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공원.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친환경적인 돔형 방범카메라를 설치했다.
이에 삼전지구대는 2005년 가택침입 절도를 줄이기 위한 ‘실험’에 돌입했다. 집집마다 방범시설을 강화해 범죄 발생률을 낮추겠다는 것. 삼전지구대는 삼전동과 석촌동의 5810개 가옥을 선정해 2005년 4월 한 달 동안 정밀 방범진단을 실시했다. 그리고 진단 결과에 따라 안전주택, 불안전주택, 취약주택으로 분류해 표시한 ‘범죄환경 분석지도’를 작성했다. 이어 경찰관들은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특히 불안전주택과 취약주택 소유주들에게 방범시설을 새로 갖출 것을 권유했다.
4월 26%에 달하던 취약주택은 8월 12%로 크게 낮아졌으며, 5%에 불과하던 안전주택은 그 비율이 50.3%로 껑충 뛰었다. 그렇다면 범죄율은? 실험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가택침입 절도는 1년 전에 비해 24%, 침입 강도는 60% 감소했다. 길거리나 상점 등에서 발생한 절도사건도 14% 줄었다.
“범죄환경 분석지도를 작성해놓고 보니 불안전주택이나 취약주택으로 평가된 집들과 실제 범죄 피해를 당한 집들이 거의 일치했습니다. 도둑이 침입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꿔놓으면 범죄도 자연히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습니다. 다행히 실험 결과도 이 예상이 맞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수서경찰서 생활안전과장으로 재직하며 ‘삼전지구대 실험’을 주도한 전주현 경정(현 동대문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의 말이다.
삼전지구대의 ‘1차 범죄환경 분석지도’. 빨간색이 취약주택이다(맨 왼쪽). 4개월 후 취약주택은 크게 감소했다. 강·절도 발생 지역(스티커로 표시)은 주로 불안전·취약주택과 일치했다(가운데). 가시철조망을 두른 가스배관은 도둑의 침입을 어렵게 만든다.
삼전지구대가 시도한 셉테드 전략은 방범시설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가택침입 범죄가 보통 △어른 어깨 높이의 담장에 숨어 있다가 △담장을 밟고 올라선 뒤 가스배관을 타고 벽을 기어올라 △창문을 뜯어내고 침입하는 패턴으로 이뤄졌다. 절도범 한 명이 서너 가구를 한꺼번에 터는 일도 이따금 발생했다.
범죄 심리상 방범시설 잘 갖춰진 집은 일단 제외
이에 경찰은 주민들에게 △담장을 무릎 높이 정도로 낮춰 범죄자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없애고 △가스배관에 철가시를 두르거나 덮개를 씌워 타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며 △방범창을 달도록 권유했다. 창문이 열리는 순간 경보음이 크게 울리는 경보기도 추천했다. 전 경정은 “한번은 경보기 소리에 놀란 도둑이 땅바닥에 떨어진 다음 주민들을 피해 절뚝거리며 달아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범죄자들이 침입할 집을 결정할 때 방범시설을 이 갖춰진 집은 제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방범체계를 잘 갖춰놓으면 무방비 상태보다 침입에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 때문에 범인을 적발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즉, 범죄 비용을 높임으로써 범죄 실천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실제로 최근 강력 범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에는 방범에 취약한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및 빌라에 사는 이들이 많았다.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범 정모(37) 씨는 3월 봉천동의 허름한 주택에 침입해 잠을 자고 있던 세 자매를 공격했다. 4월 검거된 ‘마포 발발이’ 김모(31) 씨도 1년여에 걸쳐 마포와 서대문 일대에서 여성들이 혼자 사는 다세대주택에 침입해 연쇄 성폭행을 저질렀다. 마포경찰서 여운학 경감은 “좁은 골목길에 바로 붙어 있는 쪽문을 툭 치기만 해도 거주 공간이 바로 나오는 곳에 사는 피해 여성도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시흥시의 신천동도 지난 연말 간단한 실험을 통해 셉테드의 ‘효과’를 입증해 보였다. 신천동 역시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어 가택침입 절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이다. 그래서 시흥경찰서는 지난해 9월 신천동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한 19통 일대 49개 가옥에 현관잠금장치를 부착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현관문이 열리도록 함으로써 낯선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취지였다.
현관잠금장치는 절도 발생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좌).<br>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경기 시흥시 신천동 일대(우).
절도사건 검거율 50% 수준 ‘예방이 최선’
이처럼 경찰이 가택침입 절도를 막기 위한 셉테드 도입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가택침입 절도 범죄의 특성 때문이다. 먼저 가택침입 절도는 좀더 강력한 사건으로 쉽게 변질된다. 삼전지구대 실험 당시 지구대장을 지냈던 조승묵 송파경찰서 정보계장은 “빈집이라면 단순한 절도로 끝나겠지만 사람이 있는 경우 절도범은 한순간에 강도나 강간범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절도사건은 검거율이 무척 낮다. 귀가한 뒤에야 집이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다 범인들도 뚜렷한 증거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웬만해서는 집이 털렸다고 해서 범인의 머리카락을 찾아 유전자분석을 하는 등의 과학수사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는다. 또한 절도는 보통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범인 검거가 더욱 어렵다.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범죄분석지에 따르면 2004년 발생한 절도사건의 검거율은 52%였다. 전체 범죄 검거율인 90%와 비교할 때 낮아도 한참 낮은 수준이다. 때문에 경찰은 “가택침입 절도는 예방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서울 양천구 신월4동에는 전에 없던 쾌적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강서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왕복 2차선 도로 양옆으로 900m가량 이어진, 점토로 포장된 어울림길이 그것. 이 산책로에는 소나무 등 키 큰 가로수, 영산홍 등 키 작은 가로수, 그리고 금낭화 등으로 꾸며진 화단이 골고루 배치돼 있다. 중간중간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여졌고, 산뜻한 디자인의 밝은 나트륨 조명등도 10m 간격으로 설치돼 있다. 이 산책로는 양천구청이 목동과 신월동을 잇는 ‘걷고 싶은 거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사를 시작해 지난 연말 완성했다.
“예전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어요. 60~70년대 즈음에 개천을 복개한 도로였거든요. 큰 주차장이 있어서 화물트럭이나 이삿짐센터 트럭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고, 인도도 중간 중간이 끊겨 있었죠. 그렇다 보니 불량배들이 많이 모여들고 소매치기도 종종 발생하고…. 아주 무질서했죠. 하지만 올해부터는 그런 녀석들이 보이질 않아요.”
신월4동에서 21년째 살고 있는 강정열(58) 씨는 산책로가 들어선 이후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범죄율도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는데, 그의 말이 맞는 듯하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신월2지구대는 산책로 조성 이후 신월4동의 5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발생률이 53%가량 감소(140건에서 57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예전보다 거리가 밝아졌고, 밤늦게까지 산책하는 주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상호 감시’가 이루어져 범죄가 발생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비록 경찰과 구청이 합심해 의도한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환경 개선이 자연스럽게 범죄 감소로 이어진 셈이다.
범죄 잦던 곳에 산책로 만든 신월4동 강력범죄 54% 감소
영국 포츠머스대학에서 셉테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현호 교수(경찰대 경찰학과)는 신월4동의 이 같은 변화에 대해 “‘깨진 창문 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깨진 창문 이론’이란 스탠퍼드대학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의 실험에 의해 탄생한 셉테드 관련 이론이다. 짐바도는 뉴욕 브롱크스와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길거리에 보닛을 열어둔 차량 한 대씩을 방치했다. 브롱크스의 차량은 유리창을 한 장 부수었지만, 팔로알토의 차량은 온전한 상태였다. 브롱크스에서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차량 파괴와 부품 절취 사건 발생했다. 반면 팔로알토에 있던 차량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무사했다. 그러나 팔로알토의 차량 역시 유리창을 부수어 방치했더니 곧바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차량을 파손하기 시작했다.
즉, ‘깨진 창문 이론’이란 범죄나 무질서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방치해두면 범죄나 무질서가 더 늘어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박 교수는 “따라서 범죄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 여건을 줄이면 시민의식과 준법의식이 강화돼 범죄가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이 이론에 대입해볼 수 있는 비슷한 셉테드 효과가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서도 나타났다. 부산 전포2동 성전초등학교는 지난해 어른 키 높이의 학교 담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오픈형 펜스’를 둘렀다. 펜스 안쪽으로는 나무를 심고 화단을 꾸몄다. 그러자 학교 담장 근처에서 종종 벌어졌던 중·고등학생들끼리의 사건·사고가 크게 줄었다. 이 동네 주민 김성도(50) 씨는 “낡은 주택들이 있는 지역이다 보니 놀이터가 없다. 그러니 학생들이 어둑한 성전초교 담 밑으로 자연스럽게 모이곤 했다”고 전했다. 이 담 밑에는 버려진 담배꽁초와 술병 등도 가득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쓰레기를 가져다 버린 경우도 많았다고.
“담이 없어진 뒤 불량 학생들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거리도 깨끗해졌습니다. 더 이상 몰래 갖다버린 쓰레기가 쌓이지도 않고, 화단을 망가뜨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미관상 좋을 뿐만 아니라 안전해져서 특히 학부모들이 기뻐합니다.” 성전초교 장성표 교장은 ‘의외의 소득’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처럼 거리 환경을 정화함으로써 범죄율을 줄이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길거리에서 발생하는 범죄가 무시 못할 규모이기 때문이다. 2004년 길거리에서 발생한 범죄는 살인 202건, 강도 1904건, 강간 1788건이었다. 이는 전체 살인의 20%, 강도의 33%, 강간의 16%를 차지하는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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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선초등학교의 달라진 담 모습.
셉테드는 범죄율 감소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치안서비스 만족도도 높여주었다. 지난해 경찰청이 실시한 ‘주민 치안 만족도’에서 전국의 평균 주민 만족도는 55%였다. 그러나 삼전지구대의 주민 만족도는 85%로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경찰청에서 ‘조사가 잘못된 것 아니냐’며 삼전지구대를 찾아왔다가 범죄환경 분석지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이다. 삼전지구대 윤백경 경장은 “처음에는 주민들이 자기 집 일에 경찰관이 참견한다며 귀찮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경찰의 노력에 고마워할 뿐 아니라 수상쩍은 일이 있으면 적극 알려주는 등 주민들과의 관계가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셉테드는 모든 범죄를 근절시키는 ‘마법의 채찍’은 아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위험도를 높임으로써 특히 초범자의 경우 범죄 실천을 주저하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주택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절도의 경우 초범자 비율이 45%, 강도의 경우에는 32%에 달한다.
“셉테드는 한마디로 ‘도둑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정된 경찰 인력으로 순찰만 강화하는 범죄 예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범죄자의 행동을 예측해 효과적인 방어막을 치는 것, 즉 범죄자와의 두뇌싸움이 바로 셉테드입니다.”(전주현 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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