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사무실’인 작은방에 온 가족이 모였다. 양태찬 부장, 아들 승모 군, 딸 혜원 양, 부인 정지연 씨(왼쪽 아래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세계 최대 실리콘 제조업체 다우코닝의 한국법인 한국다우코닝(대표 조달호)의 양태찬(40) 부장은 현재 4년 넘게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아시아 솔루션 매니저’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다우코닝 직원 및 고객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업무를 주로 한다. 이 때문에 업무시간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한낮에는 한국 고객들을 만나고, 한밤에는 미국 유럽의 다우코닝 직원들과 국제전화로 회의를 해야 한다. 이에 회사는 아예 양 부장의 집에 재택근무가 가능한 모든 시설을 구비해줬다. 전화선, 인터넷선, 노트북, 프린터, 팩스기기 등이 새로 들어온 양 부장네 작은방은 그의 ‘사무실’이 됐다.
양 부장은 “무엇보다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말로 재택근무의 장점을 평가했다. 출퇴근에 시간을 쓸 필요가 없고, 밤늦게나 새벽에 국제전화 회의가 있는 날은 낮 시간에 편히 쉴 수 있어 일에 대한 집중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그는 “부수적 효과이긴 하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는 점도 재택근무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양 부장은 일주일에 이틀 정도 회사에 출근하고 나머지 사흘은 집에서 근무한다. 집에 머무는 날엔 아이들 등교를 돕고, 가끔은 아내를 대신해 급식당번을 하러 학교에 간다. 매일 저녁식사를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당연지사다. 양 부장은 “한 달에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해외출장으로 집을 비우기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면서 가족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점이 무척 소중하다”고 덧붙였다.
이틀 출근 사흘 집에서 근무 … 업무 집중도 높아
다우코닝은 화학회사 다우케미컬과 유리회사 코닝이 1943년 합작해 세운 실리콘 제조업체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점하고 있다. 1983년 설립된 한국다우코닝은 매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가, 현재 매출액 3029억원(2007년 기준)의 국내 1위 실리콘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미국 다우코닝 본사가 지분을 100% 소유한 외국계 기업이지만, 2006년 1억382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려 국내 실리콘 제조업체로는 최초로 1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는 등 한국 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모래의 규소 성분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드는 친환경 소재 실리콘이 쓰이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다. 한국다우코닝 조달호 사장은 “국내 유수 전자업체들이 모두 한국다우코닝의 고객”이라며 “압력밥솥 뚜껑의 이음새 부분, 샴푸와 린스, 전화기 키패드, 컴퓨터 키보드 등 가정 내에서도 우리 회사의 실리콘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우코닝은 2007년과 2008년 연속으로 미국 ‘포춘(Fortune)’지의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선정됐다. 직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업 환경, 복리후생, 보건 혜택과 보상, 유연시간 근무제(flexible time), 개인생활 효율증진 프로그램(Work-Life Effectiveness) 등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다우코닝은 매년 전 세계 직원들을 대상으로 근무만족도를 조사하는데, 90% 넘는 직원들이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다고 한다.
한국다우코닝의 전체 직원 220여 명이 자랑하는 기업문화는 앞서 양 부장의 사례에서 보듯 근무형태가 직원 개인의 업무나 사정에 따라 다양하다는 점이다. 4년 전부터 해외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을 중심으로 재택근무를 지원하는 홈오피스(Home Office) 제도가 운영돼 직원들의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밖에도 유연시간 근무제는 개인의 업무 일정에 맞춰 출퇴근 시간을 조정함으로써 근무 효율을 높이는 제도다. 예를 들어, 수원에 사는 직원은 출퇴근길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퇴근하는 식이다. 홍보팀 이수연 과장은 “서울 강서구 발산동 집에서 삼성동 회사까지 길이 막히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며 “이 때문에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한다”고 소개했다.
유연시간 근무제에 따라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굳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영업처에 방문할 일이 없을 때도 회사에 나올 필요는 없다. 아예 집에서 업무를 처리해도 되는 문화가 자리잡혔기 때문이다.
생활과학소재영업팀의 이수진(31) 과장은 16개월 된 아들을 둔 맞벌이 주부. 경기 용인시 수지읍에 사는 그는 서울 삼성동 회사에 들르지 않고 곧장 대전과 수원에 있는 영업처로 업무를 보러 다닌다. 회의가 없는 날에는 영업처 방문을 마친 뒤 회사에 들르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나머지 업무를 처리한다. 열흘에 하루 꼴로는 영업처에서나 회사에서나 회의가 없는데, 그런 날에는 아예 집에서 업무를 본다. 이 과장은 “아침에 아들과 놀아주다 오전 9시가 되면 친정어머니에게 아들을 맡기고 방문을 걸어 잠근 뒤 저녁 6시까지 노트북과 전화로 업무를 본다”며 “저녁 6시에 방문만 열고 나오면 바로 퇴근인 셈이라 이런 근무형태가 육아와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업무 시스템 전산화 … 살림 병행 여성들에 큰 힘
이처럼 탄력적 근무가 가능한 것은 회사 내 모든 업무시스템이 전산화된 덕분이다. 인터넷만 연결하면 언제 어디서든 회사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수진 과장은 “예를 들어, 노트북만 있으면 영업처 사무실에서도 특정 실리콘 상품의 재고량이 전 세계 어느 지역에 있으며 언제 발주가 가능한지를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모든 결재는 e메일로 하고, 오프라인 회의는 두어 주일 전에 미리 공지되며,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모든 제품 정보 역시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국제전화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외국계 기업의 특성을 반영한 한국다우코닝은 전 직원에게 후불국제전화카드를 지급해 개인 휴대전화로 국제전화를 걸더라도 그 비용은 회사로 청구하도록 했다. 국제전화를 걸기 위해 굳이 사무실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이 같은 탄력적인 업무 형태는 개인 및 가정생활도 돈독하게 하는 이차적 효과까지 낳고 있다. 2005년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아시아 마케팅 매니저 손범석(40) 부장은 지난겨울 무릎수술을 받고 두어 달 요양을 해야 하는 아내를 대신해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인 두 아들을 돌봤다.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손 부장은 “재택근무에서 가장 좋은 점은 아내와 대화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라며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차를 마시며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고 말했다. 이수진 과장은 “여성이 육아, 살림을 직장생활과 병행하는 것이 힘든 게 사실이지만, 우리 회사는 탄력적인 근무 형태를 장려해 여성에게 일할 힘을 준다”고 평가했다.
저녁 8시 무렵. 자택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마친 양 부장은 유럽 쪽 직원들과 회의가 있다며 ‘작은방’으로 출근했다. 혜원과 승모는 일하는 아빠를 위해 집 안을 살금살금 걸어다니고 엄마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밤늦게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가끔은 아빠가 급식당번을 하러 학교에 오기도 하니 이런 배려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혜원과 승모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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