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MSD 직원들이 나무에 자신의 개인개발플랜을 걸어놨다. 박선미 홍보팀 부장, 홍성혁 글로벌테크놀로지서비스팀 차장, 강호성 마케팅팀 대리, 김지영 인사팀 사원, 권영관 보험약가팀 대리(맨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씨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니는 회사가 제약회사 한국MSD 한 곳이고 개인사업도 하지 않으므로 투잡스족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두 개의 자리에 동시 임명됐기 때문에 투잡스족이기도 하다.
“국내 업무와 해외 업무를 함께 맡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골다공증 치료제의 마케팅 업무, 해외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하 아태지역) 프로덕트 매니저(PM·Product Manager)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죠.”
젊은 나이에 ‘전문의약품 마케팅’이라는 핵심 업무를 하면서 해외 관련 업무까지 맡고 있다면 당연히 화려한 학위와 해외 경험이 있으리라 짐작되지만, 김 차장은 국내 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한 ‘토종 한국 대졸자’다. 그런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데는 한국MSD만의 독특한 인사시스템 ‘개인개발플랜(PDP·Personal Development Plan)’의 도움이 컸다.
한국MSD는 다국적 제약회사 머크(Merck · Co.)의 한국법인. 전문의약품을 주로 판매하는 까닭에 일반인에게 회사명이 친숙하진 않다. 그러나 머크사는 전 세계 78개국에 진출해 242억 달러(약 25조2900억원, 2007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대표적인 글로벌 제약회사다. 1994년 설립된 한국MSD는 2008년 5월 현재 537명의 직원을 채용하고 있으며 자궁경부암 예방백신, 로타바이러스 장염 예방백신, 골다공증 치료제, 탈모 치료제 등 전문의약품을 판매한다.
이 회사가 인사시스템의 하나로 운영하는 PDP는 한마디로 직원 개개인의 ‘분신(other self)’이다. 직원들은 자신의 PDP에 몇 년 뒤 어느 부서에서 어떤 업무를 맡고 싶은지, 어떤 직책을 희망하는지를 적는다. 그러한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 예를 들어 특정 프로젝트나 교육프로그램 참여 실태 등도 기록한다. 단, 이런 내용을 직원 혼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직속상사와 상의를 거쳐 양쪽이 합의한 내용만을 PDP에 기재하게 돼 있다.
PDP 대상자는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까지 전 직원. 한 번 형식적으로 작성하고 마는 게 아니라 1년에 두 번 이상 상사와 함께 PDP 실천 정도를 점검한다. 또 매년 그간의 노력과 성과를 반영해 PDP를 수정, 보완한다. 인사담당 이문자 상무는 “PDP에는 직원 개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면서 “PDP는 인사의 기본 자료로, PDP 없이는 직원을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직속상사와 상의 거쳐 합의 내용 기재
김 차장은 PDP에 따라 성장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2002년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3년차가 됐을 무렵 희망 직종을 마케팅으로 바꿨다. 이에 그의 상사는 개인병원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그를 종합병원 영업 담당자로 발령한 뒤 의사와 환자가 한데 모여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책임지도록 했다. 마케팅의 기본인 소비자의 ‘니즈’를 현장에서 파악하라는 뜻이었다.
1년 뒤 김 차장은 영업부서에서 마케팅 협력업무를 새로 맡았다. 영업과 마케팅 부서를 오가며 마케팅 실무를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1년 뒤 김 차장은 상사의 추천으로 미국 뉴저지에 자리한 머크 본사로 파견됐다. 좀더 큰 시장에서 마케팅 전략을 배워오라는 회사의 배려였던 것. 1년간의 미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마침내 현재 소속된 골다공증마케팅팀으로 발령받았다. 5월1일부터는 호주 뉴질랜드 중국 싱가포르 등 아태지역 10개국 마케팅 매니저들을 관할하는 해외업무까지 맡게 됐다.
지난해 영업부서에서 보험약가팀으로 옮긴 권영관(32) 대리도 PDP 수혜자다. 새로 온 상사가 ‘분석능력이 뛰어나다’는 그의 PDP 기록을 보고 보험약가를 산정하는 업무에 도전해보라고 제안했으며, 때마침 회사에서 보험약가팀의 인력을 충원한다는 채용공고를 냈던 것. 한국MSD는 신규 채용이 있을 때마다 직원들에게도 알린다. 희망자에게 부서 이동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권 대리는 외부 지원자들과의 경쟁 끝에 보험약가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낍니다. 산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듯, 제약업계 전반을 조망하는 재미가 크죠.”(권영관 대리)
PDP 역량 따라 개인별로 다른 승진 속도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제도라 해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무용지물. 한국MSD는 PDP의 활용을 독려하기 위해 부서장들의 인사평가에서 부하직원 육성(People Management) 평가항목 비중을 20%로 고정시켰다. 부하직원들의 자기계발을 독려하지 않으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게 한 것이다. 또 지난해 인사부는 500명이 넘는 전체 직원의 PDP 질(質)을 분석해 그 결과를 해당 부서장들에게 보냈다.
“직원의 장단점이나 역량 개발 사항을 너무 일반적, 추상적으로 묘사한 부분을 문제점으로 지적했습니다. 장래희망을 현실화하는 데 적합한 업무를 맡기고 있는지 등도 따졌고요.”(이문자 상무)
한국MSD 직원의 ‘승진 속도’는 저마다 다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직원은 단시간 안에 승진한다. 때로는 상사를 앞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능력을 우선하는 기업문화가 자리잡고 있어 ‘후배의 역전’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 상무는 “선배를 ‘제친다’는 개념이 우리 회사에는 없다”고 단언했다.
명함이 두 장인 ‘투 카드족’ 김연희 차장은 5년 안에 해외영업이나 해외마케팅을 총괄하는 임원이 되는 것이 꿈이다. 30대 중반에 글로벌 기업의 임원이 된다면 그는 여성 후배들에게 선망과 희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런 포부를 PDP에 또박또박 밝혀놨다. 이에 부응하듯 회사는 김 차장에게 ‘올해의 미션’을 부과했다. 현재 맡고 있는 아태지역 프로덕트 리더(Product Leader)가 그것. 아태지역 10개국 마케팅 매니저들과 미국 본사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것이 임무인데, 마케팅 매니저들은 굳이 그를 거치지 않고도 본사와 일을 추진할 수 있다. 체계상 김 차장은 그들의 상사도 아니다.
“한마디로 올해 미션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에요.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선 리더십 자질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야근이요? 물론 많이 하죠. 하지만 ‘몸 다쳐도 일할 수 있지만, 맘 다치면 일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즐겁게 하고 있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