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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성호 이익과 ‘성호사설’

세상을 고민한 책, 실학의 고전이 되다

정치·경제·사회 모순 예리하게 분석 … 당시로선 최신 지식인 서양학도 소개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세상을 고민한 책, 실학의 고전이 되다

세상을 고민한 책, 실학의 고전이 되다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있는 성호기념관(왼쪽)과 성호 이익의 영정.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란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필경 교과서를 통해 배운 대로 ‘실학’이란 명사와 ‘성호사설(星湖僿說)’이란 책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호사설’의 내용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도대체 이름만 유명한 ‘성호사설’은 어떤 책인가?

‘성호사설’은 유서류(類書類)의 저작이다. 유서가 어떤 책인지는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다룰 때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다시 기억을 떠올리면 유서는 사전이다. 다만 가나다 혹은 ABC순이 아니라, 같은 부류의 사항끼리 모아서 분류한 사전이다. ‘성호사설’은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 등 다섯 부문으로 나뉘는데, 모두 3007개 항목이다.

총 3007개 항목 사전식으로 구성

이익은 왜 이 방대한 사전을 썼던가. 그 내력을 탐색해보자. 이익의 집안, 곧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조선시대에 알아주는 남인가의 명문이다. 그의 집안이 불운의 길로 떨어진 것은 아버지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이 1680년 자당(自黨)의 허목(許穆)과 윤휴(尹)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주 목사로 좌천되면서부터였다. 연이어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되는 정변, 곧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이하진은 파직되고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숨진다.



아들이 없었던 숙종이 숙원 장씨에게서 아들(뒷날의 경종)을 보자, 장씨를 희빈으로 삼은 뒤 아들을 원자로 봉하려 했다.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 민비의 아버지는 서인의 핵심인물인 민유중(閔維重)이다. 장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면 서인 세력이 위험에 빠진다.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서인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친 숙종은 서인을 내쫓고 다시 남인을 조정에 불러들인다. 이것이 1689년의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 때 이하진의 관작(官爵)이 복구된다. 하지만 숙종은 5년 뒤인 1694년에 민비를 복위시키고 서인을 정계로 다시 불러들인다. 남인은 또다시 축출됐고, 이익의 집안 역시 희망이 사라졌다.

세상을 고민한 책, 실학의 고전이 되다

이익의 ‘성호사설’.

중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운 이익은 1695년 과거에 응시하지만, 녹명(錄名)에 문제가 있어서 회시를 치르지 못한다. 1706년 이잠은 성균관 진사로 상소하여 동궁, 곧 뒤의 경종을 보호할 것과 노론을 조정에 다시 불러들인 이면의 주역인 김춘택(金春澤) 등을 죽일 것을 청했다. 노론 정권하에서 이잠의 발언은 죽음을 자청하는 것이어서, 그는 소원대로 장하(杖下)의 귀신이 됐다.

이제 집안이 결딴이 났다. 아버지는 당쟁에 휩쓸려 유배지에서 죽고 자신의 형은 장살됐다. 관로(官路)에 미련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벼슬에 뜻을 잃은 성실한 선비가 할 일이란 독서밖에 없다. 읽고 궁리하면서 울분이 삭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행히 집에는 풍부한 장서가 있었다. 그의 집안이 워낙 세가(世家)였고, 또 이하진이 1678년 진위겸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청(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양의 신서(新書)를 구입해 왔던 것이다. 그의 독서 이력에 보이는 서양 서적은 아마도 이하진이 구매한 책일 것이다.

방대한 가장(家藏) 서적을 읽은 결과물이 바로 ‘성호사설’이다. 이익은 자신의 저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호사설’이란 성호옹(星湖翁)의 희필이다. 성호옹이 이 책을 쓴 것은 어떤 의도에서였는가. 아무 의도가 없다. 의도, 곧 뜻이 없는데 어찌 이런 저작이 나오게 되었는가? 옹이 그냥 한가할 적에 책을 읽던 여가에 어떤 것은 전기(傳記)에서, 어떤 것은 자집(子集)에서, 어떤 것은 시가(詩家)에서, 어떤 것은 전문(傳聞)에서, 어떤 것은 회해(諧)에서 얻기도 하였는데, 웃고 기뻐할 만하여 남겨두어야 할 것들을 손 가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큰 더미를 이루었다.

‘사설(僿說)’의 ‘사(僿)’란 글자가 원래 ‘자질구레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얻은 낙숫거리라는 말이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똥거름이나 썩힌 풀은 지극히 천한 물건이지만, 밭에 비료로 쓰면 곡식을 기를 수 있어 부엌의 맛있는 찬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 책도 잘 읽는 사람에게 어찌 백에 하나 거둘 것이 없겠는가?”

같은 유서지만 ‘성호사설’은 ‘지봉유설’과 사뭇 달랐다. 이 책에는 ‘사회’가 들어 있었다. 체계가 없는 듯 보이는 글쓰기 속에 그는 자기 시대의 심각한 문제, 곧 정치와 사회, 경제의 모순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이 진지한 사유의 결과를 우리는 실학이라 부른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성호사설’에는 당시로서 최신의 지식인 서양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판토하(Pantoja)의 ‘칠극(七克)’, 삼비아시(Sambiasi)의 ‘영언여작(靈言勺)’, 아담 샬(Adam Schall)의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을 소개하고 비평했다. 여기에 더하여 서양의 지리·천문·과학 등을 다루었으니, ‘성호사설’이야말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의 극한치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벼슬에 뜻 잃고 학문에만 정진

‘성호사설’은 당시로서는 파천황적인 저작이었다. 생각해보라. 이 책이 쓰일 무렵 조선의 학계에서 학문이란 오로지 성리학뿐이었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중국에서 전해진 최신 서적을 읽고 당대 사회를 고민하면서 3000여 항목에 이르는 책을 써내는 일이 보통 일인가. 이 파천황적인 책의 내용을 여기서 몇 마디 말로 평가한다는 것은 참람스러운 짓이다. 차라리 이 책을 둘러싼 선인(先人)들의 논란과 평가를 검토해보자. ‘성호사설’의 3분의 1 축약본인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엮은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황덕일(黃德壹, 1748~1800)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세상을 고민한 책, 실학의 고전이 되다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는 이익의 묘와 사당.

‘논어’는 성인(聖人)의 언행을 잡다하게 기록했지만, 지극히 정밀하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러쿵저러쿵 흠을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아무개가 헐뜯는 내용이 ‘성호사설’에는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설에 집착해 그 사람의 일생을 단정하고 심하게 모욕하는 것은 망령된 짓거리입니다.

‘성호사설’이 체계가 없는 것을 헐뜯고, 나아가 성호까지 비난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비난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실은 ‘성호사설’의 비판적, 진보적 내용에 대한 비난이었을 것이다. 안정복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선생이 높이 받드신 분은 공자·맹자·정자·주자였고, 배척한 것은 이단과 잡학이었습니다. 경전의 뜻으로 말하자면, 선유(先儒)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많이 찾아내었고, 이학(異學)에 대해서는 그 숨은 진상을 캐내어 빠져나갈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무개는 선생이 서학(西學)을 했다고 배척하였다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내가 그 점에 대해 ‘천학고(天學考)’에서 이미 밝혀놓았는데, 그대는 본 적이 없는지요? … 대저 서학은 물리(物理)에 밝아 천문의 계산이나 수학이나 음률, 기계 제작 등은 중국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자 역시 서방에서 온 승려를 존중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자도 서학을 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인지요? … 또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그 아무개가 유반계(柳磻溪, 柳馨遠)를 배척하였다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배척한 것인지요?

우리 당(黨)의 선배에 반계와 성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전적으로 편당(偏黨)에서 나온 것으로, 반드시 옥과 같은 두 분에게서 험을 찾아내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좋은 마음이겠습니까?

이익이 서학, 곧 천주학을 했다는 의심, 혹은 서양학에 빠졌다는 비난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물론 이 비판의 속내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을 싸잡아 비판한 데서 볼 수 있듯, 이른바 진보적 개혁적인 학문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대감이 파당(派黨)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호사설’은 인쇄되지 않았지만 전사(轉寫)되면서 읽혔고, 격한 찬반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뭐라 해도 당대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익의 영향력, 곧 ‘성호사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익 학문의 최종적 계승자이자 완성자인 정약용(丁若鏞)은 귀양지 강진에서 아들 정학연(丁學淵)에게 책 읽기의 과정을 일러준다.

자질구레한 시율(詩律)은 비록 이름이 난다 해도 쓸 데가 없다. 모름지기 올해 겨울부터 내년 봄까지는 ‘서경’과 ‘좌전’을 읽을 것이다. 두 글은 문장이 억세고 난삽하여 뜻이 깊지만, 주해가 있으니 차분하게 연구하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여가에는 ‘고려사’, ‘반계수록’, ‘서애집’, ‘징비록’, ‘성호사설’, ‘문헌통고’ 등의 책을 읽어 요점을 초록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 창작보다는 학문에 전념할 것, 그리고 학문하는 기초 과정의 하나로 ‘성호사설’ 등의 서적을 보고 학문의 재료를 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호사설’은 거의 고전급의 저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무슨 일이든 철저함을 추구하는 다산에게 ‘성호사설’의 서술 방식은 다소 불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 “‘성호사설’은 후세에 전할 만한 정문(正文)이 못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고인의 글과 자신의 견해를 뒤섞어 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 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체계와 서술이 엄밀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성호사설’도 유사한 예로 꼽았던 것이다. 다산과 같은 엄정하고 꼼꼼한 사람은 ‘성호사설’의 치밀하지 못한 구성,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손쉽게 펼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홍대용·박지원 등 많은 실학자들에 영향

다산에게서 보았듯이 이른바 실학자라면 누구라도 ‘성호사설’의 영향력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 의하면 비록 학문적인 계보는 다르지만, 홍대용(洪大容)이 이익과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지원(朴趾源)과 박제가(朴齊家) 역시 ‘성호사설’을 읽었다고 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박제가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이른바 ‘허생전(許生傳)’의 말미에서 ‘성호사설’을 거론하고 있다.

‘허생전’에는 중봉(重峯)의 ‘봉사(封事)’, 유씨(柳氏)의 ‘수록(隨錄)’, 이씨의 ‘사설(僿說)’ 등이 말하지 못했던 바가 실려 있다. 문장이 더욱 소탕(疎宕)하고 비분하니 압록강 동쪽에서 손꼽을 만한 문자다.

‘성호사설’은 조헌(趙憲, 1544~1592)의 ‘동환봉사(東還封事)’와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계승하고 ‘열하일기’로 연결되는 책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실학의 계보이기도 하다.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주간동아 558호 (p84~86)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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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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