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6

..

디지털 예술 작품의 두 갈래 길

아날로그 이미지 완벽 재현 시도…한편으론 디지털 장점 이용 새 추상화 모색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6-07-31 10: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데카르트의 글을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몇몇 철학자들이 상상한, 원자나 나누어질 수 없는 물체의 부분들이란 있을 수 없다. (중략) 왜냐하면 그 부분들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그 부분들은 필연적으로 연장(延長)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사유 안에서 그것들 중의 어느 것이나 둘 또는 그 이상의 부분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20)

    디지털 예술 작품의 두 갈래 길

    케림 라쉬드의 디지털 그래픽 작품.

    연장과 선묘

    이제 인터넷 백과사전을 인용해보자. “물질을 세분해가면 분자→원자→원자핵→…이라는 계열을 지나 소립자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소립자는 현재 가장 기본적인 입자라고 생각된다.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은 전자이며, 1897년 J. J. 톰슨에 의해서다. 그리고 1908년 E. 러더퍼드에 의해 양성자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1932년 중성자와 양전자, 1937년 중간자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약 300종류의 소립자가 알려져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왜 원자론을 부정했을까? 아마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육체는 그 본성상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정신은 완전히 분해될 수 없다.” 즉 육체는 분해될 수 있기에 유한하고, 정신(=영혼)은 분해될 수 없기에 육체의 죽음 뒤에도 불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정신이고 정신은 나눌 수 없으므로, 데카르트의 인간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in-dividual), 즉 개인이 된다.

    데카르트에게 사물이란 연장 실체, 즉 넓이나 부피가 있어 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사물과 공간의 경계, 즉 윤곽선이리라. 그림을 그릴 때 화가들은 선묘를 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한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이 연장에 있다면, 색은 사물의 우연적 속성이 된다.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선으로 그리는 형(形)이다. 르네상스의 화가 알베르티가 “소묘만 잘돼도 이미 훌륭한 작품”이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지각의 혁명

    여기서 잠깐 데모크리토스로 돌아가보자. 이 그리스 철학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가상’이라고 주장했다. 산도, 강도,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그럼 진정한 실체는 무엇인가?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세상에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원자의 배열’이라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감각과 만나 비로소 식물이나 동물, 인간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물을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지각이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가 사물로 알고 있는 것의 형태는 원래 그 사물이 갖고 있는 속성이 아니다. 사실은 서로 공간적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입자들을 우리의 지각이 연결시켜 폐곡선 모양의 사물의 형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사물과 지각을 바라보는 관념에서 일어난 이 변화를 미술사에서 가장 먼저 보여준 이들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에서 사물의 윤곽은 화폭 위가 아니라 보는 이의 눈 속에서 완성된다.

    디지털 예술 작품의 두 갈래 길

    1.클로드 모네, ‘밀 짚단, 늦여름 아침의 효과’, 1890~91.<br>2.조르주 쇠라, ‘모델의 프로필’, 1887.

    예를 들어 모네가 그린 밀 짚단을 보라(그림 1). 가까이서 보면 거친 터치로 발라진 색점들의 집합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칸딘스키는 그게 밀 짚단임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밀 짚단의 윤곽이 나타날 것이다. 이때 밀 짚단의 윤곽선은 화폭 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거칠게 바른 색점들의 무더기가 우리의 지각 속에서 연결되어 마치 선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선묘에서 점묘로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본격적인 점묘에 이르게 된다. 가령 쇠라의 그림을 생각해보라. 화면 전체를 점으로 채우고 있다(그림 2). 원래 점묘는 빛을 그린다는 인상주의자들이 광학적 필요에서 고안해낸 방법이다. 즉 빛은 섞으면 섞을수록 밝아지는 반면, 물감은 섞으면 섞을수록 어두워진다. 이를 막기 위해 인상주의자들은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는 대신 혼합해야 할 색깔들을 화폭 위에 병치하려고 했다.

    쇠라의 작품에 나타난 형(形)은 윤곽선의 종합이 아니라 미립자들의 집합에 가깝다. 이것이야말로 실재란 원자들의 배열에 불과하다는 데모크리토스 이론에 가까운 모습이 아닌가. 점묘파의 작품에 나타난 새로운 감각이 미립자 물리학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분명히 ‘연장 실체’로 이루어진 데카르트의 근대적 세계상보다는 미립자로 이루어진 현대적 세계상에 가깝다.

    점묘파가 보여준 새로운 지각 방식의 의미는 몇십 년 후, 전자매체 시대에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방 안에서 보는 TV의 영상은 사실 선이 아니라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에 있는 TV 화면에 눈을 바짝 대고 보라. 화면 전체가 조그만 사각형 모양의 화소(畵素)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점묘파는, 아마도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전자매체 시대의 지각 방식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 예술 작품의 두 갈래 길

    로이 리히텐슈타인, '밀 짚단', 1968.

    로이 리히텐슈타인

    마셜 매클루언은 TV 영상의 모자이크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북두칠성의 일곱 개 별을 연결해 국자 모양을 만드는 것은 바로 보는 이의 과제가 된다. 반면 국자의 그림이 완성된 채로 주어지면 국자를 국자로 인지하는 데 보는 이가 기여할 일은 없어진다. 그리하여 매클루언은 해상도가 높은 영화(hot media)와 달리 화소의 모자이크로 된 TV 영상(cool media)은 해상도는 떨어지지만 대신 시청자의 참여도는 높다고 말한다.

    점으로 이뤄진 이미지를 인지하는 것은 특히 대중매체 시대에 일상적인 경험이 되었다. 요즘은 사진의 해상도가 매우 높아졌지만, 과거 신문의 사진에 돋보기를 대면 온통 점들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19세기 말에 등장했던 점묘는 팝아트의 물결을 타고 1960년대에 부활한다. 그것은 물론 현대 대중의 지각 체험을 지배하는 인쇄된 이미지와 관계가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라(그림 3). 여기서 그는 모네의 밀 짚단을 확대된 인쇄매체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40년이 흘러 최근에 점묘는 이미지 표현의 주요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디지털 혁명 때문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더불어 화소(pixel)라는 말은 더 이상 몇몇 전문가들만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용어가 되었다. 화소의 배열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종종 보는 ‘도트 아트’ 혹은 ‘픽셀 아트’는 디지털 시대의 점묘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점묘

    디지털 예술 작품의 두 갈래 길

    4. 대니얼 반 윙클.<br>5. 르네 모렐.

    ‘TV가 고해상도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가?’ 매클루언은 이 물음에 단호하게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TV가 아닐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디지털은 어떤가? 디지털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점묘의 거침이 아니라 외려 매끄러움을 본다. 실은 이 매끄러움이 바로 메모리 용량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디지털의 결함이다. 초기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곤충, 로봇, 장난감이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폴리곤(polygon) 상태에서 매핑이 되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를 보라(그림 4). 제법 정교하지만, 누가 봐도 실제 인물이 아니라 그래픽으로 그린 이미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동안 메모리와 프로세서의 발전은 이미 디지털 이미지를 인간의 지각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해상으로 만들었다. 사진 속의 여인을 보라(그림 5). 피사체가 없는 그래픽의 이미지이나, 실물을 찍은 사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디지털이 아날로그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빌렘 플루서는 그게 가능하다며, 그때가 되면 가상이 현실만큼 딱딱해지고, 현실이 가상만큼 유령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스티븐 홀츠먼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는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매클루언과 비슷한 어조로 디지털이 아날로그와 똑같아지면 “그럼 그것은 더 이상 디지털이 아닐 것”이라고 단언한다.

    두 개의 길

    여기서 디지털 이미지가 걸어가게 될 두 가지 길이 나온다. 하나는 디지털이 아날로그와의 차이를 좁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완벽한 자연주의에 도달하는 방향이다. 이미 영화에 사용되는 컴퓨터 그래픽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하이퍼 리얼리티에 도달했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를 인정하고, 디지털의 결성태를 외려 미학적 장점으로 취해 디지털 고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맨 첫 번째 케림 라쉬드의 작품을 보라. 이른바 ‘디지팝’, 디지털 팝아트의 이미지다. 여기서는 아날로그 이미지로 착각되려는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런 질감과 분위기의 연출은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디지털로만 가능하다. 20세기 초 사진에 재현의 임무를 넘겨준 회화가 사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 추상회화를 낳았듯, 디지팝은 자기 매체의 고유성을 주장하려는 디지털 시대의 추상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