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션의 사내 커피숍.
TV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광고업계 이미지는 그다지 밝지 않다. 광고인들 스스로가 “우리는 필요에 따라 모이고, 필요에 따라 흩어진다”고 자조할 정도로 턴오버(이직률)가 높은 곳이 대한민국 광고계다.
‘혁신의 바다’라는 뜻을 지닌 ‘이노션(Innocean)’. 창립 3년 만에 업계 3위 광고대행사로 급성장한 광고업계 돌풍의 주인공이다. 일반인에겐 조금 낯선 회사일 수 있지만, 이 회사가 내놓은 히트작인 ‘다이내믹 럭셔리 제너시스’(현대차), ‘매너 생활의 전도사 오므려집게’(스카이), ‘승리의 V라인 얼굴’(광동제약), ‘부부싸움 완전정복’(SK텔레콤) 등을 떠올리면 올해 초 광고취급액 순위에서 30년 전통의 제일기획을 누르고 1위를 기록한 광고계 ‘무서운 아이들’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직원들 사기 충천 … 창립 3년 만에 업계 3위로 우뚝
그런데 이노션은 신생 회사답지 않게 ‘인재육성’이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 지금까지 인재를 키우기보다는 빼앗아오기 바빴던 광고계의 관례를 감안할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든 전략이다. 그것도 ‘크리에이티브(Creative)’라는 뜬구름 잡는 가치에 대한 투자가 빛을 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카피라이터 유병천(34) 차장은 지난해 2주간 남미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일정을 따라가는 이 여행에는 ‘페루 : 모터사이클로 찾아가는 잉카유적 탐험’이라는 부제까지 붙었다. 2인1조로 떠난 여행의 경비 1000만원은 전액 회사가 부담했다. 유 차장은 “누구보다 먼저 세상을 읽고 트렌드를 주도해야 하는 광고인들은 끊임없는 자극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구받기 때문에 재충전의 시간이 필수적이다”며 “지금까지는 이직 도중에 여행을 해야 했는데 이번처럼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것도 친한 동료와 떠난 여행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됐다”고 말한다.
‘크리에이티브 어드벤처(Creative Adventure)’로 명명된 이 행사는 직원들이 아이디어와 크리에이티브 함양을 위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체험 프로그램이다. 물론 다소간 경쟁은 필요하다. 뜻 맞는 직원끼리 팀을 구성, 인사이트와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 테마를 선정해 탐방계획서를 제출한 뒤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대상자를 선발한다.
지난해에는 페루팀과 함께 ‘타이포그래피의 선진국을 찾아 떠나는 스위스, 일본 여행팀’이 선정됐고 올해 상반기에는 ‘극한에의 도전을 통한 자신과의 만남 -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세계 최고의 Innovative 발견 - 영국, 두바이’ 프로젝트가 선정돼 여행을 준비 중이다.
광고회사가 직원들의 ‘창조적 생각’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것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이노션의 모든 인사·복지 제도는 직원들의 ‘크리에이티브 향상’에 집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집요하다. 5년차 광고기획자 신나라(28) 대리는 이를 두고 “크리에이티브를 위해 다른 걱정을 하지 않도록 후원하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점심식사 시간 ‘이노키친’에 모인 직원들이 생일을 맞이한 동료를 축하해주고 있다.
커피는 광고인들에게 휴식 같은 존재며, 카페는 아이디어 충전소나 다름없다. 광고인들의 커피값 지출은 보통 직장인의 몇 배를 넘는다. 그러나 이노션 직원들은 꽉 막힌 회의실이 갑갑할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또는 평소 만나기 어려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내 커피숍을 찾는다.
“이직하더라도 인재육성 포기 않겠다”
직원들의 낭비요소와 사내 소통 증가를 위해 스타벅스를 아예 사내로 끌어들인 셈이다. 이를 위해 두 명의 전문 바리스타까지 두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카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정 금액을 지원하고 초과 사용분을 자원봉사기금으로 활용하니, 커피도 마시고 봉사기금도 마련하는 일석이조의 놀이터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밤샘 회의와 아이디어 개발에 지친 직원들을 위해 건물 내 헬스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계약을 맺어 직원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헬스, 요가, 태보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직원 건강을 챙기는 세심함도 선보였다. 이 같은 복리후생 제도만 살펴봐도 사내복지에 소홀했던 광고장이들을 놀라게 할 만하다.
2005년 5월, 단 54명의 광고인으로 시작한 이노션은 현재 40여 개 클라이언트와 120여 개 브랜드를 관리하는 300여 명의 광고인들로 구성된 국내 최고, 최대 규모의 광고회사로 급성장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보다 광고 물량이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을 모기업으로 두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노션이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그룹 물량을 취급하는 규모는 연간 2000억원이 넘는다. 자연스레 설립 이듬해인 2006년 업계 3위로 올랐을 정도다.
그러나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인하우스(기업 내) 대행사’로만 바라보는 것도 바람직한 시각은 아니다. 이미 취급고의 40% 이상을 그룹 밖에서 경쟁을 통해 수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율은 인하우스 광고회사로는 최고 수준이다. 오히려 이노션의 활약이 ‘현대’의 인재 우대 정책이 광고계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된다는 긍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뚜렷한 오너십의 가장 긍정적인 사례가 바로 적극적인 신입사원 선발과 해외진출 확대다.
이노션은 창립 이후부터 꾸준히 신입사원과 인턴사원을 뽑는 뚝심을 보였다. 자연스레 홍보와 마케팅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 사이에선 ‘이노션에 합격하기 위한 예비광고인 모임’까지 결성됐을 정도다. 그런데 새 얼굴을 광고계에 데뷔시키고 교육해 최고의 복지제도 속에서 경험을 쌓게 했는데도 다른 회사로 옮겨간다면 결과적으로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까?
놀랍게도 이노션 관계자들은 “이직을 하더라도 ‘이노션 출신이라면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광고계에 심어주겠다”는 야심을 내비친다. 한번 떠난 인재라도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전략이다.
창립 3년 만에 업계 3위로 뛰어오른 이노션의 밑바탕엔 최고의 크리에이티브를 뽑아낼 수 있도록 최상의 크리에이티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회사의 지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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