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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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런 보고서’ 따라 관세전쟁 나선 트럼프, 다음 카드는 환율전쟁

제2의 ‘플라자 합의’ 가능성… 초장기 美 국채 매입 요구해 약달러 만드나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5-04-0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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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4월 2일(이하 현지 시간)부터 전 세계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상호관세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4월 2일(이하 현지 시간)부터 전 세계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상호관세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뉴시스]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는 1985년 9월 22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당시 서독), 일본 등 주요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모임에서 일본 엔화, 독일 마르크화에 대비해 미국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리기로 약속한 협정을 말한다. 당시 강(强)달러 상황에서 무역·재정수지의 ‘쌍둥이 적자’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미국은 4개국을 압박해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올리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플라자 합의 이후 환율 절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겪어야 했다.

    백악관 경제 고문의 보고서

    스티븐 미런 백악관경제자문위원회(CEA)위원장은 지난해 11월 41쪽 분량으로 ‘글로벌 무역 시스템재구성을 위한 사용자가이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뉴시스]

    스티븐 미런 백악관경제자문위원회(CEA)위원장은 지난해 11월 41쪽 분량으로 ‘글로벌 무역 시스템재구성을 위한 사용자가이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뉴시스]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다음 카드는 ‘환율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2기 정부 경제 분야 핵심 참모인 스티븐 미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성을 위한 사용자 가이드’라는 제목의 41쪽 분량 보고서 때문이다. 

    미런 위원장은 이 보고서에서 달러 가치 절하를 통한 무역·재정적자 해결을 위해 상대국을 관세로 압박한 뒤 미국 국채를 무이자 채권으로 교환하면 관세를 완화해주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달러를 해소하고, 미국 제조업을 부흥하며, 동시에 미국의 기축통화국 및 패권국 위상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통화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그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의 위상과 안보 리더십을 활용해 동맹국들에 이 부담을 공동으로 지우면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런 위원장은 제2 플라자 합의인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를 제안했다. 마러라고는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 이름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 ‘마러라고 합의’를 추진할지 여부는 불명확하지만, 이 보고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런 위원장을 발탁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스턴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미런 위원장은 트럼프 1기 정부 시절인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재무부 경제정책 선임고문으로 활동했다.

    美 제조업 살리려 관세 전략 쓴 트럼프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 마러라고 리조트. 미런 위원장은 약달러 상황을 만드는 ‘마러라고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 마러라고 리조트. 미런 위원장은 약달러 상황을 만드는 ‘마러라고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런 위원장이 보고서에서 “달러 약세를 위해 관세를 무기화하자”고 한 주장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미런 위원장은 “달러 가치 하락은 미국에서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계 다른 지역의 경제 수요를 미국으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관세라는 ‘채찍’과 안보 우산을 잃지 않게 해주겠다는 ‘당근’이 있다”고 주장했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미국 내 수입품 가격이 올라 수입이 줄고, 해외에서 미국산 제품 가격은 내려가 수출이 늘어나게 된다. 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미국 제조업이 살아나야 한다. 미국 내 생산을 늘리려고 사용하는 수단이 관세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을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명명하면서 각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모든 나라, 친구와 적국으로부터 미국이 갈취당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는 상대국이 부과하는 관세율 수준에 맞춰 동등한 관세를 매기는 것이다. 모든 수입품에 일정 관세를 부과하는 보편관세(universal tariff)와는 다르다. 상호관세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는 사실상 적용되지 않던 조치다. 

    관세 인플레 잡으려면 약달러 불가피

    관세를 매기면 미국 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무역 상대국의 달러 의존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임기가 4년뿐인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내년 11월 중간선거 전에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최우선 과제다. 또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면 무역수지 적자는 불가피하다. 게다가 중국 등이 미국의 관세 부과에 대응하고자 자국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절하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 분명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물가상승률과 각국 경제 환경을 반영한 미국의 실질실효환율은 플라자 합의 수준으로 올라가 있다(그래프 참조). 실제로 플라자 합의 당시 달러의 실질실효환율은 111.02였는데, 올해 1월에도 112.43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기치로 내세우며 제조업 부활을 추진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현 달러 가치 수준이 마뜩잖은 셈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다음 행보로 환율전쟁이 거론되고 있다. 

    미런 위원장도 보고서에서 관세전쟁 다음 카드로 환율전쟁을 주장했다. 미국 경제의 고질병인 무역적자와 제조업 위축 문제를 해소하려면 환율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미런 위원장은 “달러 고평가로 미국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미국 제조업이 손해를 보고 있다”면서 “약(弱)달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런 위원장이 제시한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하락시키는 방법은 각국에 미국의 초장기 국채(ultra-long-term bonds)를 매입하거나 기존 국채를 교환하도록 요구해 장기금리를 낮추고 이를 통해 약달러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런 위원장은 “각국에 미국 초장기 국채인 100년 만기 채권을 보유하게 한다면 미국 재무부의 차입 부담을 장기적으로 분산할 수 있다”면서 “그럼 글로벌 안보를 위한 미국의 차입 부담, 납세자의 부담이 완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방안을 구체화하려면 21세기 버전의 다자 통화 협정인 ‘마러라고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달라진 글로벌 환경… “역풍 직면할 수도”

    하지만 각국은 국고로 매입한 미국 국채에서 발생하는 안정적인 이자 수익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이유가 적어 미국의 초장기 국채를 구입할 리 없다. 40년 전 플라자 합의가 관철될 수 있었던 글로벌 환경과 달리, 지금은 달러 보유국이 다각화돼 협력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애덤 포즌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달러 보유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 때 일본, 독일 위주에서 지금은 중국, 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많은 국가로 분산됐다”며 “미국이 안보 관계가 긴밀한 한국, 일본, 영국 등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낼 순 있겠지만 중국과 브릭스(BRICS) 국가들,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중동 국가들의 협력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팔을 비틀어 마러라고까지 오게 하는 것은 어렵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미국이 마러라고 합의를 추진할 경우 엄청난 역풍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마러라고 합의를 추진할 수도 있다. 모리스 옵스펠드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는 “관세정책이 무역적자나 제조업 고용을 크게 개선하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 가치 절하라는 다른 수단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며 “이 시기는 관세정책 시행 1년에서 1년 반 정도 뒤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런 위원장은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 “내가 제시한 보고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택 사항을 제시한 요리책에 불과하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어떤 재료를 사용할지 선택할 요리사”라고 강조했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요리를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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