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무계, 엽기발랄, 좌충우돌! 인터넷 만화로 시작해 공전의 히트를 친 ‘B급 달궁’(만화작가의 이름이다)의 ‘다세포 소녀’가 영화화됐다. 놀랍게도 감독은 ‘정사’ ‘스캔들’ 같은 선 곱고 섬세한 멜로를 장기로 하는 이재용 감독. ‘저 감독 뭘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다른 영화를 들고 나와 자신의 이름을 이재용이 아닌 ‘이 감독’이라고 해달라고 넉살 좋은 부탁을 한 그는 정말 ‘재용’이라는 단아한 이름을 영화에서 모두 지워냈다.
영화는 선생과 학생이 나란히 성병에 감염돼 모두 조퇴하는 첫 장면에서 키치의 수위를 훌쩍 넘어버리더니, 이후엔 대한민국의 모든 것, 즉 근대성이 낳은 억압과 자본의 노예가 된 세태를 무차별로 풍자한다. 이성, 논리, 도덕, 모범성의 굴레를 훌훌 벗어나 발칙함과 황당함으로 무장한 ‘다세포 소녀’는 단세포 세상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매우 낯설 수 있지만 영화는 의상, 조명, 색채, 전달하는 정서 모두가 일종의 과잉으로 구성돼 있다. 현실성이 고의적으로 거세된 이러한 유형의 영화를 흔히 ‘캠피 무비’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영화 속의 교실은 완전 원색인 데다 인물들의 화장은 떡칠에 가깝고, 의상은 국적과 스타일이 불분명하다. 모든 것이 튀는 캠피 무비는 과거 B급 영화나 퀴어 영화에서 쓰던 전형적인 영화 전략으로, 외국에서는 ‘프리실라’나 ‘헤드윅’ 같은 작품, 우리나라에서는 최진성 감독의 ‘동백꽃’ 등이 그 계보에 속한다.
맛있는 불량식품 같은 캠피 무비에서 영화적 과잉 그 자체는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럼으로써 경직된 규범과 신화, 개인적 위선으로 가득 찬 현실 사회를 교란하는 구실을 한다. 따라서 다세포 소녀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이다.
쾌락의 명문인 무쓸모교에선 모든 것이 거꾸로 간다. 선생님이 성병으로 조퇴하자 반장 소녀가 조퇴하고, 반장 소녀가 조퇴하자 그 옆의 남학생이 조퇴하고, 그 옆의 남학생이 조퇴하자 그 앞의 여학생이 조퇴한다. 남학생은 조퇴하는 여학생 등 뒤로 “처녀라고 그랬잖아”라며 소리치고, 여학생은 “1대 1 관계가 처음이라는 거지”라고 대꾸한 뒤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벌해달라고 ‘엉덩이를 깐’ 선생은 채찍 도구를 든 마조히스트이고, 채찍을 휘두르는 여학생은 사디스트다. 주인공인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이 영화에는 이름이 세 글자인 캐릭터가 없다)가 원조교제 약속이 있다고 나가버리자, 선생님은 오히려 그녀를 ‘효녀’라고 말한다. 게다가 사이버상에서 야한 밀담을 나누던 남학생은 상대가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병 걸린 선생님, 사디스트 여학생 등 엽기 캐릭터
사태가 이러하니 대한민국의 문화적인 코드들 역시 죄다 기존의 맥락에서 미끄러져버린다. 캔디류의 순정만화적인 요소가 비틀어지고, ‘정’을 강조하는 박카스 CF가 패러디되며, 국수주의적인 교육 내용이 통렬한 화살을 맞는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스위스에서 전학 온 안소니(캔디의 바로 그 캐릭터)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안소니는 정작 여장 남자인 두눈박이(그 혹은 그녀는 교실의 왕따인 외눈박이의 동생이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선생님이 태권도의 유일무이함에 대해서 설명하자, 학생들은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도발이자 교란이다. 여성/남성의 경계, 선생/학생의 경계, 선/악의 경계 등 모든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감독은 동분서주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걸맞은 이 튀는 영화를 연출한 이재용 감독의 전략은 명백해 보인다. 내용과 주제에 맞게 영화 ‘다세포 소녀’는 개연성 있는 줄거리나 맥락에 맞는 캐릭터의 안정성 대신 자유로운 장르적 뒤섞임과 가벼운 유머의 상황 반전을 택한다. 영화는 시도 때도 없이 노래가 등장하는 뮤지컬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공포영화 장르 안으로 잠입하는 동시에 건전 학원물의 공식이 반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뮤지컬이 세대와 계급을 대통합하는 행복을 파는 장르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의 순진무구한 무지함이나 정서적 단순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특히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한다든가, 인물 대부분이 정면으로 찍히는 등 모든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텍스트와 거리를 두게 만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다세포 소녀’에는 성 담론은 넘쳐나지만, 정작 성행위는 부재한다. 그로 인해 이 영화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 혹은 사회 비판적인 B급 영화로까지 확대된다.
숱한 성 담론에도 성행위 장면은 없어
한마디로 ‘다세포 소녀’는 추상적 사고 능력과 성숙함이라는 상징계의 그물망을 벗어나 거대한 퇴행과 구체적인 사고로 이루어진 블랙유머의 세계에 속한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의 어머니는 다단계 판매전략을 고수하는 피라미드사의 진짜 원적외선 ‘피라미드’를 판다. 원조교제에 나섰던 소녀는 소녀 복장을 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조폭 두목을 만난다. 무쓸모함이 오히려 쓸모함이 되고, 어른은 아이가 되며,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원작 만화의 재기발랄함은 있지만 인터넷 만화가 가지고 있는 대담성과 신맛은 좀 덜한 것 같고, 무엇보다도 모든 경계를 넘어 무한대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이 영화 역시 캠피 무비라는 어떤 공식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왕 저지르는 것, 더 많이 더 멀리 만화적 상상력을 차용하는 것은 어땠을까.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여다오.
다세포 영화가 노리는 다세포 관객들의 ‘19금’의 욕망은 아직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다. 장르적 핵분열을 거듭하는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의미 있는 스타트를 끊은 ‘다세포 소녀’. 우리 영화판에도 ‘다세포 소녀’ 같은 영화적 시도가 끊임없이 증식하기를 기대한다.
영화는 선생과 학생이 나란히 성병에 감염돼 모두 조퇴하는 첫 장면에서 키치의 수위를 훌쩍 넘어버리더니, 이후엔 대한민국의 모든 것, 즉 근대성이 낳은 억압과 자본의 노예가 된 세태를 무차별로 풍자한다. 이성, 논리, 도덕, 모범성의 굴레를 훌훌 벗어나 발칙함과 황당함으로 무장한 ‘다세포 소녀’는 단세포 세상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매우 낯설 수 있지만 영화는 의상, 조명, 색채, 전달하는 정서 모두가 일종의 과잉으로 구성돼 있다. 현실성이 고의적으로 거세된 이러한 유형의 영화를 흔히 ‘캠피 무비’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영화 속의 교실은 완전 원색인 데다 인물들의 화장은 떡칠에 가깝고, 의상은 국적과 스타일이 불분명하다. 모든 것이 튀는 캠피 무비는 과거 B급 영화나 퀴어 영화에서 쓰던 전형적인 영화 전략으로, 외국에서는 ‘프리실라’나 ‘헤드윅’ 같은 작품, 우리나라에서는 최진성 감독의 ‘동백꽃’ 등이 그 계보에 속한다.
맛있는 불량식품 같은 캠피 무비에서 영화적 과잉 그 자체는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럼으로써 경직된 규범과 신화, 개인적 위선으로 가득 찬 현실 사회를 교란하는 구실을 한다. 따라서 다세포 소녀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이다.
쾌락의 명문인 무쓸모교에선 모든 것이 거꾸로 간다. 선생님이 성병으로 조퇴하자 반장 소녀가 조퇴하고, 반장 소녀가 조퇴하자 그 옆의 남학생이 조퇴하고, 그 옆의 남학생이 조퇴하자 그 앞의 여학생이 조퇴한다. 남학생은 조퇴하는 여학생 등 뒤로 “처녀라고 그랬잖아”라며 소리치고, 여학생은 “1대 1 관계가 처음이라는 거지”라고 대꾸한 뒤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벌해달라고 ‘엉덩이를 깐’ 선생은 채찍 도구를 든 마조히스트이고, 채찍을 휘두르는 여학생은 사디스트다. 주인공인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이 영화에는 이름이 세 글자인 캐릭터가 없다)가 원조교제 약속이 있다고 나가버리자, 선생님은 오히려 그녀를 ‘효녀’라고 말한다. 게다가 사이버상에서 야한 밀담을 나누던 남학생은 상대가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병 걸린 선생님, 사디스트 여학생 등 엽기 캐릭터
사태가 이러하니 대한민국의 문화적인 코드들 역시 죄다 기존의 맥락에서 미끄러져버린다. 캔디류의 순정만화적인 요소가 비틀어지고, ‘정’을 강조하는 박카스 CF가 패러디되며, 국수주의적인 교육 내용이 통렬한 화살을 맞는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스위스에서 전학 온 안소니(캔디의 바로 그 캐릭터)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안소니는 정작 여장 남자인 두눈박이(그 혹은 그녀는 교실의 왕따인 외눈박이의 동생이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선생님이 태권도의 유일무이함에 대해서 설명하자, 학생들은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도발이자 교란이다. 여성/남성의 경계, 선생/학생의 경계, 선/악의 경계 등 모든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감독은 동분서주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걸맞은 이 튀는 영화를 연출한 이재용 감독의 전략은 명백해 보인다. 내용과 주제에 맞게 영화 ‘다세포 소녀’는 개연성 있는 줄거리나 맥락에 맞는 캐릭터의 안정성 대신 자유로운 장르적 뒤섞임과 가벼운 유머의 상황 반전을 택한다. 영화는 시도 때도 없이 노래가 등장하는 뮤지컬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공포영화 장르 안으로 잠입하는 동시에 건전 학원물의 공식이 반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뮤지컬이 세대와 계급을 대통합하는 행복을 파는 장르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의 순진무구한 무지함이나 정서적 단순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특히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한다든가, 인물 대부분이 정면으로 찍히는 등 모든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텍스트와 거리를 두게 만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다세포 소녀’에는 성 담론은 넘쳐나지만, 정작 성행위는 부재한다. 그로 인해 이 영화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 혹은 사회 비판적인 B급 영화로까지 확대된다.
숱한 성 담론에도 성행위 장면은 없어
한마디로 ‘다세포 소녀’는 추상적 사고 능력과 성숙함이라는 상징계의 그물망을 벗어나 거대한 퇴행과 구체적인 사고로 이루어진 블랙유머의 세계에 속한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의 어머니는 다단계 판매전략을 고수하는 피라미드사의 진짜 원적외선 ‘피라미드’를 판다. 원조교제에 나섰던 소녀는 소녀 복장을 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조폭 두목을 만난다. 무쓸모함이 오히려 쓸모함이 되고, 어른은 아이가 되며,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원작 만화의 재기발랄함은 있지만 인터넷 만화가 가지고 있는 대담성과 신맛은 좀 덜한 것 같고, 무엇보다도 모든 경계를 넘어 무한대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이 영화 역시 캠피 무비라는 어떤 공식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왕 저지르는 것, 더 많이 더 멀리 만화적 상상력을 차용하는 것은 어땠을까.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여다오.
다세포 영화가 노리는 다세포 관객들의 ‘19금’의 욕망은 아직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다. 장르적 핵분열을 거듭하는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의미 있는 스타트를 끊은 ‘다세포 소녀’. 우리 영화판에도 ‘다세포 소녀’ 같은 영화적 시도가 끊임없이 증식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