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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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열정 차이코프스키 배출 자부심

  • viyonz@donga.com

    입력2008-06-11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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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열정 차이코프스키 배출 자부심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과 올해 새로 단장한 차이코프스키 동상(오른쪽).

    6월1일 오후 모스크바 크렘린 서쪽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동상 앞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동성애자들을 ‘악마’로 부르며 집회를 허용하지 않던 유리 루쉬코프 모스크바 시장을 규탄하는 러시아 동성애자 30여 명의 모임이었다.

    이들이 집회 장소로 차이코프스키 동상 앞을 택한 것은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니콜라이 알렉세예프 씨는 기자들 앞에서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였지만 실정법의 탄압과 사회 편견 때문에 숨기고 살았다”고 주장했다.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런 주장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동상 주변에 있던 한 중년 여성은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을 소수의 권리 보호에 이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손을 저었다.

    1954년 세워진 차이코프스키 동상은 오랜 산화작용으로 붕괴 직전에 있다가 올해 새로 단장됐다. 동상 뒤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은 1901년 4월 당시 수준 높은 음향시설을 갖추고 문을 연 이래 세계 클래식 음악 대가들이 기량을 선보이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차이코프스키의 명성과 권위는 20세기 러시아 귀족사회에 이미 알려졌지만, 1958년 소련이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를 개최한 뒤부터 소련과 러시아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올해는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가 시작된 지 50주년을 맞는 해. 냉전시대 동서 간 이념대립 속에 시작된 이 콩쿠르는 동상의 부식만큼 심한 역사의 굴곡을 거쳤다.

    올해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50주년 음악 대가의 산실 자리매김

    러시아 첼로의 거장으로 1962년 제2회 콩쿠르 당시 첼로부문 주심을 맡았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1974년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해외로 추방됐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복권된 그는 지난해 4월 타계하기 전 “이 콩쿠르가 기쁨과 고뇌를 줬지만 이 대회를 이끌기로 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의 음악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5월31일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에서는 이 콩쿠르 역대 수상자 5명이 참여한 갈라 콘서트가 열렸다. 갈라 콘서트 참여자 중 첼로연주자 다비드 게링가스를 향한 박수 소리가 유난히 컸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1970년 이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소련 국적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5년 스승을 따라 서방으로 망명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조국인 리투아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러시아의 피아노 천재’로 불리는 데니스 마추예프의 연주도 눈길을 끌었다.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3중 협주곡’ C장조 작품 56번을 연주하면서 능숙한 기량을 선보였다.

    관객들은 콘서트가 끝난 뒤에도 10분 이상 자리를 뜨지 않고 박수를 쳤다. 일부 관객은 “콩쿠르가 오랫동안 성공을 거둬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가슴에 미칠 수 있길 바란다”고 염원했던 로스트로포비치의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민들이 클래식 음악의 산실인 콘서트홀 앞에서 열린 동성애자 집회를 ‘난데없는 불협화음’이라고 부르는 속사정도 알 만했다.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애정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소수자 인권에 대한 관심보다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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