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1
이경묵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삼성이 위기에 빠진 원인으로 ‘삼무원’과 ‘의사결정 집권화’ 등 두 가지를 꼽았다. 검찰이 지난 10년간 이재용 회장을 ‘사법 족쇄’에 가둬온 사이 삼성전자의 조직문화까지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진단이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낸 ‘사즉생(死則生)’ 메시지에 대해서는 “다시 ‘삼성 일등주의’ ‘삼성 제일주의’를 추구하겠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인 ‘삼성 웨이’를 연구한 경영학자다. 2011년 세계적 경영 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삼성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The Paradox of Samsung’s Rise(삼성 부상의 역설)’ 제하 논문을 같은 대학 송재용 교수와 공동 게재한 바 있다.
“‘삼무원’과 의사결정 집권화가 문제”
이 회장은 3월 말까지 그룹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에서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1999년 다우지수를 구성했던 30개 기업 중 24개가 이미 사라졌다. 이대로 가면 우리도 잊힐 것”이라며 “경영진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사즉생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라고 위기 돌파를 강조한 것이다.
‘삼성 위기론’이 비등한 가운데 이 회장의 메시지가 나오자 이건희 선대회장에 이은 ‘제2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양(量) 위주에서 질(質) 위주 경영으로 변해야 한다”는 1993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같은 절박한 위기의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
이번 메시지는 현재 삼성이 직면한 위기와 주요 사업부에 대한 질책, 인사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이 회장은 글로벌 기술 경쟁의 엄중한 상황을 짚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야 할 삼성전자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이어서 이 회장은 삼성 주요 사업부를 하나씩 거론하며 ‘질책 메시지’를 냈다. “메모리사업부는 자만에 빠져 인공지능(AI) 시대에 대처하지 못했다” “파운드리사업부는 기술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 “디바이스경험(DX) 부문(TV·스마트폰·가전 등 사업부)은 제품 품질이 걸맞지 않다”는 게 뼈대다. 이 회장은 위기를 타개할 방안으로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고 지적하면서 “경영진보다 더 훌륭한 특급 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해 양성하고 모셔 와야 한다” “필요하면 인사도 수시로 해야 한다”며 인재 발굴 및 ‘신상필벌’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Flash 개발실 상무 출신인 개혁신당 양향자 전 의원은 “2016년 이후 삼성 임직원들이 ‘톱(top) 오너’ 이 회장의 메시지를 들은 적이 없다”며 “이 회장이 이번에 낸 질책성 메시지가 삼성 임직원들의 위기의식을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 전 의원은 “이 회장의 메시지가 현 삼성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향후 삼성의 구체적인 비전과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병철·이건희, 고비 때마다 직접 나서 비전 제시
반도체 출사표 낸 이병철 ‘도쿄 선언’, 신경영 선포한 이건희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호암자전’에서 직접 밝힌 ‘반도체 산업 출사표’를 둘러싼 고뇌다. 이 창업회장의 결단으로 삼성전자는 1983년 당시 최첨단 반도체였던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시장에 도전했다. 이른바 ‘도쿄 선언’이다. 당시 미국 재계에선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조롱까지 나왔지만, 도쿄 선언은 삼성이 글로벌 1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 창업회장의 진두지휘로 삼성은 D램을 핵심 승부처로 삼고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그 결과 도쿄 선언 6개월 만에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b(킬로비트) D램을 개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그룹 임원들에게 낸 ‘사즉생(死則生)’ ‘독한 삼성인(人)’ 메시지를 두고 삼성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나온 총수의 혁신 메시지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그간 삼성의 새로운 도전은 미래 비전이 담긴 총수의 ‘선언’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도쿄 선언에 이은 또 다른 분기점으로 평가받는 것이 이건희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이 선대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룹 임원들을 불러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 2.5류가 된다”고 질책했다. 오늘날까지 삼성 DNA로 각인된 ‘신경영’ 선포였다. 그 결과 삼성은 ‘한국의 여러 대기업 중 하나’에서 글로벌 핵심 기업으로 올라섰다.
이번에 이재용 회장의 메시지가 나온 시점도 삼성 역사에 비춰보면 의미가 크다. 키워드는 ‘6년’이라는 시간이다. 이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나온 시점이 이 창업회장 별세 후 그가 총수 자리에 오르고 6년이 지났을 때였다. 삼성호(號)의 방향타를 이어받고 6년 만에 이 선대회장이 자신만의 경영 비전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재용 회장은 2020년 부친인 이 선대회장이 별세한 후 그룹 경영권을 사실상 이어받았다. 이를 기점으로 하면 내년이 6년째가 되는 해다. 이번 메시지를 통해 내년부터 본격화할 ‘이재용 삼성’의 방향과 비전을 가늠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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