m가 넘는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에피루스는 이러한 그리스가 품은 울창한 산림의 대표 지역으로, 깊은 숲과 계곡이 셀 수 없이 많아 당도 높은 과일과 허브가 지천에 널려 있다고 한다. 에피루스에 간다고 했을 때 아테네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오겠다”며 부러워했던 의미를 이제야 알겠다.
고령의 키키차 할머니를 대신해 ‘키키차스 파이’를 운영하고 있는 콘스탄티노스가 키키차 파이를 내보이며 웃고 있다.
100여 마리의 양떼를 지키는 양치기 개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막대를 휘둘러 호두를 따는 노부부, 마을 어귀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가 빚어내는 에피루스의 풍경은 그토록 맛난 먹을거리와 더불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에피루스 여행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아테네 같은 대도시와 달리 교통수단이 완벽하지 않아 차를 빌리거나 가이드를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힘들게 한 여행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법이다. 무엇보다 자연식을 선보이는 크고 작은 식당들이 즐비해 즐겁게 여행할 수 있다. 뜨거운 재와 숯으로 구워낸 토끼요리와 기름기 없이 포근포근한 야채파이로 유명한 미칼리스(Michalis·(30) 26530 71632), 생후 1년 반 미만의 어린 양으로만 조리해 양 특유의 누린내가 없이 보들보들 맛있는 양고기로 유명한 니코스 · 이오일리아(Nikos · Ioylia·(30) 26530 41893) 등 소박하면서도 맛난 식당이 셀 수 없이 많다.
키키차 할머니의 전설, 키키차스 파이
에피루스에는 추천하고 싶은 레스토랑이 많지만 굳이 한 군데를 고르라면 단연 키키차스 파이(Kikitsa’s Pie)다. 키키차스 파이는 에피루스의 스타다. 키키차는 이 바삭거리는 파이를 에피루스의 명물로 만든 키키차 할머니의 이름이다. 에피루스 사람들은 이 이름에서 얇고도 아삭한 파이의 ‘절대 맛’을 떠올린다. 이를테면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 같은 오래된 명성인 셈인데, 이 명성을 체험하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전설’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여행객 일행이 에피루스를 여행하던 중 모노덴드리(Monodendri)에 도착한다. 당시 키키차 할머니는 이곳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었다. 허기를 호소하던 프랑스인들에게 뭔가 만들어줄 게 없을까 고민하던 키키차 할머니는 약간의 치즈와 달걀이 들어간 지금의 파이를 만들어준다. 이 파이를 맛본 프랑스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키키차 할머니의 음식솜씨를 자랑한다. 음식은 입소문이 절반이라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소문 듣고 왔다”며 몇몇 관광객이 찾아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도 식도락꾼들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다국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키키차 할머니는 커피숍을 파이 가게로 바꾸고 지금의 성공을 견인했다.
그리스 산악마을 에피루스에서 만난 양치기와 양떼.
에피루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계곡도 있다
에피루스에서 꼭 발걸음을 해야 할 곳은 세계에서 가장 깊다는 비코스(Vikos) 캐니언으로 그 깊이가 무려 1850m에 이른다. 까마득한 깊이로 치닫는 캐니언의 주변으로는 구름과 계곡, 소나무와 전나무가 질서 없이 펼쳐진다. 자연의 숨결이 깊으니 그곳에는 곰과 사슴, 야생염소와 자칼도 서식한다고 한다. 캐니언 주변의 산책로를 탐험하듯 거닐다 보면 짐승의 대변인 듯한 배설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이드는 단박에 “갈색 곰의 것”이라고 판정했다. 갈색 곰은 블랙베리의 일종인 야생열매를 좋아하는데, 배설물에 들어 있는 검은 알맹이가 그 야생열매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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