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력선의 소재는 98%가 구리다.
뉴욕 맨해튼 인근에 사는 김희연씨는 8월17일 끔찍한 경험을 했다. 뉴욕시 전체가 잠들어버린 그날, 남편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는 물론 휴대전화마저 불통이어서 연락조차 불가능했다. 게다가 도시는 온통 암흑천지. 평상시엔 강 너머 반짝이는 맨해튼의 고층건물 불빛에 눈이 부셨지만, 그날은 달랐다. 다행히 남편은 다음날 오전 1시경에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장장 4시간을 걸어서 맨해튼을 빠져나온 것. 지하철이 운행되는 것은 고사하고 신호등도 잠들어버려 대부분의 뉴요커들은 차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걸어 집으로 향했다.
미국 동부를 덮친 정전사태는 현대인의 삶에 전력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특히 정전의 원인이 2001년 캘리포니아주에서 벌어진 정전사태와 같이 발전량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낡은 송전시스템 때문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하 200℃ 이하 초저온 첨단기술
발전소에서 좋은 품질의 전기를 생산해도 이것을 실어 나르는 전력선이나 송전시스템이 부실하면 전기가 멀리 보내지기 어렵다. 게다가 그 전력선이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현재 사용되는 구리선은 자체 저항으로 인해 전력의 상당량이 송전 도중에 손실될 뿐 아니라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대용량의 전력을 수송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산업화 초기에는 이 문제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산업이 고도화하고 전력 소비량이 급격히 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보다 신뢰할 수 있고 전송 효율이 좋은 새로운 전력선의 개발이 절실해진 것이다. 오랫동안 전력수송 분야의 최고봉 자리를 지켜온 구리선이 마침내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전력선의 한계를 ‘차가운 전기선’이 극복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영하 200℃의 초저온에서 전력을 실어 나르는 첨단기술이 적용된 초전도전력선(이하 초전도선)이 그 주인공. 초전도선은 구리선 대신 초전도체를 이용해 전력을 수송하는 케이블을 말한다. 몇몇 세라믹은 영하 269℃에 이르면 전기저항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가 되는데, 이때를 초전도 상태라고 부른다. 저항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전류가 잘 흐르고 아무리 전류가 많이 흘러도 열이 발생하지 않는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초전도체를 강한 전자석을 만드는 데 활용했고 이제는 이것을 전력선으로 활용하는 데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절대온도인 영하 269°C에서는 전기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현상’이 발생한다. 구조 분석을 위해 실험대에 올려놓은 초전도체(위). 마이너스 효과로 인해 중력을 이겨내고 부상한 초전도체 모습.
초전도선의 가장 큰 매력은 전력 수송에 따른 손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현재 사용하는 구리선은 자체 저항 때문에 m당 약 30W의 전력을 열로 발산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구리선으로 송전한다고 가정하면 약 50만개의 전구를 켤 수 있는 전력을 허비하는 셈이다. 이것을 초전도선으로 교체하면 송전시의 전력 손실을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 또한 복잡한 송전 시스템도 한결 간결해진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전기의 전압은 220V이나 발전소에서 막 생산된 전기는 그보다 훨씬 높은 15만4000V에 달한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고압의 전기가 그대로 송전선을 타고 각 도시로 흐르는 게 아니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먼저 변전소로 옮겨져 76만5000V로 승압된다. 전국 각지로 송전하는 과정에서 전력이 많이 손실되기 때문에 전압을 최고로 높여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도시 근처에서는 34만5000V로 낮춰지고 또 도심 곳곳에 위치한 변전소에서 다시 몇 단계의 감압 절차를 거쳐 가정과 사무실로 배달된다.
이렇게 전압을 높이고 낮추는 작업을 반복하니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도심 곳곳에는 2층 높이의 전압의 감압과 승압을 위한 변전소가 자리잡고 있다. 전력시스템이 복잡해진 것이다. 그러나 초전도선이 설치되면 이 같은 변전소가 필요 없어진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 흉물스럽게 자리한 변전소를 없앨 수 있게 되는 것. 저항에 따른 전력 손실이 없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바로 전국 곳곳에 보낼 수도 있게 된다. 또한 전력수송 효율이 워낙 높다 보니 가느다란 전선으로도 많은 전기를 전달할 수 있다. 기존의 구리선으로는 직경 1m 정도가 필요한 전력도 초전도선으로는 약 20cm면 충분하다.
전문가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서울 도심의 전력사용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전력선을 추가로 매설하거나 전력 사용을 규제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두 방법 모두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만약 서울 전역에서 매일 전력선 매설 공사가 벌어진다면 그 누가 공사로 인한 교통체증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한여름에 에어컨을 끄거나 업무 도중 컴퓨터를 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전문가들이 고려하는 최선의 대안은 구리선을 초전도선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현재 구축된 전력수송 시스템만으로도 획기적으로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초전도체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21세기프런티어연구개발사업단(단장 류강식) 조전욱 박사는 “늘어나는 전력 소비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보다 전력수송 시스템을 효율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면서 “초전도선은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사상 초유의 정전사태를 겪은 뉴욕도 내년부터 초전도선의 도입을 본격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계획은 나이아가라 모호크 전력회사(Niagara Mohawk Power)를 주축으로 350m 규모의 실험선을 매설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전사태 이후 전력수송 시스템을 개선하라는 요구가 거세져 신속하게 사업이 추진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밖에 일본과 유럽에서는 이미 수백m 규모의 실험선이 상용화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중국 역시 실험선로를 구축할 계획이다.
물론 초전도선이 완전무결한 기술은 아니다. 우선 가격이 비싸다. 현재 초전도선 가격은 구리선 가격의 20배 정도. 게다가 365일 내내 초전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한계온도를 벗어나면 초전도 상태가 깨지기 때문에 냉각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절대 조건이다. 초전도가 깨지면 저항이 순간적으로 커져 열이 발생하고 폭발할 가능성도 높다. 더구나 전국에 깔린 선로를 모두 교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조박사는 “냉각기가 가동을 멈추고 초전도선이 절단되는 등 최악의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충분하다”고 설명한다. 설사 냉각기 가동이 중단된다 하더라도 초전도 상태가 깨지는 수준의 온도로 올라가기까지에는 적어도 6~12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철저한 보온 기능에 그 해답이 있다. 초전도선을 감싼 단열재가 내부 온도를 차단해 최소한 6시간 동안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초전도선은 이제 곧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군림해온 구리선을 밀어내고 전력산업의 왕좌를 차지하는 셈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구리선의 영화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