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의 장기(長技)다. 두 작곡가의 교향곡 5번은 필하모니 홀에서 초연된 바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필과는 태생부터 인연이 깊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와의 인연은 남다르다. 므라빈스키 시대에 5번, 7번을 비롯해 그의 많은 교향곡들이 이 악단(당시는 레닌그라드 필)에 의해 연주됐고, 쇼스타코비치 사후에 수여받은 ‘쇼스타코비치 기념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은 이미 연초의 ‘예술의 광장’ 행사에서부터 그를 기렸다. 지난 1년간 이 도시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교향곡과 협주곡들이 연주됐는데, 그동안 좀처럼 연주되지 않았던 작품들도 함께 선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 밖에 쇼스타코비치 관련 전시회가 열렸고 기념 책자도 발간됐다. 생일 당일 열린 특별 음악회에선 작곡가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가 지휘를 맡기도 했다.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악단의 역량을 끌어올렸던 므라빈스키 타계 후 위태로운 상황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악단의 음색을 지켜오고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입력으로 청중을 도취시키는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제국의 차르이자 영웅이라면, 테미르카노프는 온화한 미소로 청중을 사로잡는 우아한 박력의 신사다. 테미르카노프가 포디움에 서는 날이면 무대에 나가 꽃을 건네고는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할머니 군단(?)의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은 이번 공연 이후 대만과 일본을 순회 공연하고 12월에는 이탈리아에 간 뒤, 올해가 끝나갈 무렵 모스크바로 갈 예정이다.

후지타 에미가 부르는 원곡은 수채화 빛이다. 느리게 살아가는 기쁨이 담겨 있고 자극적이지 않다. 천천히 걸으며 길거리의 꽃을 매만지다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파이톤사이드 가득한 솔숲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취하는 휴식, 그것이 바로 후지타 에미의 노래가 제공하는 휴식이다.
주간동아 559호 (p7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