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컴퓨터 회장인 스티브 잡스(50)는 현대 디지털 시대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선구자이자 신화적 존재로 자리 매김한 인물이다. 최근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전 세계 940명의 CEO(최고경영자)를 상대로 ‘세계에서 가장 창의성 있는 경영자’를 조사했는데, 단연코 잡스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혁신’이라는 분야에서 아직도 그를 따라갈 만한 인물은 없어 보인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빌 게이츠보다 더 높은 우상으로 받든다는 스티브 잡스. 그는 세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PC)를 만들었고 아이콘 클릭만으로 프로그램을 여는 GUI를 개발했으며,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인크레더블’ 등을 만들어 할리우드의 방향을 바꿨다. 최근에는 ‘MP3 플레이어 아이포드(iPod)를 개발하여 디지털 음악시장마저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의 스토리가 신화로 승격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애플컴퓨터(나스닥 상장명 AAPL)는 허다하게 널린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스토리, 즉 ‘두 명의 젊은이가 창고에서 시작한 벤처’의 대표 모델이자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두 명의 스티브 청년(잡스와 워즈니악)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여,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의 컴퓨터 업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짝퉁 애플II 컴퓨터가 청계천에서 대량 복제되기 시작했는데, 실제 제5공화국의 조악한 컴퓨터 문화는 사실 애플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핸드백이 아닌 계산기 분야에서 짝퉁이 횡행했다는 것은 IT(정보기술) 한국의 오늘을 이룬 기틀이 됐다.
‘가장 창의성 있는 경영자’
주목할 만한 점은 혁신적인 애플의 디자인 철학이다. 이미 애플II 당시부터 당대의 다른 컴퓨터와는 어딘가 다른 차원의 이미지를 풍겼는데, 애플에 한 번이라도 눈길을 준 소비자는 “갖고 싶다”는 치명적인 물욕(物慾)에 빠져들게 됐다. 그리고 그 욕망은 오늘날까지 애플을 애플답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남아 있다. 최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 경영을 강조했다는데, 사실 잡스를 따라 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를 그저 디자인의 힘이라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단순히 외면의 미학이 아니라 기계의 내면적인 기능과 용도까지 고려한 총체적인 매력이기 때문이다.
이 매력의 절정은 역시 매킨토시 프로젝트였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사과 주식회사의 홍옥 프로젝트’라 불릴 만한 맹랑한 작명인데, 이 매킨토시는 오늘날까지도 ‘혁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이미 익숙해진 윈도우와 아이콘, 이를 대중에게 데려온 것은 ‘맥’이었고, 처음으로 흰 바탕에 검은 글자를 쓰기 시작한 것도 ‘맥’이었다. 처음 마우스를 접해본 이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면뿐만 아니라 외면도 IBM 계열의 PC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잡스는 탁자의 좁은 공간에도 놓일 수 있는 브라운의 커피메이커 등을 보고, 맥도 최소한의 설치 면적만을 차지하게 하리라 결심했다. 그는 케이스의 분할 선이나 나사 구멍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조차 싫어했다. 잡스에 의해 PC가 드디어 일반인도 탐나는 물건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간의 컴퓨터란 일부 마니아나 표 계산을 위한 비즈니스 전용이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용도와 지금까지 고려치 않았던 사용자를 위한 혁신을 매킨토시는 ‘즐거움이라는 혁신’으로 대중에게 전달했다. 잡스는 그 즐거움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다. 그의 패기는 “평생 설탕물이나 팔며 지낼 건가요? 함께 세계를 바꿔봅시다”며 펩시에서 스카우트해온 존스컬리에게 애플에서 쫓겨날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1달러 연봉 스톡옵션도 미수령
해고 이후 즐거움을 찾아 방랑을 시작했고, 그가 도달한 곳은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 부문을 인수해서 만든 픽사(Pixar)였다. 토이스토리, 벅스라이프, 몬스터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그리고 인크레더블까지…. 어느 하나 실망을 준 적이 없는 명작의 산실로 키워냈다. 이후 그는 쓰러져가는 애플을 구하기 위해 연봉 1달러를 받고 애플로 돌아왔다.
그 결과는? iMac, iPod 등 쏟아져 나오는 매력적 제품들과 건강해진 애플이었다. 잡스의 복귀 이후 애플 제품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즐거움’이다. 컴퓨터란 계산하는 기계가 아닌, 개인의 창의성을 증폭시키는 즐거운 기계임을 잊지 않게 해준 것이다. 1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왜 돈이 더 많이 흐르는 기업 시장이 아닌 소비자 시장에만 신경을 쓰느냐고. 그는 늘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말을 남긴다. “Gap도 양복을 만들지 않지만 성공했다.”
2004 회계연도의 잡스의 급여는 단돈 1달러. 스톡옵션 역시 수령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애플의 전설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늘 자신감에 넘친다. 시장조사를 요구하는 회사 임원들에게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할 때 시장조사를 했을까. 천만에,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혁신이야”라고 외친다.
얼마 전,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그의 인기가 부활한 이유는 그의 연설문 때문이었다. 그 짧은 인생 개괄에 녹아 있는 그의 고뇌와 비전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져도 시들지 않는 그의 청년정신 앞에, 겉늙어버린 후배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IT 업계는 그와 같은 선지자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산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빌 게이츠보다 더 높은 우상으로 받든다는 스티브 잡스. 그는 세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PC)를 만들었고 아이콘 클릭만으로 프로그램을 여는 GUI를 개발했으며,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인크레더블’ 등을 만들어 할리우드의 방향을 바꿨다. 최근에는 ‘MP3 플레이어 아이포드(iPod)를 개발하여 디지털 음악시장마저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의 스토리가 신화로 승격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애플컴퓨터(나스닥 상장명 AAPL)는 허다하게 널린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스토리, 즉 ‘두 명의 젊은이가 창고에서 시작한 벤처’의 대표 모델이자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두 명의 스티브 청년(잡스와 워즈니악)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여,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의 컴퓨터 업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짝퉁 애플II 컴퓨터가 청계천에서 대량 복제되기 시작했는데, 실제 제5공화국의 조악한 컴퓨터 문화는 사실 애플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핸드백이 아닌 계산기 분야에서 짝퉁이 횡행했다는 것은 IT(정보기술) 한국의 오늘을 이룬 기틀이 됐다.
‘가장 창의성 있는 경영자’
주목할 만한 점은 혁신적인 애플의 디자인 철학이다. 이미 애플II 당시부터 당대의 다른 컴퓨터와는 어딘가 다른 차원의 이미지를 풍겼는데, 애플에 한 번이라도 눈길을 준 소비자는 “갖고 싶다”는 치명적인 물욕(物慾)에 빠져들게 됐다. 그리고 그 욕망은 오늘날까지 애플을 애플답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남아 있다. 최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 경영을 강조했다는데, 사실 잡스를 따라 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를 그저 디자인의 힘이라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단순히 외면의 미학이 아니라 기계의 내면적인 기능과 용도까지 고려한 총체적인 매력이기 때문이다.
이 매력의 절정은 역시 매킨토시 프로젝트였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사과 주식회사의 홍옥 프로젝트’라 불릴 만한 맹랑한 작명인데, 이 매킨토시는 오늘날까지도 ‘혁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이미 익숙해진 윈도우와 아이콘, 이를 대중에게 데려온 것은 ‘맥’이었고, 처음으로 흰 바탕에 검은 글자를 쓰기 시작한 것도 ‘맥’이었다. 처음 마우스를 접해본 이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30여 전에 개발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로 혁신적 디자인 추구한 잡스의 철학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용도와 지금까지 고려치 않았던 사용자를 위한 혁신을 매킨토시는 ‘즐거움이라는 혁신’으로 대중에게 전달했다. 잡스는 그 즐거움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다. 그의 패기는 “평생 설탕물이나 팔며 지낼 건가요? 함께 세계를 바꿔봅시다”며 펩시에서 스카우트해온 존스컬리에게 애플에서 쫓겨날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1달러 연봉 스톡옵션도 미수령
해고 이후 즐거움을 찾아 방랑을 시작했고, 그가 도달한 곳은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 부문을 인수해서 만든 픽사(Pixar)였다. 토이스토리, 벅스라이프, 몬스터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그리고 인크레더블까지…. 어느 하나 실망을 준 적이 없는 명작의 산실로 키워냈다. 이후 그는 쓰러져가는 애플을 구하기 위해 연봉 1달러를 받고 애플로 돌아왔다.
그 결과는? iMac, iPod 등 쏟아져 나오는 매력적 제품들과 건강해진 애플이었다. 잡스의 복귀 이후 애플 제품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즐거움’이다. 컴퓨터란 계산하는 기계가 아닌, 개인의 창의성을 증폭시키는 즐거운 기계임을 잊지 않게 해준 것이다. 1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왜 돈이 더 많이 흐르는 기업 시장이 아닌 소비자 시장에만 신경을 쓰느냐고. 그는 늘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말을 남긴다. “Gap도 양복을 만들지 않지만 성공했다.”
2004 회계연도의 잡스의 급여는 단돈 1달러. 스톡옵션 역시 수령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애플의 전설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늘 자신감에 넘친다. 시장조사를 요구하는 회사 임원들에게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할 때 시장조사를 했을까. 천만에,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혁신이야”라고 외친다.
얼마 전,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그의 인기가 부활한 이유는 그의 연설문 때문이었다. 그 짧은 인생 개괄에 녹아 있는 그의 고뇌와 비전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져도 시들지 않는 그의 청년정신 앞에, 겉늙어버린 후배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IT 업계는 그와 같은 선지자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산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