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의 주인공 엘비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더 킹’이라는 제목은 미국 팝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와 주인공 엘비스의 이름을 자연스레 오버랩시킨다.
영화는 엘비스의 복수심리와 그에 버금가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고등학교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다윗의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며 데이비드의 충실한 아들 노릇을 하는 폴(폴 다노)을 등장시켜 카인과 아벨의 신화를 재창조하는 원형성을 강조한다. 맬러리와의 사이를 눈치챈 폴을 죽인 엘비스는 태연히 폴을 대신해 데이비드의 아들 노릇을 하며 이 가정에 접근한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 갈등 그리고 사랑
‘더 킹(The King)’은 ‘위스콘신 데스 트립’으로 데뷔해 ‘맨 온 와이어’로 2008년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거머쥔 영국 감독 제임스 마시의 작품이다. 미국의 비평가들이 데뷔작 ‘위스콘신 데스 트립’이란 제목을 비꼬아서 ‘텍사스 데스 트립’이라고 할 만큼 ‘더 킹’은 데뷔작과 닮아 있다. 1890년대 광기와 살인으로 얼룩진 한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담아낸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열세 살 소년이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고 희생자의 집에 눌러 사는 설정이 나왔다. 이와 유사하게 ‘더 킹’에서 기이할 정도로 총에 집착하던 엘비스는 결국 폴을 죽이고 그의 집에 와 살게 되는 것이다.
엘비스와 폴은 카인과 아벨 같은 관계지만, 그들의 어떤 속성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닮아 있다. 아버지와 함께 사슴사냥을 하는 폴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사슴의 심장을 활로 관통한다. 이 한 몸 다 바쳐 주를 찬양하고 종교에 헌신하지만 폴 역시, 자신의 악마적 본성을 숨긴 엘비스와 폭력성이란 본질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폴이 죽자 엘비스를 친아들로 받아들인 데이비드는 엘비스의 손에 폴이 사용했던 활을 쥐어준다.
그렇다면 왜 제목은 ‘더 킹’이고 주인공의 이름은 엘비스일까? ‘더 킹’은 바로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애칭. 미국 사람들은 오직 엘비스 프레슬리만을 왕, ‘ 더 킹’으로 부른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엘비스는 아버지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자 라디오 채널을 돌려 로큰롤을 틀어놓는다. 즉 제임스 마시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이미지로 미 제국에 대한 문명비판의 날을 벼린다. 물론 영화는 종교와 안온한 시스템 안에서 평화와 자기 합리화의 진액을 빨아먹고 사는 인간 욕망의 상동성(相同性)을 담담히 그리고 있지만.
제임스 마시는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총기 소지에서, 로큰롤과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계급화된 차 문화에서 미국의 도덕적 기둥들이 부식하는 소리를 듣는다. 한 예로, 폴이 죽자 폴이 타던 차는 엘비스의 것이 된다.(유난히 이 영화에는 운전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그곳은 죽어버린 아이의 시체가 말 한마디 못하는 곳이며 이복 남매가 아이를 갖고, 아버지는 자신의 원죄를 대중에게 까발리며 용서를 구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더 킹’에서 미국은 카인과 아벨이 살아 숨쉬는 에덴의 동쪽이다.
물질만능 미국 문명 시종일관 비판적 시선
그러나 캘리포니아 살리나스 평원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가 가득한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과 달리, 제임스 마시의 ‘더 킹’은 오히려 건조하고 차가운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적으로 보자면 제임스 마시 본인도 인정했듯, ‘더 킹’에 가장 근접한 영화는 단연 ‘황무지’다. 이 기념비적인 걸작에서 맬릭은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에 한 치의 감정이나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미국의 땅을 ‘황무지’라 칭했다.
종교 문제가 더 직접적으로 끼어들었지만 제임스 마시의 이 예고된 묵시록적 복수 연대기 역시 미국의 땅, 에덴의 동쪽을 마음의 불모지로 비슷하게 그려내고 있다. 동생은 오빠를 죽였다는 애인의 고백에도 “나를 사랑하냐?”고 물어보고, 모든 복수를 마친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피 묻은 양손을 보이며 “당신의 신에게 해결하라고 해보시지”라는 최후의 유죄를 선고한다.
정상과 비정상이, 선과 악의 경계가 모두 흔들리는 이 땅에서 엘비스는 스스로 종이왕관을 만들어 맬러리 앞에서 자신이 ‘왕’임을 선포한다. 비록 패스트푸드 식당 한쪽에서 치러진 한없이 패스트푸드적인 대관식이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우리 시대의 주홍글씨를 스스로 가슴에 매단다.
결국 ‘더 킹’의 메시지는 분명하고 날카롭지만, 신선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했던 이야기를 누군가 했던 방식으로 도돌이표 하는 영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미국 문명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 시선을 견지한 제임스 마시가 극영화의 세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더 킹이든 더 퀸이든, ‘자신의 인장’이 있어야 영화 왕국을 다스릴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