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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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양식의 해체, 새로운 미적 질서

  • 최현숙/ 동덕여대 디자인대학 교수

    입력2005-08-25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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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양식의 해체, 새로운 미적 질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아시아 문화와 밀리터리를 ‘평화’롭게 퓨전한 크리스찬 디오르 컬렉션. 한복의 선과 디테일을 살린 이영희의 드레스. 독특한 주름으로 일본의 색깔을 가장 잘 살려낸 디자이너로 꼽히는 이세이 미야케의 2005 파리 패션위크 컬렉션 (왼쪽부터).

    국제패션페어에 대학원생들의 작품을 참가시키느라 1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미국 뉴욕 맨해튼에 다녀왔다. 외국 나들이가 처음인 학생들도 있어 무엇보다 일주일간 미국 음식 먹을 일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내 걱정은 곧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지금은 인종의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고도 하지만,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도시인 만큼 곳곳에 있는 퓨전 음식점들이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준 것이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퓨전 음식 열풍은 여전히 거세다. 제대로 된 전통 한식이나 일식, 중국식을 먹으려면 사전조사를 하고 가야 할 정도다.

    퓨전(fusion·융합)이란 말 그대로 몇 개의 이질적인 요소가 하나로 녹아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퓨전은 포스트모던 건축과 미술에서 먼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젠 IT(정보기술)의 발달과 글로벌화에 힘입어 모든 문화 분야에서 대세가 된 것 같다.

    퓨전, 즉 융합을 위해서는 원래의 요소를 해체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패션에 나타난 해체의 경향은 역사적 양식의 해체, 민족적 양식의 해체, 성(性) 구분의 해체로 나뉜다. 1980년대 초 패션이 장기간의 기억을 말살하려는 역사적 양식의 해체 경향을 보이자 롤랑 바르트는 이를 두고 “과거를 부인하고 어제의 패션 상징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복수심에 불타는 현재’”라고 언급했는데, 전통을 고수하는 나라로 알려진 영국의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가 이러한 경향의 선두에 섰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유럽 복식의 역사 양식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빌려와 원래의 의미에서 이탈시키고 정상적 지각체계를 뒤엎음으로써 새로움을 창조했다. 장폴 고티에, 알렉산더 맥퀸 등도 역사적 시대를 참조하면서 그것들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복시켜 아이러니하게 포스트모던한 구조 속으로 밀어넣는다.

    한국의 부유층 여성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는 플리츠(주름) 디자인의 발상에 대해 “일본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은 패션을 창조하려 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플리츠 디자인을 입으면서 일본의 민족적 양식을 느낄 수 있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도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서 한복이 아니라 한복의 선과 색, 소재, 디테일들을 사용해 서양복의 엠파이어 실루엣(empire silhouette·가슴 바로 밑에 절개선이 있는 하이 웨이스트)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발표했고, 국제적인 유명 인사들이 그의 의상을 즐겨 입는다. 프랑스의 존 갈리아노 역시 과거사를 참조하지만 극단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패러독스하게 재조합한다. 2003 S/S 컬렉션에서 그는 서양과 아프리카, 그리고 군복을 자수 및 꽃 장식과 결합시킴으로써 그것들이 가진 본래의 의미는 모두 상실되고 새로움의 충격을 자아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패션에서는 역사를 단지 이미지 저장고로 사용하면서 양식의 해체와 융합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애초의 충격적인 새로움은 전혀 다른 방식의 미적 질서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해체와 융합에는 늘 위험성이 존재한다. 역사성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비숙련가에 의해 시도될 때 매우 무질서하고 아름답지 않은 퓨전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패가 패션에 국한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패션은 충동과 도발처럼 보이지만, 성공한 디자이너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야말로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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