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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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떼어놓은 ‘우주거인’

땅속에서 솟아 나와 어깨로 하늘 받들어 … 지진·홍수는 거인이 기운 쓸 때 생기는 현상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3-09-18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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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땅 떼어놓은 ‘우주거인’

    땅속에서 우뚝 솟아 올라온 이름 없는 우주거인.

    우리는 울산 반구대의 바위그림에서 고래의 신화를 읽었고, 천전리 바위그림에서 우주뱀의 신화를 보았다. 특히 우주뱀을 통해서 천전리 바위그림이 우리 상고대의 선조들이 외계충격 시대의 생생한 체험을 바위에 새긴 천지개벽 신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 ‘아비’ 땅 ‘어미’ 꼬옥 껴안고

    반구대, 천전리 바위그림 신화에서만이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하늘땅 신화’의 텍스트를 통해서도 우리는 외계충격의 현상들과 신의 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창세신화는 우주거인의 등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 세상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지금처럼 하늘과 땅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때는 하늘이 아비이고 땅이 어미였는데 하늘과 땅이 매순간 꼭 껴안고 있는 바람에 계속 자식을 낳게 되었다.



    하늘과 땅은 곰, 호랑이를 비롯한 온갖 들짐승 날짐승과 함께 사람도 낳아 사람들과 짐승들이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아비와 어미가 붙어 있으면서 계속 자식들을 낳는 바람에 곰이나 호랑이 등 짐승과 사람들이 머리가 하늘에 부딪혀서 도저히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결국 짐승과 사람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좁은 틈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거의 기어다니다시피 하며 살아야 했다.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하늘이 아버지이고 땅이 어머니이며, 둘이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아니하여 자식들을 계속 낳았다는 발상이 그리스 신화와 똑같다. 우리 신화의 ‘아비’는 그리스 신화의 ‘우라노스’이며 ‘어미’는 ‘가이아’ 여신이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거인족, 티탄 12남매와 외눈박이 3형제, 백수거인 3형제를 낳는다. 땅의 신과 하늘의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이들 신들의 계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호머와 로마시대의 시인들이 만들면서부터이므로, 우리 신화가 더욱 ‘원형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신화는 시인들이 새롭게 쓴 것이 아니라 민중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화의 ‘아비’와 ‘어미’는 그리스 신화의 우라노스와 가이아와는 달리 신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온갖 들짐승 날짐승과 함께 사람을 낳았다.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마디 하자. 신화는 시작부터 ‘엽기’가 아닐 수 없다. 수십억년 동안 서로 붙어 있으면서 계속 자식을 낳았다는 말 아닌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누가? 서로 붙어 있는 아비와 어미가? 아니다. 하늘과 땅이 붙어 있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그 틈새에서 기어다니는 짐승들과 사람들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상황에서 숨이라도 제대로 쉬었을까? 그럼에도 우리 신화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진술한다. 딱 두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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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이야기다. 외계충격의 체험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우레’와 ‘시퍼런 번갯불’은 다름 아닌 천전리 바위그림에 수없이 그려져 있는 마름모꼴 우레와 번개무늬의 그림문자들을 말로써 표현한 것 아닌가?

    하늘과 땅 떼어놓은 ‘우주거인’

    하늘과 땅을 떼어내고 해와 달과 산천을 만드는 우주거인.

    꼬리별이나 떠돌이별들이 수도 없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불덩어리들이 휙휙 지나가고 불폭풍이 분다. 굉음과 함께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고 지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진다. 온갖 짐승들과 인간들이 아비규환에 빠져서 괴이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그리고 이런 천지개벽은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3500년부터 기원전 600년까지 수천년에 걸쳐서 계속된 일이다.

    그렇다. 그것은 공포다! 하늘에 대한 공포! 이 공포의 강렬한 느낌은 수천년에 걸쳐 계속되면서 날이 갈수록 증폭될 수밖에 없다. 쌓이고 쌓인 공포심이 외경심을 낳는다. 우리 신화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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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력 사용 없는 ‘민중의 신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숨을 죽였다. 드디어 천지개벽 최고의 신이 출현할 차례다.

    이때 땅이 꿈틀거리면서 커다란 산봉우리 같은 것이 땅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산봉우리가 아니었다. 아주 힘이 세고 몸집이 큰 우주거인이었다.

    땅속에서 솟아 나온 거인은 끙끙거리면서 하늘을 한쪽 어깨에 떠메더니 하늘을 높이높이 쳐들었다.

    이때부터 하늘과 땅은 서로 떨어졌다. 사람들과 짐승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었고 비로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천지개벽이 왜 일어났는가? 땅속에서 큰 거인이 솟구쳐 올라왔다는 것만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우주거인이 한번 크게 움직인 것이다.

    우리 신화에서나 그리스 신화에서나 거인신이 하늘과 땅을 떼내는 것은 천지개벽의 대재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거인신의 신격이 다른 만큼 방법도 서로 다르다. 우리 신화의 거인신은 땅을 누르고 하늘을 높이 쳐들어서 ‘아비’와 ‘어미’를 떼내고 자식들을 더 못 낳게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이아 여신이 외눈박이 거인 3형제나 백수거인 3형제와 같은 망나니 자식들을 더 이상 낳고 싶지 않아서 거인 12남매 중 막내인 크로노스로 하여금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버리게 한다.

    하늘과 땅을 떼어놓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한쪽은 하늘을 번쩍 들어 어깨로 떠받치고 영원토록 서 있는다. 자신을 희생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우주거인이다. 다른 한쪽은 아비의 성기를 잘라버림으로써 신의 주도권을 빼앗고 세상을 지배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 신화와 그리스 신화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한쪽은 민중의 신화를 대표하고 다른 한쪽은 지배자의 신화를 대표한다. 한쪽은 세상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권력의 승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하늘과 땅 떼어놓은 ‘우주거인’

    울산 반구대와 천전리 바위에는 고래, 탈, 무당,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다.

    ‘사람들과 짐승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던 외계충격이 사라져 세상이 안정과 평온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크로노스가 지배하던 시대를 ‘결백과 순결의 황금시대’라고도 한다. 그가 다스릴 때 인간세계에는 황금족속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늙지도 않았고 죽음을 잠드는 것으로 생각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욕심 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삶은 그야말로 축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사람들은 춤추게 되고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종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하늘에 바칠 옷과 음식을 차려놓고 무리춤을 추는 큰굿을 연상케 한다. 천전리 바위굿터의 신의 탈과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놓은 굿 그림 앞에서 신을 노래하는 무당의 굿을 연상한다. 그 큰굿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면 해피엔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거인이 힘 빠져 주저앉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떼어놓은 거인을 까마득히 잊었다. 그 거인은 여전히 한쪽 어깨로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하늘은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쪽 어깨가 너무 아팠다. 아무리 힘이 센 거인이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거인은 할 수 없이 하늘을 다른 쪽 어깨에 바꿔 메었다. 이때 거인이 기운을 쓰면서 움직이는 바람에 땅이 흔들렸다. 그래서 땅이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나고 산사태가 일어나고 홍수가 일어났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자주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는 거인이 처음으로 어깨에 하늘을 메었기 때문에 서툴러서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왼쪽 어깨에서 다시 오른쪽 어깨로 자꾸 바꿔 메었기 때문이다.

    우주거인이 하늘이 무겁다니, 이게 웬일인가? 세상에나! 거인이 어깨가 아프다고? 거인이 아파했다는 것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우스갯소리’가 되지만, 신화의 상징으로 읽으면 거인 속에 내재한 ‘자기 모순’으로 해석해낼 수 있다. 왜 아팠을까? 앞 단락의 내용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거인을 까마득히 잊었다. 이 신화의 구술자는 “거인의 어깨가 아팠다”고 진술하면서 은근히 “사람들이 잊어버려서”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신화 말미에 “하늘이 떨어지지 않게 거인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특별히 당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인간이 거인신을 내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거인신은 단지 어깨가 아파서 하늘을 바꿔 멜 뿐이다. 그런데 지진과 홍수, 산사태 등을 일으켜서 인간세상에 ‘재앙’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진’은 지질학에서 말하는 지진이 아니다. 우주론이랄까, 혹은 신화의 상징으로서의 지진이다. 땅만 쩍쩍 갈라지는 게 아니라 하늘도 흔들리고 우레와 벼락이 함께 몰아치는 그런 지진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하늘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거인을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거인이 하늘을 메고 서 있다. 만일 이 거인이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으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크고 새빨간 태양이 뜬다.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어둠이 바위덩어리처럼 꽁꽁 굳어버릴 것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붙어서 맷돌같이 되어 회전한다. 하늘과 땅이 붙어 우레 소리를 내면서 빙빙 돌아갈 때 하늘과 땅 사이의 것은, 산이든 나무든 집이든 호랑이든 사람이든 모두 빻아져 가루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상의 모든 생물은 멸망한다.

    그 후 새로운 생물이 태어난다고 한다.

    신화는 드디어 맷돌을 매개로 해서 세상의 마지막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세상의 마지막, 지구의 멸망 혹은 인류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는 천지개벽의 이야기와 동시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종말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시작과 종말은 끝없이 돌고 돈다. 맷돌은 그렇게 돌고 도는 세상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작은 부족인 호피족은 분명히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피의 전설에서는 두 사람의 우주거인이 지구의 축을 지키고 있으며, 그들이 손을 떼면 지구의 회전이 뒤흔들려서 종말이 찾아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또 그 후에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고 전해 내려온다.

    ‘불의 태양’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세계, 즉 제4세계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호피족은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으나 우주에서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별이 출현한 뒤에 이 세계는 파멸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종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인의 시대가 가고 인간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지구환경이 안정되면서 철기시대가 도래하고, 부족연맹의 장들이 신 대신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또 다른 신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거인시대를 끝낼 수가 없다. 사람들이 잊은 것은 우주거인이 하늘과 땅을 떼어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거인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상고대인들에게서 이름을 얻었을 게 분명한 거인은 다시 ‘이름 없는 거인’이 되었다.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내려온 구전 과정에서 우리 우주거인의 이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신화는 찾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잃어버린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거인을 위해 더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여러분! 맷돌을 돌릴 때 우레 소리가 나는 까닭을 이제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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