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조선인들이 접한 서양문명 가운데 통신기기는 가장 충격적인 물건이었을 것이다. 괘종시계의 경우 해시계와 물시계라는 ‘원형’이 있었고, 전등은 촛불이나 횃불이라는 조명도구가 이미 널리 사용됐다. 자동차는 수레나 마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그에 비해 라디오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기계였다.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만 흘러나오니 영락없는 귀신 아니었겠나. 전화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으리라.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과 생생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으니 신기한 마법상자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 전화기 보급은 매우 완만한 편이었다. 8·15광복 직후만 해도 가정은 물론 사무실에도 전화기가 흔치 않았다. 오히려 다방들은 전화기를 꼬박꼬박 갖춰놓았다. 충무로가 영화산업 1번지가 된 것도 전화기가 귀하던 시절 영화인들이 그 일대 다방들을 사무실로 사용한 데서 연유한다.
그로부터 반세기 남짓 지난 지금, 전화기는 가전제품을 뛰어넘어 개인 소지품이 됐다. 이젠 그 작은 기기가 없는 경제와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도구만은 아니다. 휴대전화는 패션의 일부로도 여겨지며 유행을 따라 끊임없이 교체된다.
휴대전화는 인터넷과 함께 인간의 삶과 사회를 엄청난 속도로, 그것도 매우 광범위하게 바꿔놓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이동통신회사 ‘NTT도코모’의 도코모는 ‘어디든’이란 뜻으로, 모바일 시대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른다. 이제는 곁에 있다고 가까운 게 아니고, 멀리 있다고 먼 게 아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지만, 이제는 ‘sight’ 대신 ‘connect’를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식당이나 술집에 가면 맨 처음 하는 것이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 거야. 똑같아! 그리고 학생들이 수업 중에 전화 받는 것 보고 너무 놀랐는데, 교수님들도 수업 중에 전화 받는 것 장난 아니었어. 그리고 밥 먹는데 앞의 친구가 5분마다 한 번씩 문자 보내는 거 정말 신경 쓰이고 짜증나.”
KBS TV ‘미녀들의 수다’에서 독일 여성 미르야 씨가 한 말이다. 우리에겐 익숙한 일상이 외국인들에겐 사뭇 위화감을 주는 듯하다. 왜 그렇게 느끼는 걸까. 우리가 외국에 나가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휴대전화가 웬만큼 보급된 나라들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벨이 울리거나, 주변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무 데서나 통화에 몰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토익 시험장, 영화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휴대전화부터 켜는 모습은 기이하다. 한국인에게 휴대전화는 마치 의족(義足)이나 의수(義手)나 신경망의 일부로 이식된 전자칩이 아닐까 싶을 만큼 신체에 밀착돼 있으며, 또한 빈번하게 가동된다.
우리에겐 익숙, 외국인에겐 위화감
대학 강의실에서 휴대전화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인 풍경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특히 한국에서 삐삐와 휴대전화가 급속히 보급된 데는, 1990년대 들어 급속하게 붕괴하는 공동체를 경험하던 사람들이 기술적 통신수단을 사용해 타인과 아직도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확인해보길 갈망했던 문화적 배경과, 휴대전화 번호를 사적인 것이라기보다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듯 프라이버시에 대한 느슨한 태도가 한몫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집단주의적 정서가 강한 편이다. ‘나’보다 ‘우리’를 우선시한다. 프라이버시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래서 휴대전화 번호도 아무에게나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연수회 같은 행사가 열릴 때 자료집에 참가자들의 휴대전화 번호가 실리는 것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같이 밥 먹을 상대가 없다고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종종 있을 정도로 한국인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더 나아가 고독은 불온시되기도 한다. 냉전시대에는 지방의 어느 관공서가 세워놓은 간판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혼자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살펴보자.’
늘 다른 사람들 속에 섞이고 어울려 지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사회심리다. 이는 촌락공동체 같은 정착사회의 보편적인 경향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전국적인 인구 이동을 유발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그리고 도시 안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거주지를 옮긴다. 직장도 수시로 바꾼다. 신입사원의 3분의 1이 입사 1년 안에 퇴직할 정도다. 어느 한곳에 깊이 뿌리내리기엔 삶이 지나치게 유동적이다. 인간관계도 잠깐의 인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가족조차 저마다 일과 공부로 바쁘다.
생활의 유동성(mobility)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휴대전화는 공간의 제약을 넘어 타인과 연락하는 회로를 사방팔방으로 활짝 열어놓았다. 가까이 있는 사람과 마음이 통하지 않을수록 멀리 있는 사람과의 교감이 애틋한 법이다. 그리고 온갖 연줄을 편집하면서 생존하고 출세해야 하는 한국사회에서 휴대전화는 그 ‘끈’을 단단하게 잇는 고리가 된다.
휴대전화는 패션이다. 유행에 따라 끊임없이 교체된다. 서울의 길거리 어디에서나 휴대전화 판매점을 쉽게 볼 수 있다.
즉흥적인 접속이 가능한 점은 뭐든 빨리 해치우려는 한국인의 심성에 잘 맞아떨어진다. 일단 판을 벌이고 보는 성급함, 일을 추진하며 생기는 착오들은 휴대전화로 그때그때 민첩하게 수정하고 땜질하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일상의 불안정성은 가중된다. 약속 시간과 장소는 수시로 바뀌고, 직전에 취소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여러 명이 자동차 몇 대에 나눠 탄 채 외식하러 갈 때도 미리 식당을 정해놓지 않아 주행하며 휴대전화로 의논하느라 번거로운 경우도 종종 있다. 출발 전에 합의하면 간단할 일들이 자꾸 복잡해지는 이유는 휴대전화에 대한 부질없는 의존 때문이다.
그러나 즉흥성은 때로 엄청난 역동성으로 사회를 움직인다. 2002년 첫선을 보였다가 올해 놀라운 위력을 떨친 촛불집회는 휴대전화 없이는 그만한 폭발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문자메시지는 동시에 대량으로 발송할 수 있어 신속한 동원에 긴요하다. 이동연 씨는 ‘문화부족의 사회 : 히피에서 폐인까지’라는 책에서 휴대전화의 게릴라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모바일 문자메시지는 익명의 대중에게 실시간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e메일 서비스 기능보다 기동력이 훨씬 강하다. 이 때문에 모바일 문자메시지는 특히 집단행동과 이벤트를 효율적으로 홍보하는 새로운 매체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휴대전화가 광장의 열기를 모아내는 일은 지극히 드문 경우다. 대부분의 휴대전화 소통은 사적인 내용이고, 업무에 관한 것도 거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여기에 스팸문자나 음란메시지, 각종 가입과 구매를 권유하는 전화가 불청객으로 끼어든다. 모처럼 울린 벨소리가 반가워 급히 받았는데 그런 안내음성이 흘러나올 때는 정말 짜증이 난다. 우리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준비된 메시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위해 발송된 메시지 중에서도 반갑지 않은 것이 있다. ‘귀하의 생일(또는 결혼기념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신용카드 회사나 이동통신사가 친절하게 쏘아준 문자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는다.
소통 기회 늘었지만 관심 끌기 더 큰 허기증
‘진심’은 대량복제될 수 없다. 하이테크는 ‘하이 터치’를 요구한다는 존 나이스빗의 말대로,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따스한 교감을 소망한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생활필수품이 된 지금,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충분히 긴밀하고 원활한가.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소통에 대한 갈증이 오히려 증폭되고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은 강박이 더 만연해 있지는 않은가. 날로 비대해지면서 한편으로는 희박해지는 자아, 그 테두리에 타인과 뿌듯하게 만나는 접점들을 가꾸는 일은 스무 살 휴대전화를 몸에 지닌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라 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느 누구와도 접속할 수 있는 미디어가 손에 쥐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느라 분주하다. 그 가냘픈 파동은 설레는 교감의 자장(磁場)일 수도 있고, 소통 부전(不全)의 잡음일 수도 있다. 휴대전화는 삶의 질서를 배열하고 인간관계를 편집하는 미디어다. 마음의 지문(指紋)을 추적하는 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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