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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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이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

국내 화장품 예술과 접목 도약 시도 … 아름다움과 새로움 추구 코드 일치 큰 의미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09-18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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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스틱’이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

    데미안 허스트(크로마틱 센세이션)의 작품

    우리나라에서 미술과 기업은 언제나 ‘낯선’ 상대였다. 오리지널리티와 순수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술과 대량생산된 상품을 파는 기업은 속성상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인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적인’ 기업이라도 순수미술 전시를 지원한다는 것은 이미 기획된 전시에 그 기업이 생산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싸게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항공사가 작품 운송 가격을 깎아주거나 전자회사에서 모니터를 빌려주는 경우 등이 대표적인 기업의 전시 ‘협찬’이나 ‘후원’에 해당한다.

    미술과 기업 모두에게 공동의 목표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 보니 ‘협찬’과 ‘후원’은 종종 전시나 작가와 상관없이 정치적 배려나 절세의 목적 등을 위해 결정되곤 한다. 요컨대 미술은 기업과 상의할 생각이 없고, 기업은 ‘협찬’한 전시가 어떤 내용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크로마틱…’ & ‘화장품은…’ 이목 집중

    그러나 지금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크로마틱 센세이션 바이 헤라’(9월30일까지·이하 크로마틱 센세이션)와 인사아트센터에서 준비중인 ‘화장품은 미디어다’(10월1~7일)는 새로운 차원에서 기업이 전시에 참여하고 ‘후원’하는 전시로 미술계 안팎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두 전시를 기획한 것은 각각 국내 최대 화장품 브랜드인 아모레퍼시픽과 색조 전문 화장품 브랜드인 클리오. 두 화장품 회사는 단순히 제품을 협찬한 것이 아니라 마케팅 부서의 태스크포스 팀에서 아예 브랜드 이미지를 전시 컨셉트로 구성하고, 작가 선정에 참여해 제작비를 지원했으며 이벤트와 홍보도 맡았다.

    ‘립스틱’이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

    임옥상(화장품은 미디어다)의 작품

    ‘헤라에 의한 색채의 향연’으로 해석될 ‘크로마틱 센세이션’전의 실무 기획을 맡은 윤현철 아모레퍼시픽의 마케팅 팀장은 “현재 국내 화장품 브랜드들의 경쟁상대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다. 이들이 대개 디자이너 이름을 갖고 다양한 영역에서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데 비해 우리나라 기업들은 화장품이란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 이 같은 브랜드의 한계를 예술을 통해 넘어서려는 게 이번 전시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 전시에는 세계 현대 미술계의 이슈메이커로 꼽히는 데미안 허스트와 안젤라 블로흐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유현미, 노상균, 오인환, 김희경, 왕기원, 강영호 등 국내외에서 가장 화려한 경력을 쌓고 있는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들의 작업은 색채를 통해 내적인 심리와 현대 소비사회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따라서 ‘크로마틱 센세이션’은 ‘화장품 브랜드 헤라가 스폰서가 되어 색채화장품을 홍보하는 전시’라는 의미와 ‘여신 헤라가 표현하는 영혼의 색채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립스틱’이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

    안젤라 블로흐(크로마틱 센세이션)(왼쪽), 서도호(에르메스코리아 수상작가전).

    전시의 공동 큐레이팅을 맡은 ㈜두아트의 도형태 부장은 “작가의 예술적 감성을 화장이란 개념과 접목시켜 ‘팔릴 수 있게’ 풀어낸 순수미술 전시”라고 설명한다.

    ‘크로마틱 센세이션’전에서 제일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빨간색의 거대한 퍼즐 조각 ‘빨간 단서(Red Clue)’의 작가 유현미씨는 “특정 화장품 브랜드를 위해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이 전시장에 들어온 관람객들이 헤라의 립스틱 조각을 상상한대도 작가로선 즐거운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안젤라 블로흐의 작품은 원래 이미지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픽셀’ 상자지만 전시장에서 색깔과 형태는 아이섀도에 대한 메타포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화장품은 미디어다’전은 화장품을 미술의 오브제와 매체로 끌어온 전시다. 즉 립스틱이나 아이섀도가 그 자체로 물감이나 대리석을 대신한 것.

    “클리오가 특히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인기 있는 화장품이기 때문에 미술 ‘아티스트’에게도 효과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길 원했어요. 올 2월부터 작가들과 매주 화장에 대해 토론을 벌인 결과 화장은 사람의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란 결론에 이르러 화장품이란 실험적 매체에 도전하게 된 거죠.”(김민성·전시기획자)

    민중작가로 꼽히는 임옥상은 클리오의 립스틱과 아이섀도를 몸통과 날개, 꽃술로 이용하여 ‘클리오 벅스’ ‘나의 입술은 꽃이다’를 만들었고, 영화감독 문승욱은 화장을 사회적으로 해석한 영상작품 ‘디 아이’를 보여준다. 여기에 젊은 작가 유림, 홍보람, 베한트가 미디어로서 ‘클리오’ 화장품을 다룬 신작을 만들었다.

    두 화장품 회사의 미술 전시가 잇따라 열리게 된 데 대해 전시기획자들이나 기업마케팅 담당자들은 ‘일과성의 우연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관람객 대상 집중적 마케팅 효과

    한 미술관의 학예실장은 “두 전시는 기업과 미술이 ‘아름다움’과 ‘새로움’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두 전시가 상당한 완성도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기업 홍보 전시와 차원이 다르다. 아직도 기업의 후원이 ‘이윤의 사회환원’이란 이름으로 은혜를 베풀 듯 이뤄지고 있지만, ‘크로마틱 센세이션’ 같은 전시를 통해 기업과 미술의 관계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솔직히 요즘 중요 업무는 작가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기업들을 미술관으로 끌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크로마틱 센세이션’ 전과 ‘화장품은 미디어다’ 전에 기업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 것은 세계적 패션하우스 에르메스 코리아가 만든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과 ‘에르메스 코리아 수상작가전’이다.

    ‘립스틱’이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

    유현미 (크로마틱 센세이션)의 ‘빨간 단서’.

    올해로 4회를 맞아 9월26일부터 11월9일까지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에르메스 코리아 수상작가전’은 젊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미술상으로, 말 많은 미술계에서 착실히 권위를 쌓아가고 있다. 올해 수상작가전에는 서도호, 양혜규, 홍승혜 세 작가가 후보로 참여한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수상작가와 전시를 상품 판매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르메스를 위해 언론 인터뷰 기회를 일부러 만들지도 않는다. 대신 회사는 공정한 심사가 이뤄지는지 세밀히 검토하여 상의 권위를 유지하고 미술계의 반응을 듣는다.”(에르메스 코리아 우현주 부장)

    에르메스 코리아는 이를 위해 매년 1억2000만원 정도의 예산을 책정한다. 한편 헤라측은 이번 전시에 1억5000만원을, 클리오측은 약 8000만원을 썼다. 대기업의 문화지원금에 비하면 큰 액수는 아니지만 얻는 효과는 훨씬 크다. 작가들로부터 가장 창의적인 개념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시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마케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크리스찬디오르 코리아가 신제품을 순수미술작가의 작품을 통해 발표한 것도 효과적인 마케팅을 위해서다.

    물론 미술과 기업의 ‘근접 조우’에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전시기획자는 “기업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관람객 수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인기작가들만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기업의 후원을 의식하는 작가는 결국 비판적이고 혁신적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을 살아 있게 한 것이 소수의 ‘사모님’ 컬렉터가 아니듯 전적으로 기업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미술과 기업의 만남이 서로에게 긍정적이 되려면 그 길은 미술과 대중의 거리를 좁혀놓기 위한 노력 어디에선가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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