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2

..

대형화 반감으로 군소은행 우후죽순 … 강도들 먹잇감(?) 풍성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입력2003-09-18 16: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대형화 반감으로 군소은행 우후죽순 … 강도들 먹잇감(?) 풍성
    젊은 영화감독들의 등용문인 미국의 ‘선댄스 영화제’는 영화 등장인물에서 이름을 따왔다. 바로 우리나라에는 ‘내일을 향해 쏴라’(사진)라는 멋진 제목으로 알려진 ‘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선댄스 역을 맡았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이 영화제의 창립자다. 실존 인물이기도 한 버치와 선댄스는 아마도 옛 서부 개척시대의 무법자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는 이들일 것이다. 실제 행적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지만 그런 인상을 확대, 증폭시킨 것은 영화에 담긴 이들의 독특한 캐릭터다.

    은행을 털고, 열차를 습격해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는데도 번번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신출귀몰함, 영웅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인지는 모르나 의적 흉내를 낸 것 하며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인도주의’적 면모까지.

    영화에서 둘은 볼리비아에서 경찰에 포위돼 비장한 최후를 맞지만 그들이 살아남아 북미로 돌아온 것으로 믿는 미국인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 영화나 다른 서부영화들을 보면서 뜬금없이 영화의 주제에서 벗어난 대목에 눈길이 갔다. 다른 게 아니라 한적한 시골마을에 은행들이 참 많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은행마다 간판이 다르다. 가령 우리처럼 국민은행 ○○지점, 기업은행 ○○지점 하는 식이 아니라 마을마다 은행 브랜드가 각각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대형 은행 없이 고만고만한 동네 은행들이 자기 지역을 기반으로 영업을 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버치와 선댄스에겐 ‘다채로운 메뉴’였을 것이다.

    이처럼 동네 은행들이 득세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건 미국 건국 초기부터 정부와 국민들이 공유한 독점이나 대형화에 대한 반감이었다. 미국 건국 초기 대통령인 제퍼슨과 해밀턴은 중앙은행이 필요한지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영국의 영란은행 같은 강력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게 해밀턴파의 주장이었지만 결국 대형화와 중앙집권화의 폐해를 들어 반대한 제퍼슨파가 승리했다.



    자연히 미국 전역에는 군소 은행들이 들어서 20세기 초 미국에는 약 3만개의 은행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은행들은 1920년대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상당수 문을 닫지만 1980년대 연쇄 도산으로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기 전까지 미국 금융망의 한 축을 이뤘다.

    은행만이 아니다. 대형화에 대한 반감은 기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숀 코너리가 독립운동을 펼치는 모로코 족장으로 나오는 ‘바람과 라이언’이라는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배경이 된 20세기 초의 미국 대통령은 테오도르 루즈벨트. 어린 딸이 당시 금융왕 JP 모건에 대해 묻자 그는 “이 시대 마지막 산적”이라고 말한다.

    당시 상황은 실제로 루즈벨트가 한창 인수·합병을 통해 대기업화하려는 금융자본에 맞서 반독점 정책을 펴던 때였다. 그의 반감은 독점 대형화를 주도하던 모건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다.

    이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풍경이다. 하지만 이제 대형화는 반감을 사기는커녕 시대적 추세가 돼버렸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고, 합병과 인수 열풍이 몇 년째 전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다. 모건을 루즈벨트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던 반독점법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비난받던 재벌체제가 언제부턴가 국제경쟁력, 한국 대표기업이라는 포장을 쓰고 대형화 논리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 최근의 조흥·신한은행 합병도 이 같은 대형화 열풍이 거센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대형·집중화가 옳으냐, 소형·분권화가 옳으냐를 놓고 경제적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어느 한쪽으로만 설명하기 힘든 게 경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형화 논리가 내세우는 효율과 생산성의 계량적 수치에 담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는 것이다. 버치와 선댄스의 골라 터는(?) 재미도 괜찮았을 듯한데….



    영화의 창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