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高興)을 새기면 높은 곳(高)에서 흥(興)한다는 뜻 아닙니까. 우주기지를 품에 안을 운명이었나 봅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 김민현 우주센터건설기술그룹장(공학박사)은 외나로도는 우주기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면서 웃었다. 그는 현대엔지니어링에서 일할 때 남극 세종기지 건설을 맡았던 것을 계기로 1990년 KARI에 들어왔다.
“우주센터 건설 책임자가 된 소감요? 감개무량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땅에서 위성을 쏜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죠.”
발사장 등 150만평 규모 … 우주개발 전초기지 외나로도
우주센터장 민경주,우주센터건설기술그룹장 김민현, KARI 원장 백홍렬, 우주인사업단장 최기혁, 아리랑 위성5호 사업단장 최해진(왼쪽부터).
“삼겹살 안주에 소주를 들이켜면 외로움이 조금은 사라집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7. 내년은 한국 우주산업이 신기원(新紀元)을 이룩하는 해다. 한국은 2007년 10월께 (KARI의 목표) ‘우리 땅에서 우리가 만든 발사체로 우리 위성을 쏘아올린다’. 김 박사는 “인공위성이 외나로도의 발사대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가슴 벅찬 순간을 떠올리면서 외지 생활을 견뎌내고 있다”고 했다.
2003년 8월 첫 삽을 뜬 우주센터는 현재 80%가량 지어졌다. 150만 평 규모의 우주센터에는 △발사장과 위성발사대 △위성발사 통제시설 △레이더 및 원격자료수신시설 △광학추적 시설 △우주체험관 등이 들어선다. 우주센터를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12개국에 불과하다. 한국은 그동안 외국의 발사체 및 발사장을 이용해 위성을 발사했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우리 발사체로 우리 위성을 발사하는 것’의 의미는 매우 크다.
“우주센터는 우주개발의 전초기지입니다. 우주 선진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은 1950년대부터 우주센터를 운용했습니다. 우주센터 건립과 발사체 기술 확보는 우주시대에서 자립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백홍렬 KARI 원장·공학박사)
8월2일 오후 4시 대전 대덕밸리 KARI 위성종합관제실. 백 원장의 시선이 7월28일 러시아 플레세츠크 기지에서 발사된 아리랑2호의 위치를 가리키는 화면으로 향한다. 아리랑2호가 노르웨이 스발바르 지상국과 교신하기 직전이었다.
백 원장은 아리랑2호 발사 40일 전부터 지금까지 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아리랑2호가 첫 사진을 전송해올 때(8월 하순)까지는 수염을 계속 기를 거란다. 아리랑2호의 카메라 개발이 지연될 때는 3개월 넘게 수염을 기른 적도 있다고.
“리더의 의지를 연구원들에게 드러내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연구소 간부들과 연구원들에게 긴장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전 직원이 단합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염으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리랑2호가 궤도에 안착했는데 왜 수염을 깎지 않느냐”고 묻자 백 원장은 “나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걸 싫어한다”면서 “영상자료가 제대로 수신돼야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해진 아리랑위성5호사업단장(공학박사)은 “영상자료가 전송되면 원장실로 첫 사진과 함께 면도기를 보낼 것”이라며 웃었다.
백 원장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20년, KARI에서 10년을 일했다. 국방과학연구소 시절엔 국내 첫 유도탄인 ‘백곰’ ‘현무’ ‘천마’의 개발을 주도했으며, KARI에선 다목적 실용위성 1·2호 개발의 중추 구실을 했다. 군사용 미사일 기술은 위성발사체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다.
“발사체 기술이 미사일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느냐”고 묻자 백 원장은 “KARI는 순수과학 목적만을 가지고 연구하는 곳”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발사체 기술은 대륙간탄도탄(ICBM) 기술과 거의 유사하다. 로켓에 위성을 실으면 발사체가, 핵무기를 실으면 핵미사일이 되는 것이다.
아리랑2호 궤도 안착 … 8월 하순 첫 사진 전송
아리랑2호를 지구 상공 685km에 올려놓은 러시아의 발사체 로콧은 옛 소련의 ICBM SS19를 개조한 것이다. 1단, 2단 로켓은 SS19의 원래 것을 그대로 사용했고,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은 3단 로켓만 새로 개량했다. 아리랑2호가 발사된 플레세츠크 기지는 옛 소련 시절 ICBM을 시험하던 군부대가 자리했던 곳이다.
저궤도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나라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개발할 능력이 있고, 고고도 정지위성을 쏘아올리는 나라는 ICBM을 쏠 수 있다고 한다. 정지위성은 지구가 당기는 중력과 우주의 다른 천체가 당기는 중력이 거의 평형을 이루는 3만5786km까지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발사체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비전은 우리의 우주기술로 대한민국 국토를 보호하는 것이다.”
민경주 KARI 우주센터장(이학박사)은 우주센터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민 박사는 대전과 외나로도를 오가며 일하는데, 설계부터 시스템 조달까지 내년 초에 완공될 우주센터는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 박사는 외나로도에서 근무하기 위해 이삿짐을 꾸릴 날을 그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고분자물리학을 전공한 뒤 미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다가 1989년 ‘해외유치 과학자’로 한국에 돌아왔다.
“아내가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고 있는데 뭐 하러 한국에 들어가느냐’며 말리더군요. 하지만 조국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미사일 기술을 체득한 거의 유일한 한국인 과학자인 그는 1991년 KARI로 자리를 옮겨 우주로켓 KSR-Ⅰ과 KSR-Ⅱ를 개발했다. KSR-Ⅰ은 고체연료를 쓰는 1단 로켓으로 93년 6월 발사됐다. KSR-Ⅰ은 KARI가 만든 첫 번째 로켓. KSR-Ⅱ는 2단 고체로켓으로 98년 6월 발사돼 단(段) 분리 실험이 이뤄졌다. KARI는 2002년 11월 액체연료를 쓰는 KSR-Ⅲ를 시험발사하기도 했다.
2007년 하반기 외나로도에서 쏘아올릴 위성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한국이 개발 중인 KSLV-Ⅰ발사체에 실리게 된다. 한국의 위성 제작과 위성 운용기술은 후발주자 중 상위권.
7월28일 아리랑2호가 발사되고 있다.(좌) KARI 위성종합관제실(우).
“우주센터에 입주할 날이 무척이나 기다려집니다. 7년째 기러기 아빠 신세라 대전에서의 생활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우주센터 완공과 발사체 개발은 우주 주권 확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외국의 발사장과 발사체를 사용할 때 지불하는 외화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뛰어든 산업 중 가장 늦게 시작해 가장 빨리 세계 수준을 따라잡은 분야가 우주산업이다. 민 박사는 “외나로도에서의 위성 발사는 한국 우주산업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0kg 소형 저궤도 위성 KSLV-Ⅰ에 실려
내년 하반기 외나로도에서 발사될 위성은 100kg의 소형(아리랑2호는 800kg) 저궤도 위성이다. KSLV-Ⅰ은 2015년 1.5t 규모의 위성을 쏘아올릴 KSLV-Ⅱ를 위한 징검다리. KSLV-Ⅱ 개발에 성공하면 한국은 자력으로 실용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발사체 개발은 미국 등 우주선진국들이 기술 이전을 극히 꺼리는 분야다. 미국이 주도하는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 미사일 기술 통제체제)은 사거리 300km, 탄두 중량 500kg급 미사일의 수출과 기술 이전을 금지하고 있다. 다만 인공위성 발사체를 제작하는 경우엔 MTCR 회원국에 한해서 기술 이전을 허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사체 기술을 들여오는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高)유가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좋아지면서 우리가 계약을 맺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최기혁 KARI 우주인사업단장·이학박사)
한국은 MTCR에 가입한 2001년 이전엔 한·미 미사일양해각서 탓에 사거리 180km 이상의 미사일(발사체)은 개발할 수 없었다. 백 원장이 만든 백곰과 현무의 ‘공식적인’ 사거리가 180km인 까닭이다. 현무와 백곰은 그러나 탄두의 무게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300km까지 비행할 수 있다고 한다.
MTCR에 가입하면서 사정은 많이 좋아졌으나 KSLV-Ⅱ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우주를 통해 지구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강대국 간의 ‘별들의 전쟁’은 벌써부터 치열하다.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MD(미사일 방어 계획)도 우주지배 전략의 일환이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우주전쟁’의 최전선이다.
“중국은 앞으로 미국의 MD를 무력화하는 우주기술 개발을 적극 추진할 것이다. 선저우호의 잇따른 성공은 자국 상공의 적(미국) 정찰첩보위성을 요격할 수 있는 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의미한다.”(KARI의 한 관계자)
위성발사체 창정(長征)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은 위성 정찰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며 첩보위성도 갖고 있다. KARI는 아리랑2호를 가격이 저렴한 창정에 실어 쏘아 올리려다가 미국의 반대로 그만둔 일도 있다. 일본도 4t 규모의 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위성발사체를 개발함으로써 독자적으로 군사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릴 수 있는 역량을 확보했다.
동북아 우주전쟁은 흡사 구한말을 연상케 한다. 한국은 벌써부터 우주전쟁에 휘말리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열강이 모두 우주강국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미국으로부터는 MD에 참여하라는, 중국으로부터는 참여하지 말라는 유·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백 원장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라면서 “최소한의 우주접근 능력은 국가전략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땅에서 우리 발사체로 우리 위성을 발사한다’는 ‘외나로도의 꿈’은 어떤 모습으로 이뤄질까? 2008년
4월엔 한국인이 우주를 나는 ‘천년의 꿈’도 실현된다.
최기혁 우주인사업단장은 “한국은 비교 우위에 있는 IT 기술을 기반으로 미국 주도로 이뤄지는 달 기지 건설, 유인 화성탐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며 “외나로도에서 우리 기술로 만든 유인우주선을 발사하는 쾌거도 언젠가는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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