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 사이에서 이민 열풍이 불고 있지만 장벽은 여전히 높다.
현대홈쇼핑 이민상품의 진실
8월28일 현대홈쇼핑이 판매해 열기를 고조시킨 이민상품의 대상지는 캐나다 매니토바주다. 이곳의 주도 위니펙의 겨울 추위는 말 그대로 살을 엔다. 버스정류장마다 난방시설이 가동되는 피한처가 마련돼 있고 다운타운의 건물들이 ‘스카이 워크’라고 불리는 방한 육교와 지하보도로 연결돼 있을 정도로 추위가 악명을 떨치는 도시다. 10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어지는 긴 겨울 동안 위니펙은 밖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이 거의 ‘올스톱’ 되는 동면기에 접어든다. 긴 겨울 기간엔 상업활동조차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정도다. 시민들의 삶도 활력을 잃기는 마찬가지. 시민들은 매일 24시간 방송되는 기상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즉시 동상 위험’ ‘피부 노출시 1분 내 동상’ 등의 경고문구가 뜨지는 않는지 TV 화면에 눈길을 고정한다.
이처럼 추위 탓에 어학연수생도 기피하는 캐나다 중부의 작은 도시 위니펙이 ‘느닷없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지루한 겨울의 회색 풍경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현대홈쇼핑의 ‘이민상품’ 방송 덕이다. 첫 방송에서 매니토바 이민상품은 세칭 대박을 터뜨렸다. 단일 품목 단일 방송시간 사상 최고 매출액인 175억원을 기록한 것.
홈쇼핑이 내놓는 이민상품이 그릇된 이민열풍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홈쇼핑측은 두 번째 방송에선 “신청한다고 해서 영주권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고 수차례 강조하는 등 광고 수위를 크게 낮췄다. 그럼에도 두 번째 방송도 대박을 터뜨렸다. 90분 만에 2935명이 몰려 1차 판매 때 신청 인원의 3배를 기록한 것. 이들이 모두 이민을 떠난다면 홈쇼핑측은 53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게 된다. 현대홈쇼핑 관계자는 “사람들의 높은 관심을 미리 예상하고 전화상담원 수를 70명에서 300명으로 늘렸지만 턱없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현대홈쇼핑의 이민상품이 대박을 터뜨리는 데는 물론 홈쇼핑이라는 매체의 광고효과가 한몫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요인은 이번 상품의 자격요건이 크게 완화된 점이다.
9월6일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해외이주·이민 박람회에는 1만50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그런데 현대홈쇼핑이 ‘고졸 이상’이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광고에 나서자 이민자격이 되지 않는 줄 알았던 소비자들이 크게 고무된 것. 주한 캐나다 대사관 관계자들도 첫 방송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이는 이민업체가 연방이민법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주이민법의 틈새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주별 이민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곳은 과거엔 퀘벡주밖에 없었다. 그런데 매니토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브런즈윅 등이 나서면서 일부 주에서 주이민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상품 구입해도 영주권 취득까지는 먼길
현대홈쇼핑은 독립이민(수수료 620만원), 기술취업이민(2800만원), 기업이민(850만원) 등 3가지 상품을 판매했다. 3가지 상품 중 기술취업이민이 특히 인기가 있어 첫 방송 땐 신청자가 505명으로 전체 신청자의 절반 이상을 기록했고 기업이민과 독립이민 신청자는 각각 181명, 297명에 불과했다. 두 번째 방송에서도 기술취업이민에 전체 신청자의 68.9%가 몰렸다.
현대홈쇼핑이 판매한 상품 중 기업이민 상품은 기존에 나와 있는 상품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린 기술취업이민 상품. 기술취업이민은 현지에서의 교육을 통해 기술자격을 취득해 취업한 뒤 이민자격을 받을 수 있는 이민상품으로 소개됐다. 나머지 두 상품의 경우 영주권을 받은 뒤 입금해도 된다고 강조했으나 기술취업이민 상품은 예외였다. 연방이민 자격에 턱없이 부족한 자격요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취업비자를 받은 뒤 영주권을 얻도록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주한 캐나다 대사관 관계자는 “업체측이 광고한 조건으로 계약한 사람들을 매니토바 주정부가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라며 “현재로선 그동안의 관행과 비교할 때 턱없이 완화된 조건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홈쇼핑 이민상품 납품업체인 ‘이민타임’ 관계자도 “이민신청이 받아들여질지 거부될지는 두고봐야 안다”며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할 경우엔 납입한 돈의 20%를 돌려줄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다. 영어교육 비용 40%와 기술교육 비용(트럭·중장비 운전교육, 자동차 정비교육 등) 40%는 비용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는 것. 결국 기술취업이민 신청자들은 영주권도 못 받고 돈만 날리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캐나다의 주별 이민프로그램은 쿼터제로 운영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1년에 받을 수 있는 이민자 수가 한정돼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매니토바주의 전 세계 이민 쿼터는 1500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이 차지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 홈쇼핑 방송에선 매니토바주의 이민 쿼터가 올해부터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실제로 쿼터가 늘어난다고 하더라고 같은 조건에서 전 세계인들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이민 자격요건이 강화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영주권을 받는 사람들은 극히 적을 것이라는 게 이민 관련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금까지 매니토바주에 120세대를 보냈다는 ‘온누리 이주공사’ 안영운 대표는 “홈쇼핑을 통해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 중 자격이 되는 사람은 40~50명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대홈쇼핑의 이민상품 판매는 우리 사회에 이민을 준비하는 20~30대 젊은층이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2차 방송 때는 20대(10.9%)와 30대(49.5%)가 ‘무려’ 60% 가량을 차지했다. 1차 방송 때도 30대가 51%, 20대가 11%를 차지했다.
이민업체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이민을 원하는 연령층이 매우 낮아졌다고 말한다. ‘보람이주공사’ 남이송 부장은 “요즘 자격이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서는 추세다. 특히 취업이 안 된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상당수 이민을 원하고 있지만 이들은 대개 이민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민수요는 일반적으로 경기와 반비례하는데 최근 취업난이 가중되고 직업 안정성이 저하되면서 젊은층이 이민을 많이 원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9월6~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서 열린 ‘제6회 해외이주·이민박람회’에는 1만5000여명이 참가했다. 행사를 주최한 ‘한국전람’측은 “지난 봄 박람회 때보다 50% 이상 급증했다”며 “무료 입장권 발급을 위해 사전등록을 받은 결과 참가자 대다수가 20~30대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 이민 성공자들의 연령 자체가 크게 낮아진 것은 아니다. 최근의 이민열풍을 반영하는 실제 이민 성공자들은 영주권 취득 과정이 빨라야 6개월~1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그 이후에나 통계에 잡힌다. 게다가 젊은이들에 대한 이민 장벽은 여전히 높은 게 현실이다. 이민컨설턴트 린다 윤씨는 “이민 지원자들의 연령대가 최근 들어 급격하게 낮아졌지만 이들 중 이민에 성공하는 이는 소수다”라고 말했다.
이민 성공자 비율을 봐도 아직까지는 30~40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이주개발공사’ 홍순도 사장은 “지난해 우리 회사가 이민을 컨설턴트한 세대주 가운데 30대 중반~40대 중반이 50%를 차지했고, 20대~30대 중반은 25% 정도를 차지했다”며 “이민을 원하는 젊은층이 늘어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여전히 이들이 이민에 성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캐나다 매니토바주의 기술취업이민의 경우도 20대 실업자가 이민에 성공하기는 어렵다. 한 이민업체 관계자는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외국에만 갈 수 있게 해달라며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20, 30대가 많다”며 “비숙련공 미국비자(EB-3)를 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만 실제로 20대 실업자가 이민에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는 어떤 나라가 좋은가요?” 이민 희망자들은 이민 대상국의 교육여건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젊은이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은 주로 극심한 취업난과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니 하는 유행어가 입증하는 고용불안, 경기불황, 교육문제와 지도층 인사들의 비리 등에서 기인한다. 이런 현실을 벗어나 더 안정적인 사회로 진입하려는 욕구 탓에 이민 행렬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민박람회장을 찾은 회사원 김찬연씨(34)는 어학연수차 머문 경험이 있는 캐나다를 이민지로 생각하고 있다. 학사 학력이라 이민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김씨는 “한국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성공할 수 없는 사회다. 정치 난맥상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고 온갖 부정과 비리가 판치고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내 아이만이라도 정직한 사회에서 바르게 자랐으면 한다”고 말했다.
직장상사들이 너도나도 이민을 고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민 준비에 나섰다는 회사원 정모씨(32)는 “언제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친구들은 마흔까지 직장생활하면 성공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늦게 부랴부랴 준비하는 것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준비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용’으로 영주권을 따놓으려는 심사다. 그의 부인 김모씨(29)는 “정치 부패가 싫어서 이민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결혼한 엔지니어 최하림씨(28)는 3~4년 뒤를 내다보고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최씨는 “한국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정된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며 “2세 교육을 위해서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박람회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민 갔다고 해서 모두가 그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민 갔던 이들 가운데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역이민자도 상당수 있다. 지난해 총이민자는 1만1178명. 이 가운데 역이민자는 3000여명에 달한다.
현지 적응에 실패한 이들 가운데는 가족만 현지에 남기고 자신만 돌아와 ‘반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는 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처음부터 전 가족 이민 형식을 취하면서 자신은 떠나지 않고 남는 이도 있다. 한국 생활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한 ‘보험용’으로 영주권 얻어두고 이중생활을 하는 것이다.
모 은행 김모 부장(40대 초)은 서류상으로는 4년 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계속 국내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사실이 회사측에 발각되면서 이부장은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있지만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어차피 가족들은 이민을 떠나 그곳에 적응해나가고 있고 자신은 국내에서 계속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 김부장은 직장에서 가능한 한 오래 버티며 돈을 번 뒤 퇴직하면 가족들과 합류할 계획이다.
이민 적극 지원도 고려해야
이민자 대열에 선 젊은층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문은 크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규범이 무너지고 믿음이 실종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민지로 선택한 사회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국내의 불확실성보다는 오히려 그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젊은이들의 이민열풍은 크게 보면 정보화와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외국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점을 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며 “교육문제뿐 아니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며칠 사이에 집값이 수천만원씩 오르며 부동산대책이 발표되자마자 집값이 1억원씩 떨어지는 비정상적 사회구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의 이민열풍이 지적하는 우리 사회의 맹점 가운데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이 의식과 구조이다. 조성남 이화여대 교수(사회학)는 “우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의미 있다면 그 대가를 보장해주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며 “그래야 불법이 판치지 않고 상대적 박탈감이 줄어들며, 사회 전체에 팽배한 불신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거나 자신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운 사회를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조대엽 교수는 “우리 사회가 근대화 과정을 건너뛰고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느라 민주화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다”며 “질서 있고 안정감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질서와 제도를 존중하는 문화적 가치관을 함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에 대한 불신의 결과로 생겨난 이민 행렬을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힘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 그들이 한번 떠나면 영구히 우리 사회와 담쌓고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외로운 외국생활 속에서 더 애국심이 커져 오히려 한국사회에 기여할 가능성도 높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젊은 이민 행렬’을 한꺼번에 줄일 수 없다면 기왕 떠나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적극 지원하는 게 오히려 우리 사회에 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