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0일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브리핑하고 있는 이정우 실장.
이실장은 정책실장에 임명된 직후 “단 한 가지 일만 하라고 한다면 부동산을 잡는 일을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의 이런 공언은 헨리 조지에 사로잡힌 결과다. 조지는 소수가 독점한 토지가 불로소득의 온상이 되면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미국의 현실에 주목, 토지가치세의 신설을 주장한 언론인 겸 학자. 이실장은 스스로 ‘조지스트’라고 말할 정도다.
9월1일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부동산세제 강화 방안은 이실장의 이런 생각이 반영된 작품이다. 말하자면 이실장이 ‘9·1 부동산세제 강화 방안’의 산파 역을 맡은 셈. 이실장 자신도 그동안 조세 저항 등을 이유로 엄두도 내지 못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전언.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역사적 쾌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다.
장관과 실무자들 수시로 만나 의견 조율
이실장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게 주변의 평가. 이실장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재정경제부 건설교통부 행정자치부 국세청 등 관련 부처의 장관 및 청장은 물론 과장에서 국장까지 직접 만나 설득하고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정책실 관계자는 “부동산 보유세 강화 방안 문제로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을 5차례 이상 만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9·1 부동산세제 강화 방안의 핵심은 시가를 반영해 재산세를 부과하고 2006년부터는 공시지가의 50%를 적용해 부과하도록 종합토지세와 재산세의 과표를 현실화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종합토지세와 재산세의 과표는 30%대로 부동산 투기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또 현행 종합토지세와 별도로 종합부동산세를 신설, 부동산 과다 보유자들의 전체 토지에 대해 누진과세하겠다는 방안도 마련했다.
그러나 이번 방안에 대해서도 부동산 투기 억제 대책으로는 여전히 미진하다는 지적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시가 반영 방식으로 재산세를 개편하면 서울 강남의 아파트 재산세는 지금보다 60~70% 정도 오른다. 인상률이 꽤 높아 보이지만 현재의 재산세가 워낙 낮기 때문에 금액으로 따지면 불과 수십만원 인상된 수준이다. 현재처럼 한 달 새 1억원 가까이 아파트 값이 오르는 상황에서 부동산 투기 억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간사 시절인 1월13일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하는 이정우 실장(맨 왼쪽).
그렇다면 부동산세제 강화 방안으로 클린 히트를 날린 이실장은 이제 정책실장으로서 ‘소프트랜딩’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와대 안팎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미 정책실장으로서 중심을 잡았다”고 평가하는 반면 청와대 밖에서는 “출범 초에 비해 자리를 잡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학자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한다.
출범 초기 이실장이 보여준 ‘학자 티’는 한동안 관료들 입에 오르내렸다. 특히 그가 참여정부 출범 직후 연 국책연구소장들과의 간담회는 최악이었다.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던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울 듯한 대통령정책실장이 불러 나름대로 정책 제안을 연구하는 등 열심히 준비해 갔으나 이실장이 관심을 보인 것은 연구원 수가 몇 명이고,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 등이어서 황당했다”면서 “그런 초보적인 정보는 미리 파악하고 간담회에 임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현장감각 보완 가장 시급” 지적 많아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겉돌고 있다는 게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중론이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지금쯤이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는 그렇다고 해도 언론사 경제부장들과는 얘기가 통해야 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뜻에 따르려는 차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극적으로 언론인을 만나 정부 정책에 대해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직제상으로만 보면 대통령 정책실장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있다. 정치와 외교·안보를 제외한 모든 국정을 관할한다. 과거 정권에서 경제수석과 사회복지수석 등 3~4명이 하던 일을 혼자서 처리한다. 7개나 되는 국정과제 태스크포스도 챙겨야 한다. 맡고 있는 업무로만 본다면 ‘왕수석’으로 불릴 만하다.
이실장의 과중한 업무는 경제관료 출신의 권오규 정책수석이 일부 덜어주고 있다. 이실장은 각 부처의 일상적인 현안 조정은 권수석에게 과감히 일임하고, 자신은 노대통령의 국정과제와 중요한 현안만을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수면 부족에 시달릴 정도라고 한다.
정책실 관계자들은 이실장의 이런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한 정책실 관계자는 “밖에서는 ‘청와대에서 내보내야 할 사람’ 1순위로 꼽곤 하지만 이는 현재의 청와대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변호했다. 청와대가 국정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려다 보니 기대 수준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5월19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회의에 참석, 보고하는 이정우 실장(노대통령 오른쪽).
선진화 방안 마련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노조란 기본적으로 파업권을 무기로 사용자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을 전제로 한 집단이기 때문에 노조를 상대로 경영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면서 “이실장도 논의 과정에서 이 점을 충분히 인정했다”고 말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청와대 안팎에서 이실장이 합리성과 균형감각을 갖춘 선비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는 점이다. 경제부처 한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잘 보여 더 좋은 자리로 나가기 위해 경제부처를 닦달하던 과거 정부의 경제수석과 달리 장관들을 우선시하는, 사심 없는 참모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기 위해서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그의 역할이 주목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