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통일부와 보훈처 관계자, 사학자와 고고학자 등을 비롯한 남측 조사단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 등 고문단과 함께 뤼순을 방문한 것은 6월7일. 북측 역시 당국자를 중심으로 사학자와 지리학자 등이 포함된 7명의 조사단을 파견해 중국 현지에서 남측 조사단과 합류했다.
이에 앞서 정부는 2월과 3월 안 의사 처형 및 매장에 관한 일본 정부의 미공개 자료 4714점을 확보, 요약본을 북측에 전달하는 등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했다. 남북은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4월 판문점을 통한 문서교환 방식으로 공동조사단의 구성과 조사방법 등을 협의해 조사단을 구성했다는 후문이다. 당초 조사단은 3월26일 현지조사를 하려 했으나 남과 북 및 중국 측과의 협상이 여의치 않아 6월로 시기를 늦춘 바 있다.
이마이 여사가 표시한 곳 찾아내
조사단은 현장조사에서 안 의사의 유골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4군데를 선정,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첫 번째 지역은 안 의사 사형 당시 뤼순감옥 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사망) 여사가 사진에 화살표로 표시한 지역. 조사단은 이곳에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다.
이마이 여사가 이 사진을 한국 측에 전달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안 의사 유해 찾기에 나선 최 원장 등에게 “1911년 안 의사 묘소 앞에서 찍었다”며 두 장의 사진을 보여준 것. 이마이 여사는 열 살 때 기억을 떠올려 안 의사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에 화살표를 그려넣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 원장은 7차례에 걸쳐 현장 부근을 답사, 중국 해군기지 군수기지창 내의 야산 부근인 ‘북위 38도 49분 3초, 동경 121도 15분 43초’에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주간동아’ 469호 참조).
그러나 이 좌표는 1980년 기준이 변경되는 바람에 현장답사 결과 부정확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신 조사단은 현장 방문을 통해 이마이 여사가 사진에 표시한 화살표 지역을 찾는 데 성공했다.
이마이 여사가 사진에 표시한 화살표 지역은 뤼순감옥 안에 위치한다. 군사지역 내의 통제구역으로 그동안 외부에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다. 최 원장은 6월23일 전화통화에서 “그동안 국내 언론들은 이곳에 아파트나 빌라가 들어선다거나 숲이 우거졌다는 등의 보도를 했지만, 이는 중국 정부가 현장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추측 보도다”라고 말했다.
뤼순감옥 구조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왼쪽부터)
그럼에도 조사단은 안 의사 유골 발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이곳을 꼽는다. 조사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1910년 안 의사가 사형당할 때에는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2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형당했다”며 “중국 측이 말하는 지역은 20년대에 사형당한 사람들의 묘 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유일한 근거 자료는 이마이 여사의 사진”이라며 “더 확실한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 사진 자료를 근거로 발굴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이번 조사활동을 통해 이 지역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해 자료를 확보했다. 이마이 여사가 제공한 사진 및 항공사진 등과 함께 더욱 정밀한 검토를 하기 위한 준비작업인 셈이다. 조사단은 또 현장의 흙과 나무 등을 채취해 한국지질자원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했다.
사진분석 전문가들은 특히 이마이 여사가 제공한 사진의 촬영 방향 및 각도 등과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대조해 조사 지역을 특정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단이 현장조사에 나선 두 번째 지역은 이마이 여사가 지적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 중국인들에 의해 ‘안중근 의사 지묘란 나무 비석을 봤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86년 김일성 주석의 요청에 따라 안 의사의 조카인 안후생과 북측 조사단이 10여 일간 조사를 한 지역이기도 하다.
현장조사에 나선 한 관계자는 “이곳은 300여 기의 묘지가 있는 공동묘지”로 “이미 산이나 동산으로 변해 삽질을 하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말했다.
조사단은 이번 조사활동을 통해 확보한 각종 자료를 분석, 체계적인 발굴작업을 펼칠 예정이다. 예정대로라면 자료 분석에는 2~3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정부는 자료분석 작업이 끝나면 2차 조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우기를 피하려면 8월은 넘겨야 할 것”이라면서도 “남북한과 중국의 의견이 조율돼야 하는 문제인 만큼 2차 조사 시기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또 다른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사진자료에 나오는 산이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어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기 어렵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11월경 2차 조사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땅을 파는 시기는 땅이 얼지 않은 내년 3월 또는 4월로 순연될 수밖에 없다.
조사단의 2차 조사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 및 중국 측과의 정치적 관계 등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는 조사단의 조사활동을 허락했지만 그동안 곳곳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철길 하나를 건너면 군사지역으로 출입을 금지하는 구역인데 발굴작업은 이곳에서 진행해야 한다”며 “중국의 군사작전 지역을 놓고 한국 언론이 일방적인 기사를 양산한 것이 중국 정부의 불만”이라고 말했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발굴작업을 추진할 경우 현장의 토지를 임대하는 등 중국 정부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만큼 정치적, 외교적으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북한과의 관계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안 의사 유해 발굴작업은 순수 민간사업이지만 최근 남북 간의 미묘한 관계 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
정치적인 문제를 뛰어넘더라도 기술적인 문제는 별개로 남는다. 땅을 팔 수 있는 여건을 만들더라도 ‘과연 안 의사 유골이 존재할 것인가’라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안 의사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산화토 성분이 많은 땅으로 알려졌다. 이런 땅은 유골을 빨리 산화시키는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1910년 3월 사형을 앞둔 안 의사는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내 유해는 하얼빈(哈爾濱) 공원 옆에 묻어뒀다가 국권(國權)이 회복되면 조국으로 반장(返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광복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안 의사의 유언을 지킬 수 있을까. 남과 북으로 구성된 조사단의 활동에 8000만 민족의 눈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