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빨치산의 딸’로 화제를 모았던 정씨가 14년 만에 첫 창작집을 펴냈다. ‘빨치산’ 출신의 부모와 함께한 여행을 그리고 있는 표제작 ‘행복’과 사회변혁의 열정을 잃어버린 뒤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주인공이 나오는 ‘미스터 존’, 96년 신춘문예 당선작 ‘고욤나무’, 견딜 수 없이 답답한 일상에 갇혀 있는 주부의 몸부림을 그린 ‘그리스 광장’ 등 모두 8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삭막하고 불행한 현실을 광각렌즈의 시선으로 훑는다.
‘행복’은 2003년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소설가 평론가 편집자들이 꼽은 ‘가장 좋은 소설’에 선정된 작품이다. 제목은 조금 반어적인 표현이다. 사립학교 교사인 나는, 한때 역사의 대의에 목숨을 바친 ‘빨치산’이었지만 그 때문에 평생을 가난하고 낮게 살아온 부모를 모시고 어머니의 어릴 적 고향으로 첫 여행을 떠난다. ‘감옥’ 같은 부모의 삶을 지켜보며 한 번도 행복할 겨를 없이 자라야 했던 나는 부모와 함께 떠나는 나들이가 서먹하고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여행의 끝에서 나는 역사와 그 품안에서 허덕였던 부모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 정씨의 개인 삶에는 한국사의 비극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행복’의 주인공처럼 ‘빨치산’ 부모 밑에서 자라난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간 뒤 ‘노동해방문학’ 활동으로 몇 년간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부모의 사실적인 삶을 재구성한 ‘빨치산의 딸’을 출간했지만 이적표현물로 분류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 빨갱이의 딸이던 제게 글쓰기는 저를 위로하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글쓰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부터 글쓰기에 길들여진 것 같습니다. 감히 세상을 구원하는 글쓰기를 꿈꿨던 적도 있고, 글쓰기를 통해 삶의 비밀을 엿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동안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사립학교 교사, 대학 강사로 활동해온 그는 요즘 “중·단편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