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다인이 되려면 직접 차씨를 심고 길러 차를 덖어 마셔야 한다. 그래야만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노동의 신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 비승비속(非僧非俗)이 되어 설잠(雪岑)으로 불리던 그야말로 요즘의 다인들이 존경할 만한 참다인이 아니었나 싶다. 자연의 축복과 인간의 수고를 모르고 어찌 차 한 잔의 소중함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나그네는 일찍이 경주 금오산을 찾아가 김시습이 차를 심고 가꾸었다는 용장사 터를 둘러본 적이 있다. 김시습이 그곳에 매월당이란 산방(山房)을 지어 한양에서 구한 책 10만 권을 쌓아놓고 독서하며 차나무를 길렀던 것이다.
집 북쪽에 차를 심으며 낮을 보내고산 남쪽에서 약초를 캐며 봄을 보내네(堂北種茶消白日 山南採藥過靑春).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들리는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8개월 만에 글자를 깨쳤고, 3세 때 시를 지었으며 5세 때 세종에게 불려가 장래 크게 쓰일 것이라는 전지를 받고 오세(五歲)라는 호를 가지게 된 김시습. 이후 그는 13세까지 대사성 김반 등에게서 사서삼경 등을 배운다. 그러나 15세에 어머니가 죽자 학문을 잠시 접고 어린 나이에 시묘살이를 한다. 그 뒤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학문에 힘쓴다. 그가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입신양명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그의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후지(後志)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파란만장했던 천재의 삶 차 마시며 독서와 저술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려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중략) 도(道)를 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홀로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김시습의 마음이 잘 나타난 구절로, 당시 그는 중흥사에서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해버린다. 이후 그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만행하다 책을 구하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간곡한 권유로 내불당에서 불경언해를 돕기도 하는데, 왕위찬탈의 주역들이 세도를 부리는 현실에 절망하여 31세 때 경주 금오산에 은거해버린다. 이후 세조의 원찰인 원각사 낙성회(落成會)에 나아간 적도 있으나 대부분 매월당에서 차를 벗삼아 독서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쓰고 산거(山居)를 소재로 한 시편들을 모아 ‘유금오록’를 남긴다. 7년 세월의 은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10여년을 보내다 돌연 47세에 안 씨를 맞아들여 환속을 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비윤씨 사건’이 나자 다시 방랑길에 오른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무량사였고, 이미 육신의 병이 깊어진 그는 57세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김시습의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차를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독서와 저술 삼매에 빠졌던 금오산 산거 시절이었을 터. ‘금오신화’와 그가 남긴 빼어난 선시(禪詩)들을 보면 그가 마신 차 한 잔의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다. 그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가(堂家)에서 잔을 비우는 사람 멋없는 사람/ 어찌 승설차(勝雪茶·눈 속의 차)의 청허함을 알 수 있으랴.’ 나그네는 무량사 영정각에서 가슴이 뜨거운 그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부도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뜨거운 가슴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한 잔의 청허한 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상념에 잠겨본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대천IC를 빠져나와 보령 시내를 지나 21번 국도를 타고 가다 40번 국도를 이용, 성주터널을 지나 외산에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무량사에 이른다.
나그네는 일찍이 경주 금오산을 찾아가 김시습이 차를 심고 가꾸었다는 용장사 터를 둘러본 적이 있다. 김시습이 그곳에 매월당이란 산방(山房)을 지어 한양에서 구한 책 10만 권을 쌓아놓고 독서하며 차나무를 길렀던 것이다.
집 북쪽에 차를 심으며 낮을 보내고산 남쪽에서 약초를 캐며 봄을 보내네(堂北種茶消白日 山南採藥過靑春).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들리는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8개월 만에 글자를 깨쳤고, 3세 때 시를 지었으며 5세 때 세종에게 불려가 장래 크게 쓰일 것이라는 전지를 받고 오세(五歲)라는 호를 가지게 된 김시습. 이후 그는 13세까지 대사성 김반 등에게서 사서삼경 등을 배운다. 그러나 15세에 어머니가 죽자 학문을 잠시 접고 어린 나이에 시묘살이를 한다. 그 뒤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학문에 힘쓴다. 그가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입신양명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그의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후지(後志)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파란만장했던 천재의 삶 차 마시며 독서와 저술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려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중략) 도(道)를 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홀로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김시습의 마음이 잘 나타난 구절로, 당시 그는 중흥사에서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해버린다. 이후 그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만행하다 책을 구하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간곡한 권유로 내불당에서 불경언해를 돕기도 하는데, 왕위찬탈의 주역들이 세도를 부리는 현실에 절망하여 31세 때 경주 금오산에 은거해버린다. 이후 세조의 원찰인 원각사 낙성회(落成會)에 나아간 적도 있으나 대부분 매월당에서 차를 벗삼아 독서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쓰고 산거(山居)를 소재로 한 시편들을 모아 ‘유금오록’를 남긴다. 7년 세월의 은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10여년을 보내다 돌연 47세에 안 씨를 맞아들여 환속을 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비윤씨 사건’이 나자 다시 방랑길에 오른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무량사였고, 이미 육신의 병이 깊어진 그는 57세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김시습의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차를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독서와 저술 삼매에 빠졌던 금오산 산거 시절이었을 터. ‘금오신화’와 그가 남긴 빼어난 선시(禪詩)들을 보면 그가 마신 차 한 잔의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다. 그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가(堂家)에서 잔을 비우는 사람 멋없는 사람/ 어찌 승설차(勝雪茶·눈 속의 차)의 청허함을 알 수 있으랴.’ 나그네는 무량사 영정각에서 가슴이 뜨거운 그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부도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뜨거운 가슴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한 잔의 청허한 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상념에 잠겨본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대천IC를 빠져나와 보령 시내를 지나 21번 국도를 타고 가다 40번 국도를 이용, 성주터널을 지나 외산에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무량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