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8일 태국에서 동거녀 수지 김(뒤)을 포함한 북한공작원들에게 납북될 뻔하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윤태식 씨.
국가정보원(전 안기부)이 1987년 1월 ‘수지김 사건’의 발단이 된 ‘윤태식 납북미수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의도적으로 북한과 연계시키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야당인 신민당 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 안기부는 싱가포르에서 윤태식 씨의 기자회견을 강행하려다가 이를 막으려는 싱가포르 정부 측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주간동아’는 최근 단독 입수한 1987년 1월 사건 당시 안기부의 ‘비공개 해외전문’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새롭게 확인했다. 해외전문은 사건이 발생한 지 19년 7개월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사건 발생 19년 7개월 만에 처음 공개
전문은 모두 10건. 1987년 1월5일부터 9일까지 4박5일 동안 안기부 본부와 싱가포르-태국-홍콩 주재 한국대사관 내 안기부 파견관 및 직원(IO)들이 긴박하게 주고받은 것이다. 이 중 1건을 제외한 9건의 전문 결재란에는 ‘계장-과장-부장’ 또는 ‘계장-부장’ ‘과장-부장’ 등 당시 안기부 내부의 결재라인에 따라 서명이 되어 있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 씨가 윤 씨의 납북미수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도 2001년 12월 윤 씨가 저지른 ‘수지 김(한국명 김옥분) 살해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같은 결론을 내렸다. 윤 씨의 납북미수사건 조작과 수지 김 살인사건 은폐에 장 씨가 주도적으로 개입했다는 것.
이에 대해 장 씨는 그 직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문제의 해외전문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처음 봤다. 순간 치욕과 모멸감에 말문이 막혔다”면서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전문을 살펴보면 장 씨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부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일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당시 해외전문을 중심으로 윤 씨의 북한 납치미수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해봤다. 전문은 주요 부분만 발췌해 실었다.
싱가포르에서 한국의 안기부 본부로 첫 번째 전문이 날아든 것은 1987년 1월5일 밤 9시30분. 그 즉시 안기부에 비상이 걸렸다.
#1. 일시 : 87. 1. 5 21:30
수신 : 부장
발신 : 파견관(싱가포르)
1. 금일 17시경 당지 미 대사관으로부터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도피, 미 대사관에 피신한 아국인 관련 첩보 제공에 따라 동명의 신병을 인수, 아래와 같이 경위를 청취하였음.
2. 인적사항
가. 성명 : 윤태식
나. 주민등록번호 : 580817-10 ○○○○○
다. 여권번호 : BS0013○○○
3. 상기명은 86. 9. 2 유학생으로 홍콩 입국 후 86. 10. 16 현지에서 김옥분과 결혼 동거해 오던 중 지난 1. 2 저녁 부인이 행불된 이후 조총련계로 추정되는 자들의 협박에 따라 부인을 만나기 위해 12.4 저녁 싱가포르를 방문하였으나 부인은 만나지 못하고 북괴 공관으로 인도되어 하기와 같은 지령을 받았다 함.
안기부가 싱가포르 - 태국 - 홍콩 주재 안기부 직원들과 주고받은 해외전문 사본.
나. 상기 지시대로 이행 후 부인과 재회함은 물론 홍콩에서의 사업자금을 지원해줄 것이나 불응 시에는 국내 가족을 살해할 것임.
다. 12. 6 싱가포르를 출발, 유고 경유 스위스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할 것.
4. 상기 지령을 받은 윤은 금일 오후 당지 북괴요원의 감시를 피해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함.
5. 조치의견
가. 상기명에 대해서는 우선 최단시간 내 서울로 안전 송환한 후 배경 및 경위 수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바 파견관 호송 하에 명일 싱가포르 항공편 귀국을 건의함.
나. 동명 현재 대사관 내 보호 중인 바 당지 출발 시까지 파견관이 계속 감시 보호하겠음.
이 전문에서 싱가포르의 파견관은 ‘최단시간 내 서울 송환’을 건의한다. 그러나 안기부장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 전문을 통해 싱가포르와 홍콩의 안기부 직원에게 별도의 특명을 내린다. 현지 기자회견을 통한 폭로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 그리고 윤 씨의 기자회견 내용에 당초 윤 씨의 진술내용에는 없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이 슬며시 끼어든다(#3 전문). 이를 위해 싱가포르로 급파된 제1부국장은 장승옥 해외담당 부국장.
#2. 일시 : 87. 1. 6 10:00
수신 : 주싱가포르 I/O
발신 : 부장
1. 부장님 특명으로 제1부국장이 금일(1.6) SQ-053편 싱가포르 도착 예정이니 금일 중 만찬 또는 늦은 시간에라도 OOO장 및 OOO장과의 접촉이 가능토록 주선 바람.
2. 제반사항은 1부국장이 현지 도착 후 직접 부장님 특명을 하달할 예정이니 필요한 준비를 하면서 1부국장 명에 의해서만 행동할 것.
3. 본건 외무부와도 협조 완료하였음.
윤태식 씨는 2001년 10월 살인과 사기 혐의 등으로 구속돼 징역 15년 6월의 실형을 확정판결 받았다.
수신 : 주홍콩 I/O
발신 : 부장
2. 본부는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두 차례 윤의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북괴의 아국인 납치기도 공작을 폭로할 계획이며 회견 일시, 장소 및 지침은 추후 하달할 예정임.
4. 사건개요
바. 윤은 북괴 대사관 내에서 대사대리 이창룡으로부터 하기와 같은 지시를 받았음.
O : “김대중 근황”을 묻고, 신상옥·최은희가 남조선에서 살해됐다고 언동.
#4. 일시 : 87. 1. 6 21:30
수신 : 주싱가포르 I/O(장 부국장)
발신 : 부장
다. 참고사항 : 김대중, 문익환, 유성환 관련 북괴 측 발언 내용은 윤태식을 통해서만 발표토록 하고, 현지 공관이나 외무부는 이에 대해 논평하지 않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를 담은 전문은 다섯 번째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확 바뀐다. 윤 씨의 위장자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기자회견의 전면 보류가 건의된 것. 본지가 확보한 전문에는 그러나 핵심 내용의 상당 부분이 공란(O)으로 처리돼 있어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안기부 싱가포르 파견관이 급파된 장 부국장과 함께 만난 누군가로부터 얻은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제공자는 과연 누구일까. 추정컨대 당초 윤 씨의 신병을 넘겨준 쪽이 미 대사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대사관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 대사관은 물론 북한 대사관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상황과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싱가포르 정부 측 관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5. 일시 : 87. 1. 7 17:00
수신 : 부장
발신 : 파견관(싱가포르)
1. 금일 OOOOO 및 OOO OOO과 오찬 후 OOO 측 요청으로 OOO회의실에서 아래 사항을 협의하였음.
가. 윤의 진술내용 중 싱가포르에서의 활동 부분은 … 금명간 밝혀질 것임.
나. 윤이 진술한 대로 북괴 여인의 종용에 의해 북괴 공관에 전화한 것이 아니고 …. 따라서 윤의 자진망명 기도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북괴의 납치기도라는 부분이 허위일 가능성이 나타남.
3. … 우선 기 수립된 방침 시행의 전면 보류를 긴급 건의함.
#6 일시 : 87. 1. 7 21:22
수신 : 홍콩 I/O
발신 : 부장
1. 일단 내외신 기자회견 준비를 보류하고, 기자(특파원)들과 은밀히 협조, OO 관련 취재활동을 하지 않도록 조치 바람.
이 같은 분위기는 3시간 반 만에 다시 돌변한다. 안기부장이 싱가포르 내에서 기자회견 강행을 지시한 것. 그리고 누군가를 설득하라는 부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하지만 기자회견은 무산되고 말았다. 윤 씨는 결국 태국으로 옮겨가서야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다. 이때 윤 씨의 기자회견 내용 중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도록 하라는 별도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다.
한편 같은 날인 8일 국내 언론에서는 싱가포르발(發)이 아니라 홍콩발로 윤 씨의 납북미수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윤 씨의 기자회견 내용이 홍콩 쪽에서 기자들에게 흘러 들어간 것. 다분히 안기부의 의도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7. 일시 : 87. 1. 8 00:50
수신 : 주싱가포르 I/O(장 부국장)
발신 : 부장
1. 부장님께 보고드린 바, 부장님의 지시를 아래와 같이 하달하니 최선을 다해 싱가포르 내에서의 기자회견을 적극 추진하면서 요점만 중간보고를 수시로 할 것.
(1) OOO 설득 논리
o 향후에도 싱가포르를 경유한 북괴공작에 쐐기를 박는 의미에서 이번 사건을 공개함으로써 OOO-OOO에게 모두 유익한 점. 싱가포르 국익에 손해날 것이 없는 점.
(2) 윤태식 신문 시 유의사항
o 윤태식 본인에게는 북괴 공관에의 전화 여부에 관계없이 신변안전을 보장할 터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최초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토록 할 것.
4. 결론 : 윤이 우리 손에 들어와 있는 것이므로 OOO를 자신을 가지고 설득, 밀고 나가기 바람.
#8. 일시 : 87. 1. 8 16:50
수신 : 태국 I/O
발신 : 부장
1. 싱가포르에서 북괴에 납치되려다 탈출한 홍콩 교민 윤태식을 대동코 장OO 부국장이 귀지에 도착함.
2. 호텔 또는 주태국 아국대사관 등 적정 장소에서 주방콕 연합통신 및 취재를 희망하는 외신기자와의 접촉 및 기자회견을 주선 바람.
3. 동 기자회견 시 활용할 국문 보도자료 및 영문 보도자료를 별첨 하달하니 활용 바람.
4. 특히 연합통신과의 회견 시는 윤태식이 1. 5 주싱가포르 북괴대사관으로부터 받은 지령 내용 및 북괴 요원의 김대중 관련 언급 내용이 송고내용에 포함되도록 조정 바람.
안기부의 공작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뒀다. 대부분의 언론이 윤 씨가 북한대사관 측으로부터 ‘김대중 씨의 근황을 물은 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남조선에서 살해됐다고 강조할 것’을 지시받았다고 보도한 것. 이는 안기부쪽에서 일방적으로 기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데다, ‘연합통신’의 기사 내용을 참고할 수밖에 없던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윤 씨의 싱가포르 기자회견이 무산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2001년 12월] 검찰의 수사발표 등을 통해 그동안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이장춘 대사 등 외무부 직원들의 반대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안기부장이 이 사건과 관련해 주태국과 주싱가포르의 I/O에게 보낸 마지막 두 건의 전문을 보면 윤 씨의 싱가포르 기자회견 무산은 외무부 직원들의 반대보다는 싱가포르 정부 측의 반발이 결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 정부에 대한 안기부장의 불만 수위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에 따라 자칫 외교적 마찰로까지 비화될 뻔한 분위기도 엿보인다.
#9. 일시 : 87. 1. 8 18:50
수신 : 주태국 I/O
발신 : 부장
방콕 거점장(OOO 친전) 아래 전문을 장 부국장에게 전달하고 결과 보고 바람.
1. 친애하는 장 부국장. 부장님께서 잘 처리하였다고 치하하셨음. 국내 보도내용에 대해 싱가포르 측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내정간섭적이라고 잘라 말하셨음. 싱가포르 측의 OOO는 최선을 다하였고, 이는 부장님 친서를 휴대한 장 부국장이 명백한 논리로서 끈질기게 교섭한 결과, 기자회견은 비록 실시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입장과 인식을 분명히 전달한 것으로 평가함. 국내 언론보도에 대해 말한다면, 홍콩 주재 아국 특파원들이 시간이 지연됨에 따라 홍콩에서 자체 취재활동을 하여 국내 송고하게 되었고, 본부도 그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이 얻는 게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음.
#10. 일시 : 87. 1. 9 10:10
수신 : 싱가포르 I/O
발신 : 부장(OOO 친전)
2. 싱가포르 외무성의 엄격한 중립외교정책 기분을 이탈하지 않으려는 한계 내에서 아 측과 업무를 협의하면서도 아국 고유의 주권적 수사권에 대한 이의제기 등 마치 OOO의 OOO OOOO이 금번 사건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는 논리를 들어 시간 천연으로 동 문제를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싱가포르 측 저의를 본부는 간파하였음.
3. 홍콩 주재 아국 특파원들의 불 같은 성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국 정부가 조작했다는 의구심이 나타날 우려가 있어 더 이상 천연할 수 없었던 점을 싱 측에 부드럽지만 결연한 어조로 전달 바람.
5. 당부와의 관계는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싱 측의 협조를 기대하면서 계속 시간 천연 경우 주권국가인 한국의 동건 처리에서 실리와 명분이 함께 제기될 수 있었던 점을 감안,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부장님이 결정한 것을 통고함.
당시 안기부는 윤 씨를 설득해 8일 태국에서 기자회견을 한 다음 9일 저녁 한국으로 송환해 남산사무소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안기부는 곧바로 윤 씨가 아내 수지 김을 살해했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납북미수사건을 꾸며낸 것이라는 진술을 받아냈지만, 이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검찰 수사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2001년까지 14년간을 말이다. 이처럼 첫 단추를 잘못 채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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