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멕시코 한인회 초대 회장을 지냈던 H씨가 멕시코를 방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구속 1년 6개월 동안 1000만 달러 손실
H씨의 석방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해 지금껏 억울한 심정조차 언론에 내색하지 못해왔다는 A씨는 “H씨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가족들뿐이었다”며 “자국민 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할 대사관이 모든 임무를 개인에게 떠넘겼다”고 말했다. 그는 죄명이 없어 재판도 받지 못하고 1년 6개월이 넘게 구속돼 있는 바람에 H씨가 1000만 달러가 넘는 손실을 입었다고 덧붙였다. 최근 김선일씨의 피살사건으로 ‘외교력 부재’를 지적받은 외교부는 또 한번 ‘무력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2002년 당시 멕시코 검찰청 산하 특별수사대는 조직범죄, 마약, 총기류 등과 관련한 특수범죄를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30여명의 한국인을 잡아들였다. ‘호랑이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에 동원된 500여명의 무장 경찰과 수사대는 체포영장도 없이 ‘현행범’이란 자의적 판단으로 한국인들을 체포했다. 다음날 연방검찰청장과 사회안전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43명의 한국인 마피아를 체포했고, 이들과 관련 있는 36명의 멕시코인도 연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 연행된 한인들은 관광객들을 포함해 모두 33명이었으며 19명은 무혐의로, 9명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투자환경 조사를 위해 멕시코를 찾은 미국 시민권자와 여행 온 관광객, 어린 자녀들을 둔 부부도 있었다. 하지만 멕시코 언론은 한국인들을 무기와 마약밀매에 개입한 범죄집단으로 매도했다.
수백명의 경찰을 동원한 표적수사로 특정국 교민을 집단 구속한 것은 외교 관례상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다 교민의 알몸 수색이 문제가 되자, 뒤늦게 주 멕시코 대사관에 사실 확인을 지시했다. 주 멕시코 대사관은 멕시코 사법당국에 심각한 인권침해라며 항의했으나, 뒤늦은 대응일 뿐이었다.
또 어린아이를 키우던 한국인 부부 5쌍이 동시에 멕시코 경찰관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이들의 자녀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관은 ‘부부 중 한 명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지 않았고, 이들은 모든 사법 절차를 마친 뒤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반면 한인들이 구속되던 날 운 나쁘게 붙잡힌 일본 상인은 국적 확인 직후 경찰관에게 5000페소(약 55만원)가량의 차비까지 받으며 정중하게 풀려났다. 한인에 대한 표적수사가 뻔했지만 우리 대사관은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억울했던 사람들은 멕시코 남부구치소에 구속된 5명이었다. 1999년 멕시코 현지에 의류공장을 설립하고, 3곳의 매장을 개설해 4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던 H씨의 경우 현재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당시 검찰이 급습한 공장은 폐업 상태고, 압수당한 원단은 전혀 회수하지 못했다. 게다가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또 스타호스에 원단을 수출하던 한국 업체 3~4곳 역시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멕시코에만 전문적으로 원단을 수출해온 ㈜콜리무역은 2003년 이후 매출을 전혀 올리지 못했다. 재기불능의 경제적 손실은 결국 외교부의 무능한 대처에서 비롯했다는 게 H씨 가족의 주장이다.
외교부 측 “공정한 법 집행 요구했다”
한인사태 이후 마련된 멕시코 교민들의 모임
그는 검찰 급습 당시 매장에 있던 상품이 현지 생산품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재판에서 2004년 5월 승소했고, 압수한 제품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H씨가 연행될 당시 가족들은 그가 다른 한인들과 달리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했기 때문에 곧 석방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바뀐 담당판사가 ‘세무회계와 관련한 지식이 없다’며 전문감정사에게 세무자료 분석을 맡기고, 공장에서 사용하던 수입원단의 성분검사까지 요청하면서 판결은 늦춰졌다. H씨한테서 잡아낼 꼬투리가 없자 멕시코 재판부는 그의 주위를 먼지 날 때까지 턴 셈이다.
이 과정에서 H씨 가족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한국을 수차례 드나들었다.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하루빨리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였다. H씨 가족은 스페인어로 된 두꺼운 문서를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고, 주 멕시코 대사관의 공증을 받았다. H씨가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아 물건을 생산했다는 증거를 확인하면서도, 대사관은 멕시코 사법부에 항의하지 못했다. H씨 가족은 “대사관 직원들한테서 ‘우리는 대사관 단순 민원업무만 처리해주는 사람이지, 재판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황의승 중남미국장은 “당시 대사는 멕시코 사법부와 검찰 당사자를 만나 공정한 법 집행을 요구했고, 구치소에도 수차례 방문했다. 또 멕시코 사법부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인들의 진정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재외공관이 멕시코 국내법의 집행과 사법 절차에 관여할 수 없어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대사관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주 멕시코 대사관은 그저 외교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처지였고, 멕시코 정부에 어떠한 압력을 넣거나 정치력을 발휘할 힘조차 없었다.
또 구속된 한인을 돕는 대사관의 태도가 지나치게 중립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당시 대사는 한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물론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죄가 있으니 잡힌 게 아니겠냐”며 불법을 저지르지 말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죄 없이 붙잡힌 H씨 가족에게 대사의 이런 말은 상처로 자리잡았을 뿐이다.
멕시코 현지의 한인 신문에 보도된 한인사태 기사.
또 한인 사태가 터진 이후 한인들과 한인 밀집지역의 구청장, 주 멕시코 대사관 관계자들이 만났지만, 이 모임을 주선한 사람은 한국인 상인이었다. 주 멕시코 대사관은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직 풀려나지 못한 1명의 한국인은 여전히 감옥에 갇힌 채 석방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한인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은 결국 무능한 한국 정부와 대사관이었다”는 억류자 가족의 주장에 지금이라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