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 육군 장병들이 3월 12일(현지 시간)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M101 곡사포를 발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3월 러시아군의 대대적 공세에 이 일대 쿠르스크 전선에서 대패했다, 뉴시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만 해도 쿠르스크 전선의 전투 양상을 살펴보면 이상한 모습이 많았다. 우선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이 공격해 들어올 도로나 들판 상공에 정찰 드론을 미리 띄워놓고 모든 전투 장면을 촬영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이 지뢰·박격포·드론으로 구축한 사지(死地)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왔다가 단숨에 궤멸되는 상황이 매우 빈번했다.
석 달 만에 쿠르스크 전선에서 밀린 우크라이나군
이처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 거점에 공세를 폈다가 반격을 받아 전멸되는 전투 양상이 석 달 넘게 이어졌다. 지난해 말 러시아는 북한군을 총알받이로 쓰며 일부 전선에서 전진했지만 올해 1월 들어 벽에 부딪혔다. 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 말라야 로크냐 마을과 돌출부 서쪽 니콜스키 마을, 남쪽 프셀강 일대 하천과 저수지를 자연 방벽 삼아 방어선을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3월 공세는 달랐다. 러시아군 공격은 3월 7∼9일 절정에 달했다. 쿠르스크 모든 지역의 우크라이나군 방어선이 삽시간에 무너졌고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장비를 버린 채 도주했다. 전선 각지에 미국제 M1A1SA 전차, M2A2 ODS 보병전투장갑차, 스웨덴제 CV90 장갑차 같은 고급 장비가 버려졌다. 러시아군은 아이가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듯이 유기된 우크라이나군 장비를 노획했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우크라이나군은 민가에 숨어 있다가 사로잡혔다.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우크라이나군 병력마저 얼마 안 가 궤멸했다. 도대체 왜 우크라이나군은 이토록 쉽게 무너진 것일까.
쿠르스크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당한 대패는 2월 28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시작됐다.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설전이 전 세계에 실시간 중계됐다.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다. 당초 이날 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이른바 ‘광물협정’에 서명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막대한 광물 자원 개발권을 넘기는 대가로 미국이 군사 지원을 계속한다는 게 뼈대다.
하지만 두 정상의 격렬한 말싸움 끝에 협정 체결은 물론, 공동 기자회견마저 없던 일이 됐다. 회담 결렬 직후 미국 측 인사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게 어떠냐”고 설득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폭스뉴스에 출연해 그럴 뜻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 관계자들도 “미국의 지원이 끊겨도 몇 달은 더 전쟁을 할 수 있다” “이미 군수품의 40% 이상을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다”며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자극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 제공도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미국 KH-11 첩보 위성. 미국 항공우주국(NASA) 홈페이지
미국의 ‘지구적’ 정보 자산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부터 우크라이나에 지구 전체를 커버하는 위성 및 감청 시스템을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유럽에 감시정찰자산을 대거 배치해 우크라이나를 측면 지원했다. 미국의 다양한 정찰위성은 밤낮 가리지 않고 러시아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우크라이나군에 제공했다. 우크라이나 인근 공역까지 날아온 미국 RC-135 계열 정찰기들은 러시아군 무선통신을 감청해 작전 계획과 부대 이동 상황 등을 알아냈다. 나아가 미국의 조기경보위성과 조기경보기 등 첨단 자산이 러시아의 탄도미사일·장거리 자폭 드론 발사와 폭격기 이륙 사실을 일찌감치 탐지해 우크라이나군에 통보했다.
미국의 이러한 정보 지원은 우크라이나군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러시아군의 모든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컴퓨터게임에서 ‘맵핵(map hack)’ 같은 역할을 한다. 게임에선 플레이어의 시야를 일정 범위로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맵핵은 어느 한쪽이 그 제한을 풀고 상대방 움직임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꼼수 프로그램이다. 쿠르스크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은 미군의 정보 지원이라는 맵핵을 사용해 전투를 치른 셈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보 지원 중단으로 기존 이점을 잃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공세에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이 마주한 운명은 미국 동맹국들에 대단히 무서운 의미로 다가온다. 최근 안보·통상 문제로 미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선 미국산 무기 구매를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이 수출용 무기에 무력화 ‘킬 스위치(kill switch)’를 적용한 탓에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다” “앞으로 미국산 무기 의존도를 줄이고 기존 미국산 무기도 하루빨리 유럽산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유럽 안보·방산 자강론에 따라 3월 9일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이 모여 8000억 유로(약 1270조 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을 발표했다. 각 회원국의 국방비를 대폭 증액해 현 80%에 달하는 미국산 무기 의존도를 빠르게 줄이는 게 뼈대다.
그러나 이 정도 돈을 써도 유럽이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8000억 유로는 일견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처럼 보이지만 유럽 방산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다. 유럽 방산은 높은 인건비와 작은 생산 규모, 복잡한 ‘밥그릇’ 문제로 악명이 높다. 동종의 미국산 무기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면서도 비싼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미국 F-16V 전투기의 대당 가격이 1억 달러(약 1450억 달러) 안팎인 반면, 유럽 라팔이나 유로파이터는 대당 2억~3억 달러(약 2900억∼4350억 원)를 우습게 호가한다. 3월 초 인도가 26대를 사기로 한 라팔-M 전투기는 26대 가격이 76억 달러(약 11조 원)로 대당 4200억 원이 넘는다. 레오파르트 2A8 전차는 노르웨이·스웨덴의 최신 계약가격 기준으로 대당 600억~700억 원에 이른다. K2 전차 가격의 4배 수준이다. 영국이 건조 중인 26형 호위함은 ‘호위함’임에도 척당 가격이 13억 파운드(약 2조4500억 원)가 넘는다. 한국의 최신 이지스 구축함 정조대왕함의 1.7배에 달하는 값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2019년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휴전을 압박하고 있다. 뉴시스
유럽 8000억 유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더 심각한 문제는 유럽 각국이 8000억 유로를 들여 구매하기로 한 무기 중에는 현재 미국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일원으로서 제공하는 정보 자산을 대체할 만한 장비가 없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이 미국 수준의 정보 자산을 구입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감시정찰 방산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돈과 긴 시간을 들여야만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분야다. 미국은 정보 분야에서 ‘공식 발표 예산’으로만 매년 700억 달러(약 101조5600억 원) 이상을 쓰는 나라다. 미국의 정보 전력은 국가정보국장실(ODNI)이 총괄한다. ODNI는 매 회계연도 군과 정보기관의 정보 분야를 아우르는 국가정보프로그램(NIP) 예산안을 종합해 의회에 보고한다. 2025회계연도 기준 NIP 예산은 765억 달러(약 111조 원)에 달한다. 이는 군의 감시정찰 자산, 가령 조기경보기나 정찰기 같은 장비 구매 예산은 제외한 것이다. 미국은 반세기 넘도록 매년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그 덕에 지표면과 수중, 하늘과 우주, 사이버 공간을 아우르는 감시정찰 네트워크를 구축·유지·개선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령 미국의 첨단 정찰위성은 발사 비용을 제외한 순수 위성 가격만 기당 2억~5억 달러(약 2900억∼7250억 원)에 달한다. 수명도 짧은 편이라 매년 조 단위 돈을 들여 새 위성을 쏘아 올려야 한다. 게다가 이는 전자광학정찰위성 단일 기종에 대한 얘기다. 미국 정도 수준의 감시정찰 능력을 갖추려면 레이더·적외선·통신위성도 대량으로 쏘아 올린 뒤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위성은 미국 감시정찰 네트워크의 일부에 불과하다. 정보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능력을 갖추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일반인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이유다.
앞서 언급한 EU 27개국의 8000억 유로 군사비 지출은 일회성 예산이다. 미국에 의존하는 정보 능력을 대체할 장비·인프라 확보 예산은 반영조차 안 됐다. 우크라이나군에서 가장 우수한 서방제 무기로 중무장한 정예부대조차 미국의 정보 지원이 끊기자마자 붕괴됐다. 유럽이 많은 돈을 들여 첨단 무기를 확보한다고 해도 미국의 정보 능력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대체를 시도하더라도 유럽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공군 RC-135 정찰기. 미국 공군 제공
“미군 자산 쓰면 된다” 안 먹힌다
그렇다면 EU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지고 국방비도 적게 쓰는 대한민국 상황은 어떨까. 한국군에는 “그건 연합자산을 쓰면 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고위 장성이 많다. 우리 군이 자체 능력을 구축하려 할 때 “주한미군이나 전시에 증원되는 미군 자산을 활용하면 되니 구태여 독자 능력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며 반론을 펼 때 자주 나오는 말이다. 특히 이런 주장은 해공군력이나 감시정찰 자산을 도입하기 위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많이 제기된다.
하지만 이번 쿠르스크 사례에서 본 것처럼 미국은 언제든 동맹국에 정보 제공을 끊을 수 있다. 실제로 1996년 강릉무장공비 사건 당시 미국은 북한 잠수정의 출항을 한국에 미리 알리지 않은 바 있다. 이처럼 동맹국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를 미국이 당사국과 공유하지 않은 사례가 지금까지 여럿 있었다. 이번 쿠르스크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도 자체 정보 능력 강화에 투자를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 위기가 발생했을 때 한국이 치를 대가는 우크라이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