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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파워&포인트 논술④

남성 누드 vs 여성 누드, 주체 vs 객체

이미지로 논술 읽기 ④

  • 이주헌 미술평론가

남성 누드 vs 여성 누드, 주체 vs 객체

남성 누드 vs 여성 누드, 주체 vs 객체

벨베데레의 아폴로, 기원전 330~320년경의 청동 조각을 로마 시대(130~140년경)에 모각, 대리석, 높이 223.5cm, 바티칸 벨베데레 궁전

누드 미술이라면 대부분 여성 누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남성 누드 이미지는 아마 가물에 콩나기 정도로나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을 누드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누드 미술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남성이었다. 그러니까 서양의 누드 미술은 여성 누드가 아니라 남성 누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옳다.

고대 그리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아르카익기(기원전 7~6세기)와 고전기(기원전 5~4세기 중반)의 그리스에서는 남성을 표현할 때는 누드로, 여성을 표현할 때는 코스튬(옷을 입은 모습)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남자를 옷을 입은 상태로 표현하거나 여자를 옷을 벗은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낯설고 부적절한 것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는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

그렇다면 왜 그리스 사람들은 이처럼 남성 누드를 고집했을까? 그리스에서 남성 누드가 인체 표현의 중심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특유의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과 남성 중심주의가 맞물려 생겨난 독특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인간은 남성이었다. 그리스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시민 자격이 성인 남성에게 국한돼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현실이 시사하듯 여성은 ‘남성이 되다가 만 사람’, 곧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인간으로 취급됐다. 여성이 미술에서 누드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은 인간인 까닭에 그들의 벗은 몸을 드러내 그 불완전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누드의 남성 중심주의를 높은 미학적 완성도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으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를 꼽을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조각을 로마 시대에 모각한 이 작품은, 아폴로가 적(아마도 뱀처럼 생긴 괴물인 퓌톤)에게 화살을 쏜 뒤 쓰러진 과녁을 보며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수영선수처럼 매끈하게 잘 다져진 몸매에 고양된 의식과 자부심이 담긴 얼굴은 아폴로의 육체를 해같이 빛나게 한다. 이 누드 어디에서도 부끄러움과 주저,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아폴로는 세계의 중심에서 지금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이 작품에 대해 “자연과 예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성취”라고 칭송한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만약 이 조각이 누드가 아니라 코스튬이었다면 이 정도로 완전하고 고귀한 존재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벌거벗은 남성상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현실에서도 그들이 심심찮게 벌거벗었음을 시사한다. 운동을 하거나 목욕을 할 때 그들은 공중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벗었고, 향연과 같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곧잘 알몸이 되었다. 그리스 남성들이 운동을 할 때 누드였다는 사실은 김나지움(gymnasium·체력단련장)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gymnos’가 ‘벌거벗은’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의 출입이 차단된 남성만의 배타적인 공간 김나지움에서 그리스 남성들은 나체로 체력을 연마하며 그들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뽐내고 감상했다.

남성 누드 vs 여성 누드, 주체 vs 객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 캔버스에 유채, 130×22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그리스인들이 나체로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 가운데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이 있다. 원반던지기는 매우 힘든 운동이지만, 미론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운동의 격렬함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멋들어진 균형 속에서 정신과 육체가 완벽하게 하나로 합일돼 있는 모습에 관심을 두었다.

격렬한 동작의 순간이 수정같이 투명한 영원성으로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원반을 던지는 이도,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어느덧 깊은 명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바로 그 표현을 통해 이 조각은 그리스 미술의 누드 선호가 영육의 총체로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 균형의 절정에서 찾으려는 치열하고도 진지한 노력의 성과물이었음을 가르쳐준다. 고매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이렇듯 자부심과 자긍심, 자기 확신에 가득 찬 그리스의 남성 누드는 한마디로 ‘주체를 향한 열망’을 보여주는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를 향한 열망이란 자기애, 곧 나르시시즘을 의미한다. 그리스의 남성 누드 조각은 대부분 나 보라는 듯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전통은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근대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남성 누드 vs 여성 누드, 주체 vs 객체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의 로마 시대 모각, 기원전 450년경(원작), 대리석(원작은 청동), 높이 125cm, 로마 국립 테르메 박물관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여성 누드가 남성 누드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어진다. 자연히 서양 누드 미술의 중심은 여성 누드로 옮아갔다. 이렇게 여성 누드가 누드 미술의 중심이 됐다고는 해도 여성 누드는 남성 누드처럼 주체를 표현하는 미술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주체를 향한 열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열망’, 곧 대상애를 보여주는 미술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남성 누드와 달리 여성 누드는 유독 에로티시즘을 강하게 드러내 보인다. 보는 이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여성을 그 욕망의 대상으로 한정해 표현했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한편의 성에 국한돼 있긴 하지만, 인간을 이렇게 철저히 대상화, 타자화된 존재로 묘사한다는 것은 그 인간으로부터 존엄성을 빼앗는 일이다. 사실 인간의 사물화, 도구화 양상은 서양 문명의 근대화 과정에서 매우 두드러진 특징으로, 서양의 누드 미술은 ‘남성=지배자=주체’와 ‘여성=피지배자=객체’의 관념을 절대적인 이미지로 뚜렷이 부각시켰다.

에로티시즘 드러낸 여성 누드 욕망의 빛

19세기 프랑스 화가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을 보자. 카바넬의 비너스는 매우 개방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눈은 고혹적이며, 시선은 은근하다. 누웠다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몸을 뒤틀어 매우 불편한 포즈인데, 굳이 그 불편을 감내한 것은 그렇게 해야 자신의 몸이 좀더 관능적으로 보이리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의 화신이 된 비너스에게서는 남성 누드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고결한 덕과 기품이 보이지 않는다. 비너스는 결코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는 주체가 아니다. 그가 발하는 빛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관능이 발하는 유혹의 빛이고, 그를 향한 남성들의 열망이 그의 몸에 부딪혀 반사하는 욕망의 빛이다. 물론 그 빛이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모든 자유의지를 주체, 곧 남성에게 내놓았다. 그렇게 스스로가 존재의 근원임을 확고하게 부정하고 있다. 남성 누드를 주제로 삼든 여성 누드를 주제로 삼든 서양의 누드 미술은 이처럼 그 시작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페미니즘 미술이 부상하기 이전까지) 남성 중심의 시각과 세계관을 유지하고 뒷받침해왔다. 철저히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미술이었던 것이다.

박정하 교수(성균관대)가 제안하는 ‘생각거리’

① 몸짓도 하나의 사회적 코드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승리하고 성공한 남성은 그렇지 못한 남성과는 달리 타인 앞에서 자신 있는 몸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된다. 타인 앞에서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는 남성은 승리하고 성공한 남성이다. 몸짓도 사회적 지배관계나 서열에 따라 코드화되는 것이다.

② 그런데 어떤 주장에 따르면,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 일반에게 ‘여성다움’이라는 이름 아래 은근히 강요되는 몸짓이, 남성 중에서 승리하고 성공한 남성이 아닌 패배하고 실패한 남성에게 허용되는 몸짓과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에게 요구되는 몸가짐 중 그러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고, 그것이 실제로 가부장적 코드로 읽힐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주간동아 531호 (p102~103)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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