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호텔 나시오날에서 열린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공연.
가슴을 뛰게 만드는 체 게바라, 헤밍웨이의 흔적, 녹아들 것 같은 시가…. 카리브해 상공에서 쿠바를 내려다보며 앞으로 쿠바의 그 많은 유혹들 중 과연 어디에 빠지게 될지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공항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음악의 달콤함 속에서 허우적댈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쿠바는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외벽이 거의 벗겨진 썰렁한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만나는 흥겨운 음악, 새벽 2시인데도 살사 바를 가득 메운 사람들, 파도가 철썩대는 낭만적인 방파제 말레콘을 거니는 젊은이들, 거리 곳곳에서 풍겨나는 시가 향을 타고 흐르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불후의 명곡 ‘찬찬’….
쿠바 도착 첫날, 쿠바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올드 아바나(Old Havana)’로 향했다.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거리의 여기저기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들! 올드 아바나의 오비스포(Obispo) 거리는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귀를 호사스럽게 만들 수 있는 곳이다.
밤 11시. 이 거리에 있는 살사로 밤을 달군다는 호텔 플로리다의 문을 두드렸다. 과연 이런 곳에 살사 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로비를 지나 종업원이 알려준 곳의 문을 열었더니 로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프리카 리듬이 강하게 묻어 나오는 쿠바 음악의 흥겨움 속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신나게 살사를 추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음악이 들려오는 쿠바의 시내 전경. 말이 이끄는 마차가 다닌다.
쿠바 음악에는 흑인음악의 리드미컬한 흥겨움과 백인음악의 매끈함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들이 쿠바에 많이 살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쿠바 땅에는 스페인 식민시대 동안 스페인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이후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쿠바 땅을 밟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음악은 하나로 합쳐져 어떤 음악장르보다 화려한 쿠바 음악으로 탄생하게 됐다.
다음 날이 되어도 쿠바 음악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한적한 길을 걷다가 길거리 공연이 펼쳐지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면 환청이었고, 환청인가 싶어 뒤돌아보지 않고 걷다 보면 어디에선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공연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
쿠바 사람들에게 음악은 음악 이상의 의미인 듯했다. 이들은 새벽 댓바람부터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신바람 나는 음악을 틀어놓거나 아니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아바나에 머물렀던 일주일 내내 앞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때문에 늦잠 자는 것을 포기해야 했을 정도다.
아바나에 가면 주말은 꼭 비워놓아야 한다. 토요일 저녁마다 쿠바 최고의 호텔인 호텔 나시오날에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공연이 열리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만났던 이브라함 페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멤버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 호텔에서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음악을 여행자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내가 이 호텔을 찾은 토요일 저녁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멤버인 아마디토 발데스와 ‘쿠바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온 그룹 바르바리토 토레스의 열정적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화려한 공연 앞에 놓인 스테이크가 어떤 맛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육중한 베이스의 음은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웠으며, 신들린 기타 연주는 숨을 쉬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특히 칠순이 넘은 아마디토 발데스의 열정 넘치는 무대가 잊히지 않는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무대이기도 했던 아바나의 말레콘 방파제.
때마침 아바나에서는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쿠바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아프로 음악, 그리고 라틴재즈로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던 피아니스트 추초 발데스의 연주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오래된 멜라 극장에서 풍기는 시큼한 곰팡이 냄새까지 날려버릴 정도로 발데스의 피아노 독주는 신들린 듯했다. 이어지는 아프리칸 타악기 봉고와 트럼펫의 합주. 음악을 들으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가를 물고 있는 넉넉한 풍채의 쿠바 여인.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바나의 자유로움의 상징, 말레콘의 무명 연주가들이 들려준 ‘찬찬’이었다. 총총하게 박혀 있는 밤하늘의 별 아래, 철썩 거리는 파도 소리와 어디선가 쿠바산 시가 코이 바의 진한 향이 흐르던 그날 밤. 마침 옆에 있던 멋들어진 쿠바 여인의 옷자락도 흔들리고 있었다. 무한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그 분위기에서 낡은 기타와 봉고가 연주하는 어설픈 ‘찬찬’은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쿠바인들의 영혼을 내 가슴 깊이 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