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오전 광화문 앞 도로에서 청와대로 진입을 시도하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대학 내에서도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총학생회장 선거를 외면하고 학생회가 주도하는 ‘학내 투쟁’에 대해서도 대다수 학생들은 심드렁하다.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기 싫어하고 인기 연예인의 일상사에 관심이 쏠려 있는 중·고생들에게도 정치는 딴 세상 이야기다. 이런 실정을 잘 알다 보니, 미국산 쇠고기 관련 촛불집회에 몰려드는 젊은 세대를 바라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쇠고기 파문 脫물질적 세대의 등장
이번 미국산 쇠고기 관련 촛불집회는 참여자의 구성이나 조직 방식, 요구사항 등 여러 면에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었다. 어린 중·고생들이 떼로 몰려나왔고 주부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에 가장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거리로 나왔을까?
과거 광화문이나 서울시청 앞으로 몰려든 시민들이 외쳤던 것은 자유, 인권, 민주, 정의 등 정치적 가치 실현에 대한 요구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은 먹을거리의 안전성이다. 즉 자유와 민주 같은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먹을거리 문제가 정치적 저항의 소재가 된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의미심장한 정치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나타났듯, 이제 정치적 이슈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민주화의 진전에 따른 만족감이 정치가 아닌 새로운 이슈에 관심을 갖도록 한 것이다. 즉 정치적인 문제 대신 생활과 관련 있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문제가 이슈로 부상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실용적인 문제를 내세워 당선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원하는 ‘실용’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민심은 생활정치를 강조한다. 특히 삶의 질과 관련된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즉 물질적 성장보다 건강, 환경, 문화 같은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이번 쇠고기 파문은 우리 사회에 탈(脫)물질적 세대의 등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1980년대 도심 집회의 삼엄함과 격렬함을 떠올리면, 지금 거행되고 있는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행동은 무척 경이롭다. 80년대엔 집회 중 전경차에 끌려가는 것은 곧 퇴학이나 감옥행을 의미했다. 그런 공포가 또 현실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의 촛불집회에서는 그런 격렬함이나 비장함을 느낄 수 없다. 경찰버스에 실려 연행된 이후 그 경험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이를 ‘닭장차 투어’라 부르는가 하면, 경찰버스에 불법주차 스티커를 붙이며 이를 ‘닭장차 퍼포먼스’라고 한다.
이는 민주화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혀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서 자란 젊은 세대의 반응이다. 또한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채 성장해온 젊은 세대의 변화된 정치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힘으로 누르려는 과거 방식의 대응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과거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촛불집회의 특징이 또 하나 있다. ‘주동자, 배후자’ 문제다.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집회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인터넷이 얼마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촛불집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정치색과 무관한 10대와 20대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공유, 참여, 개방이라는 웹2.0의 정치가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민주화와 정보화가 접목해 이뤄낸 거대한 변이다. 그만큼 의제 설정이나 정보 유통 측면에서 기성 언론의 주도권은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번 촛불집회에서 나타났듯, 신문사나 방송국 기자들이 ‘퇴근’한 이후에도 집회 현장은 디지털로 무장한 참가자들의 자발적 활동에 의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다. 참여자와 방관자의 경계가 사라진 것이다. ‘양초 비용을 누가 지불했는지 배후를 알아보라’는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변화된 정치환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화와 정보화의 진전으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그만큼 확대됐고, 국가 권위를 바라보는 인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견과 갈등 중재 매개자 보이지 않아 걱정
하지만 이번 촛불집회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심각한 문제점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무엇보다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이 대통령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 갈등을 중재할 매개자가 보이지 않는다. 집회 참가자와 이 대통령이 직접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된 데는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챙기려는 이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과도 관련 있지만, 한국 정당의 무기력함이 원인이기도 하다. 사실 정당이 제구실을 했다면 촛불집회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시민사회와 국가가 중간 매개자 없이 직접 맞서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따라서 정당이 제구실을 회복하는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함께 던져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순항할지의 여부는 무엇보다 지난 20년간의 시대적 변화를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고 대응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