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세브란스병원 암센터 2층 외래에는 두 개의 병실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항암제 투약을 받는 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중 한 곳, 12개의 침상이 놓인 방 한쪽에서 장영희 서강대 교수(54·영문학)가 항암주사를 맞고 있다. 그런데 자세가 영 ‘불량’하다. 난치병 환자면 환자답게 침대에 누워 기력도 좀 보하고 잠도 청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장 교수는 꼭 어디 놀러라도 온 사람만 같다. 남들 다 누워 있는데 홀로 의자에 앉아 있고, 책을 읽고 있고, 맑은 눈을 반짝이며 환히 웃고 있다. 도무지 삶의 초비상사태를 맞은 사람의 ‘포즈’가 아니다.
빼어난 영문학자이자 번역작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 채택률 1위를 자랑하는 영어교과서 저자, 무엇보다 제자들에 대한 헌신으로 이름 높은 장영희 교수는 지금 척추암을 앓고 있다. 유방암을 이겨낸 지 3년 만이다. 안 그래도 한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와 오른팔이 몹시 불편한 몸이다. 그의 암 재발 소식을 들은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가 “하나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하고 외쳤다는 말 그대로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다.
2004년 9월, 장 교수는 한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을 끝내며 자신의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빨리 입원하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이상하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인데도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냥 풀썩 주저앉았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방암 이겨냈더니 척추암 … 투병 중에도 여전히 밝은 얼굴
어쩌면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장 교수는 한술 더 떠 “사실은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너무 비논리적이잖아요. 부조리한 상황은 원래 웃긴 거거든. 3년 전 처음 암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어요. 안식년이라 하버드대학 방문교수로 가 있었거든요. 서울에 있었으면 정기검진이고 뭐고 무시했을 텐데 그때는 시간도 좀 있고 해서 보험료 밑천 뺀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았어요. 암이라더군요.”
가족 외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홀로 수속을 밟고 들어가 수술대 위에 누웠다.
“무서웠어요. 무척 슬프더군요. 마취담당 의사가 주사를 놓더니 ‘이전에 태권도를 배웠다’며 우리말로 숫자를 세줬어요. ‘한나, 뚜울, 쎄엣…’ 근데 그 발음이 너무 웃긴 거예요. 웃음이 터져 나와 혼났다니까. 아주 희극적인 상황이잖아요.”
그렇게 ‘황당한 시추에이션’ 속에서 수술을 마친 장 교수는 귀국 후 방사선 치료를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는 생각했다. ‘흠, 역시 장영희군. 남들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암을 이렇게 초전박살 내다니….’
암 따위는 다 잊고 다시 촌음을 다투는 바쁜 생활로 돌아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목과 등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저 무리해 찾아온 근육통이려니 했다. 아침이면 잘 일으켜지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간간이 물리치료를 받으며 글을 쓰고 수업을 진행했다. 결국 사지를 꼼짝할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진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암이 전이됐다고 했다.
“그것도 웃기잖아요. 한 번 된통 앓았으면 그 후부턴 조심했어야 하는데 몸 부실하게 놀린 거 하며, 유방암이 뼈로 전이될 확률이 10%라는데 하필이면 거기 걸려든 거 하며. 집에서 병원으로 장정 네 사람이 든 들것에 실려가면서 혼자 킥킥 웃었어요.”
그렇듯 내게 찾아든 크나큰 불행을 한발 떨어져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은 그의 신비스러우리만치 강한 생명력에서 나온다. 기억하는 생의 첫 순간부터 중증장애인이었던 그는 남들에겐 쉽다 못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쉽지 않았다.
우선 그에게 ‘학교에 간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간다’의 문제’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에 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어머니는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를 들락거려야 했다. 중학교 진학은 더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태두인 장왕록 선생(서울대 명예교수·1994년 작고)이다. 아버지는 딸이 이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남과 같은 교육을 받는 것뿐이라 판단했다. 해서 그를 장애인재활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는 일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학교들은 신체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치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일일이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죠.”
어렵사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서강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뒤 모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려던 시도 또한 보기 좋게 좌절당한 것이다. 면접관들은 그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 글에서 ‘오히려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고, 미소까지 띠며 차분하게 인사한 후 면접실을 나왔다’고 적고 있다.
장애 편견과 차별 탓 박사과정 입학 좌절 ‘유학 결심’
그는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 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춰볼 양으로 동생과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갔다. ‘킹콩’을 상영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에세이집 ‘내 생애 단 한번’ 중)
그는 ‘영화 속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결단을 내렸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편견과 차별에 의해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플 책을 샀다. 이듬해 8월, 그는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주립대학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는 ‘정상인’에게도 힘든 유학생활을 혼자 몸으로 꿋꿋이 견뎌냈다.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국해 모교 강사로 교단에 첫발을 디뎠다. 정식 교수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치열하게 살았다. 수업을 맡은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외웠다. 수업시간엔 더할 수 없이 깐깐하지만 사적으로는 언니처럼, 엄마처럼 한없이 따뜻하고 의지가 되는 스승이 됐다.
그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는 제자들이 쓴 글들이 여럿 올라 있다. ‘미국문학 시간, 선생님이 목발을 짚고 천천히 문으로 들어오실 때 가슴으로 퍼지던 행복감…’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세상이 보인다고, 더 많이 보실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가장 가슴에 남는다’ ‘선생님이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겨울이면 뉴욕대학 캠퍼스는 늘 눈에 덮였다고 한다. 무릎까지 묻히는 눈을 헤치고 도서관을 다니셨다는 선생님. 목발이 부러져 누군가 도움을 줄 때까지 혼자 캠퍼스에 앉아 계실 수밖에 없었다던 선생님. 어둡고 추운 그 겨울날, 그 고독을 이해하기에 선생님을 더욱 사랑한다’….
투병 시작을 알리는 글을 통해서도 그는 좌절한 이들에게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 힘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강의 준비·교과서 집필·학교 행사 주관까지 “정말 환자 맞아?”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착하다. 늘어선 음식점 중 어느 한 집만 유난히 손님이 없으면 ‘저 가게 주인은 지금 얼마나 애가 탈까’ 싶어 맘이 아파온다. 정박아 외아들을 둔 단골 구멍가게 안주인에게 “걔, 바보지요?” 하고 이죽거리는 중년 남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 추운 겨울날 학교 앞 노점 할머니가 못내 애처로워 필요도 없는 부채를 두 개씩이나 사는 제자의 모습을 훔쳐보고는 주저 없이 A 학점을 준다.
하지만 그는 또한, 삶은 피 흘리지 않곤 승리할 수 없는 전쟁터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타고난 파이터다. 그도 인정한다.
“전 엄격하고 투쟁적인 사람이에요. 근성이 있고 헌신적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울기도 잘하고 순진하게 속기도 잘 속아요.”
하지만 그런 두 가지 면모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법은 없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도 나와 남에게 똑같은 삶의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이다. 이웃의 눈물에 아파하고 공감하는 만큼, 그 누군가에게 눈물이 되고 아픔이 되지 않기 위해 무수히 자신을 채찍질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삶을 죽도록 사랑한다. ‘목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일,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한 통증 없이 재채기 한 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늘 잊지 않고 되새김질하며 살아왔다.
장 교수는 지금까지 모두 14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경과가 좋은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4차례 더 주사를 맞아야 하는 등 완치까지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럼에도 장 교수는 마치 “암? 그게 뭐야?” 하는 것처럼 새 달, 새 학기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고 행복하다.
“우선 강의할 게 세 과목이에요. 번역은 발병 전 계약한 것 하나, 새로 한 것 세 권 합쳐 모두 4권이고요. 신문에 연재하던 ‘영미시산책’을 곧 책으로 묶어낼 예정이고, 이건 아직 우리 어머니께는 비밀인데 중·고등학교 교과서 일도 새로 시작했어요.”
‘내가 할 일이다’ 싶어 11월에 있을 ‘서강대 영문과 후원의 밤’ 준비위원장까지 맡았다는 대목에선 솔직히 입이 안 다물어진다. 한 학기라도 휴직을 하고 좀 쉬면 안 되는 걸까.
“그게…, 3년 후면 안식년이 돌아오거든요. 한 학기라도 강의를 쉬면 다시 6년을 기다려야 해요. 3년 후 잘 쉬기 위해 지금은 고생을 좀 해야지요.”
교과서 일은 또 어떤가. 교과서 집필은 책 쓰기 중에서도 가장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 여동생들의 만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십 년간 아버지와 언니의 교과서 집필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그들로선 아무래도 무리다 싶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제가 그랬어요. 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다, ‘장영희 교과서’의 맥이 끊기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더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잖아요. 이 일을 안 한다고 해도 전 분명 또 다른 일을 찾을 테고, 그럴 거라면 가장 보람 있고 재미있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좋잖아요.”
장 교수는 몸이 더 나빠진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오만일 수도 있고 오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생각하면 뭘 하나요. 저한테 하나 좋을 게 없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돌아보지 않아요.”
죽음도 주눅 들 만큼 환한 얼굴로 병과 싸워가고 있는 그는 “나를 살게 하는 근본적 힘은 역시 문학”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쳐줍니다. 전 기동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문학을 통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워왔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제 와서는 제 스스로가 문학의 한 부분이 된 듯해요.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 다시 일어설 겁니다.”
암이 재발하기 전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삶의 요소요소마다 위험과 불행은 잠복해 있게 마련인데, 이에 맞서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그 싸움은 너무나 비장하고 슬프다. …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은 죄이다.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어둠의 감옥 속에 가두어버리는 자살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장영희, 그가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빼어난 영문학자이자 번역작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 채택률 1위를 자랑하는 영어교과서 저자, 무엇보다 제자들에 대한 헌신으로 이름 높은 장영희 교수는 지금 척추암을 앓고 있다. 유방암을 이겨낸 지 3년 만이다. 안 그래도 한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와 오른팔이 몹시 불편한 몸이다. 그의 암 재발 소식을 들은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가 “하나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하고 외쳤다는 말 그대로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다.
2004년 9월, 장 교수는 한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을 끝내며 자신의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빨리 입원하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이상하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인데도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냥 풀썩 주저앉았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방암 이겨냈더니 척추암 … 투병 중에도 여전히 밝은 얼굴
어쩌면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장 교수는 한술 더 떠 “사실은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너무 비논리적이잖아요. 부조리한 상황은 원래 웃긴 거거든. 3년 전 처음 암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어요. 안식년이라 하버드대학 방문교수로 가 있었거든요. 서울에 있었으면 정기검진이고 뭐고 무시했을 텐데 그때는 시간도 좀 있고 해서 보험료 밑천 뺀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았어요. 암이라더군요.”
가족 외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홀로 수속을 밟고 들어가 수술대 위에 누웠다.
“무서웠어요. 무척 슬프더군요. 마취담당 의사가 주사를 놓더니 ‘이전에 태권도를 배웠다’며 우리말로 숫자를 세줬어요. ‘한나, 뚜울, 쎄엣…’ 근데 그 발음이 너무 웃긴 거예요. 웃음이 터져 나와 혼났다니까. 아주 희극적인 상황이잖아요.”
서강대 교정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영희 교수.
암 따위는 다 잊고 다시 촌음을 다투는 바쁜 생활로 돌아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목과 등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저 무리해 찾아온 근육통이려니 했다. 아침이면 잘 일으켜지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간간이 물리치료를 받으며 글을 쓰고 수업을 진행했다. 결국 사지를 꼼짝할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진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암이 전이됐다고 했다.
“그것도 웃기잖아요. 한 번 된통 앓았으면 그 후부턴 조심했어야 하는데 몸 부실하게 놀린 거 하며, 유방암이 뼈로 전이될 확률이 10%라는데 하필이면 거기 걸려든 거 하며. 집에서 병원으로 장정 네 사람이 든 들것에 실려가면서 혼자 킥킥 웃었어요.”
그렇듯 내게 찾아든 크나큰 불행을 한발 떨어져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은 그의 신비스러우리만치 강한 생명력에서 나온다. 기억하는 생의 첫 순간부터 중증장애인이었던 그는 남들에겐 쉽다 못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쉽지 않았다.
우선 그에게 ‘학교에 간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간다’의 문제’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에 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어머니는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를 들락거려야 했다. 중학교 진학은 더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태두인 장왕록 선생(서울대 명예교수·1994년 작고)이다. 아버지는 딸이 이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남과 같은 교육을 받는 것뿐이라 판단했다. 해서 그를 장애인재활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는 일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학교들은 신체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치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일일이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죠.”
어렵사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서강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뒤 모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려던 시도 또한 보기 좋게 좌절당한 것이다. 면접관들은 그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 글에서 ‘오히려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고, 미소까지 띠며 차분하게 인사한 후 면접실을 나왔다’고 적고 있다.
장애 편견과 차별 탓 박사과정 입학 좌절 ‘유학 결심’
그는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 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춰볼 양으로 동생과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갔다. ‘킹콩’을 상영하고 있었다.
장영희 교수의 눈매는 아버지 장왕록 선생과 꼭 닮았다.
그는 ‘영화 속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결단을 내렸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편견과 차별에 의해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플 책을 샀다. 이듬해 8월, 그는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주립대학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는 ‘정상인’에게도 힘든 유학생활을 혼자 몸으로 꿋꿋이 견뎌냈다.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국해 모교 강사로 교단에 첫발을 디뎠다. 정식 교수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치열하게 살았다. 수업을 맡은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외웠다. 수업시간엔 더할 수 없이 깐깐하지만 사적으로는 언니처럼, 엄마처럼 한없이 따뜻하고 의지가 되는 스승이 됐다.
그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는 제자들이 쓴 글들이 여럿 올라 있다. ‘미국문학 시간, 선생님이 목발을 짚고 천천히 문으로 들어오실 때 가슴으로 퍼지던 행복감…’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세상이 보인다고, 더 많이 보실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가장 가슴에 남는다’ ‘선생님이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겨울이면 뉴욕대학 캠퍼스는 늘 눈에 덮였다고 한다. 무릎까지 묻히는 눈을 헤치고 도서관을 다니셨다는 선생님. 목발이 부러져 누군가 도움을 줄 때까지 혼자 캠퍼스에 앉아 계실 수밖에 없었다던 선생님. 어둡고 추운 그 겨울날, 그 고독을 이해하기에 선생님을 더욱 사랑한다’….
투병 시작을 알리는 글을 통해서도 그는 좌절한 이들에게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 힘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강의 준비·교과서 집필·학교 행사 주관까지 “정말 환자 맞아?”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착하다. 늘어선 음식점 중 어느 한 집만 유난히 손님이 없으면 ‘저 가게 주인은 지금 얼마나 애가 탈까’ 싶어 맘이 아파온다. 정박아 외아들을 둔 단골 구멍가게 안주인에게 “걔, 바보지요?” 하고 이죽거리는 중년 남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 추운 겨울날 학교 앞 노점 할머니가 못내 애처로워 필요도 없는 부채를 두 개씩이나 사는 제자의 모습을 훔쳐보고는 주저 없이 A 학점을 준다.
최근 펴낸 산문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
“전 엄격하고 투쟁적인 사람이에요. 근성이 있고 헌신적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울기도 잘하고 순진하게 속기도 잘 속아요.”
하지만 그런 두 가지 면모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법은 없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도 나와 남에게 똑같은 삶의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이다. 이웃의 눈물에 아파하고 공감하는 만큼, 그 누군가에게 눈물이 되고 아픔이 되지 않기 위해 무수히 자신을 채찍질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삶을 죽도록 사랑한다. ‘목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일,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한 통증 없이 재채기 한 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늘 잊지 않고 되새김질하며 살아왔다.
장 교수는 지금까지 모두 14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경과가 좋은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4차례 더 주사를 맞아야 하는 등 완치까지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럼에도 장 교수는 마치 “암? 그게 뭐야?” 하는 것처럼 새 달, 새 학기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고 행복하다.
“우선 강의할 게 세 과목이에요. 번역은 발병 전 계약한 것 하나, 새로 한 것 세 권 합쳐 모두 4권이고요. 신문에 연재하던 ‘영미시산책’을 곧 책으로 묶어낼 예정이고, 이건 아직 우리 어머니께는 비밀인데 중·고등학교 교과서 일도 새로 시작했어요.”
‘내가 할 일이다’ 싶어 11월에 있을 ‘서강대 영문과 후원의 밤’ 준비위원장까지 맡았다는 대목에선 솔직히 입이 안 다물어진다. 한 학기라도 휴직을 하고 좀 쉬면 안 되는 걸까.
“그게…, 3년 후면 안식년이 돌아오거든요. 한 학기라도 강의를 쉬면 다시 6년을 기다려야 해요. 3년 후 잘 쉬기 위해 지금은 고생을 좀 해야지요.”
교과서 일은 또 어떤가. 교과서 집필은 책 쓰기 중에서도 가장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 여동생들의 만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십 년간 아버지와 언니의 교과서 집필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그들로선 아무래도 무리다 싶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제가 그랬어요. 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다, ‘장영희 교과서’의 맥이 끊기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더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잖아요. 이 일을 안 한다고 해도 전 분명 또 다른 일을 찾을 테고, 그럴 거라면 가장 보람 있고 재미있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좋잖아요.”
장 교수는 몸이 더 나빠진다든가 죽는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오만일 수도 있고 오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생각하면 뭘 하나요. 저한테 하나 좋을 게 없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돌아보지 않아요.”
죽음도 주눅 들 만큼 환한 얼굴로 병과 싸워가고 있는 그는 “나를 살게 하는 근본적 힘은 역시 문학”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쳐줍니다. 전 기동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문학을 통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워왔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제 와서는 제 스스로가 문학의 한 부분이 된 듯해요.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 다시 일어설 겁니다.”
암이 재발하기 전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삶의 요소요소마다 위험과 불행은 잠복해 있게 마련인데, 이에 맞서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그 싸움은 너무나 비장하고 슬프다. …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은 죄이다.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어둠의 감옥 속에 가두어버리는 자살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장영희, 그가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