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0일 정보통신부 정책과 관련, 기자 브리핑을 하고 있는 이상철 전 정통부 장관(오른쪽).
국민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이동통신 번호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여론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번호이동성 도입시기 및 010 통합 관련 소비자 조사’라는 문건이 바로 여론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설문조사. 문건의 표지에는 ‘대외비(對外秘)’라는 직인이 찍혀 있다.
조사를 진행한 곳은 총리실 산하기구로 정보통신부(이하 정통부)의 통신 관련 정책에 대한 자문과 연구용역을 맡아온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KISDI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월21~22일 양일간 서울을 포함한 전국 5대 도시에 거주하는 이동통신 사용자 1000명을 대상으로 번호이동성 및 010 통합 관련 소비자 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의 목적은 1월16일 정통부가 발표한 ‘번호이동성 제도’와 ‘이동통신 식별번호 010 통합방안’에 대해 국민여론을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문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예정된 답변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번호이동성 제도’ 도입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물으면서 설문조사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의도된 조사결과 얻으려는 여론조작”
“‘번호이동성’이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이동통신 회사를 다른 회사로 변경하더라도 이용자가 원할 경우 기존에 사용하던 전화번호를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즉 지금 사용중인 휴대전화 번호는 그대로 사용하면서 통신회사(SKT, KTF, LGT)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번호이동성 제도가 도입되면 통신회사 간 경쟁이 치열해져서 이용요금이 싸지고 통화품질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귀하께서는 이러한 번호이동성 제도의 도입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상대로 응답자의 89%가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 이어지는 질문도 편파적이긴 마찬가지다.
“번호이동성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시장 지배력이 있는 사업자로 이용자가 대거 이동해 이용자가 적은 사업자가 시장에서 퇴출됨으로써 독과점화되어 이용자 선택의 폭이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습니다. 이에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재 이용자 수가 많은 지배적 사업자부터 먼저 번호이동성 제도를 실시하고, 이용자 수가 적은 회사는 나중에 번호이동성 제도를 실시하는 순차적 도입방안과 번호이동성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두 가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번호이동성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경우 모든 이용자가 번호이동성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순차적으로 도입할 경우 전체 이용자의 50% 이상은 도입 시점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도입 후 1년 이내에는 모든 이용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번호이동성 제도를 순차적으로 도입하는 방안과 번호이동성 제도를 아예 도입하지 않는 방안 중 어느 방안을 선호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79%가 ‘순차적 도입방안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지난 1월21일 정통부 의뢰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는 설문 자체가 특정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지극히 편파적으로 구성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010 번호통합’이란 지금 사용중인 휴대전화 번호의 앞 3자리, 즉 이동전화회사를 나타내는 번호를 ‘010’으로 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 때, 지금처럼 10~11자리를 누르지 않고 8자리 번호만 누르면 되기 때문에 전화 걸기가 간편하고 번호를 기억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현재, 이동전화의 번호를 010으로 통합하는 방안으로 두 가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004년부터 이동전화에 새로 가입하는 사람과 010으로 번호변경을 희망하는 이용자에게만 010 번호를 부여하여 점진적으로 2007년까지 010 번호로 통합하는 방안이고, 둘째는 2007년경에 한꺼번에 모든 이용자의 번호를 010으로 통합, 전환하는 방안입니다. 이 방법은 일시에 이용자의 번호를 변경해야 하므로 사회적 경제적 충격이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높습니다. 귀하께서는 두 가지 방안 중 어느 방안을 선호하십니까?”
이에 대해 ‘2004년부터 점진적으로 도입’하자는 응답자가 전체의 67%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 같은 여론조사에 대해 “여론조사 자료로서 전혀 가치가 없고 특정한 정부 정책을 알리고 의도된 조사결과를 얻기 위한 목적을 띄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KISDI는 정통부의 의뢰로 문제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면 정통부는 무엇 때문에 편파 의혹을 낳은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일까.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오영식 의원(민주당 비례대표)은 “지난 1월16일 정통부는 예상을 깨고 2004년 1월부터 번호이동성 제도 도입과 010 번호통합제도를 전격 도입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정통부의 방안은 업계는 물론 시민단체, 언론, 국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문제의 여론조사는 이 같은 비난여론을 무마하고, 국민 대다수가 정통부 방안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여론조작이었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발단이 된 정통부의 ‘이동전화번호 개선계획’ 안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이동통신 신규 가입자들은 011, 016, 017, 018, 019로 시작되는 인식번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대신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를 부여받는다. 당초 정통부는 3세대 이동통신, 즉 IMT-2000서비스 개시 5년 내 010 공통식별번호로 통합하겠다며 2007년 이후에나 번호통합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를 바꿔 내년부터라도 현재 사용중인 2세대 이동통신(셀룰러폰, PCS)에서도 010 번호통합작업을 시작하겠다고 한 것이다.
또 2004년 1월부터 SK텔레콤 고객, 즉 011 017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은 기존 번호를 바꾸지 않은 채 KTF나 LG텔레콤으로 이동통신사를 옮길 수 있게 된다. 6개월 뒤인 내년 7월1일부터는 KTF 휴대전화 이용자도 번호를 바꾸지 않고 이동통신사를 변경할 수 있다. 2005년 1월1일부터는 LG텔레콤 고객까지 번호변경 없이 이동통신사를 옮겨갈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내용의 번호이동성 제도 역시 IMT-2000서비스부터 시작한 뒤 시장경쟁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겠다는 것이 정통부의 기존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날 그 시행시기와 방식을 대폭 바꿔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정통부의 이동전화번호 제도는 즉각 화제가 됐다. 내년부터 011 고객이 011 번호를 갖고 다른 통신사로 옮겨갈 수 있게 된 SK텔레콤의 반발이 거셌다. SK측은 연일 보도자료를 내며 KT 사장 출신인 이상철 당시 정통부 장관이 KT의 계열사인 KTF를 봐주기 위해 무리하게 제도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비난 여론이 일자 이 전 장관이 직접 나서 “번호이동성 제도는 수차에 걸쳐 검토과정을 거친 사안이고 사업자가 아니라 소비자 편익 측면에서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SK텔레콤측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도 정책결정 과정의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통부가 내놓은 방안은 1월27일 통신위원회 심의에서 정통부 원안대로 확정됐다. 앞서의 여론조사는 바로 1월16일 정통부 방침 발표와 27일 통신위원회 심의의 중간 지점인 1월21~22일 양일 사이에 실시됐다. 오영식 의원은 “번호이동성 제도 발표 후 비난 여론이 일자 정통부는 KISDI를 통해 정통부 안에 대한 국민지지가 높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문제의 여론조사를 긴급하게 실시해 정통부 방침을 관철시키는 데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오의원은 “지난 연말 정통부는 번호이동성 제도 등에 대해 정량조사와 정성조사 방식으로 두 차례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번호이동성 제도에 대해서는 순차적이 아니라 전면 도입에 찬성하고 있었다. 이 조사를 맡은 KISDI도 번호이동성 제도 순차도입과 관련해 전면도입할 것이냐, 아니면 시장 최약체인 LG텔레콤에 대해서만 순차도입을 실시할 것이냐 하는 두 가지 안을 제시했음에도 실제 정통부 안에는 KTF도 순차도입의 혜택을 받는 것으로 정해졌다”며 정통부의 특정업체 편들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통부는 최근까지 문제의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정책결정 과정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정통부에 여론조사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자료 제출을 기피하더니 최근 앞서의 설문 전문을 가린 채 “귀하께서는 이러한 번호이동성 제도 도입에 찬성하십니까?”식으로 최종 질문과 응답 결과만을 간략하게 담은 자료를 국회에 제출해 자료 제출을 기피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이런 의혹에 대해 정통부의 한 관계자는 “만약 의원들이 정확히 자료요청만 했으면 조사결과 자료를 제출했을 것”이라며 “여론조사 자료를 감출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여론조사 항목의 불공정성에 대해서도 “1월21일 실시한 조사는 번호이동성제도 도입 의견을 물은 지난 연말 조사의 후속 작업”이라며 “따라서 정부의 구체적 보완대책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통부측의 해명에도 정책결정 과정에 여론조작 의혹마저 일 정도로 투명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정통부의 일 처리 방식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아무튼 대외비 여론조사 자료의 공개로 번호이동성 제도와 010 번호통합 제도는 다시 한번 논란의 태풍 한가운데로 빠져들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