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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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의 ‘주방 습격 사건’

요리를 취미 삼는 남성들 급증 … 지휘자 정명훈, 연예인 표인봉 이정섭씨 등 소문난 마니아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09-18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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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들의 ‘주방 습격 사건’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별장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지휘자 정명훈.

    9월1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지휘자 정명훈의 ‘팬사인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팬들 중에는 일본에서부터 날아온 열성파도 보였다. 그 전날 연주로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정명훈은 팬들이 소중하게 들고 온 책에 일일이 정성 들여 사인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들고 있는 ‘정명훈의 책’은 음악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 그 책은 정명훈이 직접 만든 음식들을 담은 요리책 ‘정명훈의 Dinner for 8’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닮아서 요리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가 요리에 소질이 있으셨죠. 요리는 내가 완벽한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리를 통해 돈을 벌거나 남의 평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니 마음 편하게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거죠. 아마 음악가가 안 되었으면 요리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요리는 내 삶의 활력소입니다.”

    좋은 남자 덕목으로 ‘요리’ 필수?

    정명훈과 같은 저명인사가 요리책을 발간한 것은 좀 뜻밖의 일일지도 모른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 떨어진다’는 남세스러운 말이 나돌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이런 말을 했다가는 ‘웬 고려 적 생각?’ 하는 눈길을 받기 십상이다. 요리는 여자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남자들에게도 즐거운 취미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또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세간의 시선 역시 달라졌다. ‘좋은 남자’의 기준이 ‘능력 있는 남자, 세상을 호령하는 남자’에서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자’로 바뀌어가면서 요리는 좋은 남자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특히 정명훈씨처럼 예술 관련 직업을 가진 전문가층에서 요리를 즐기는 남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탤런트 이정섭 류시원 김호진, 가수 이승철 이현우 장호일, 개그맨 표인봉 등은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남자들이다. 이정섭과 이현우, 류시원은 아예 요리책을 내기도 했다. 고 이주일씨는 직접 김치와 된장을 담가 먹는 수준이었다고.



    요리를 즐기는 연예인으로 손꼽히는 표인봉씨는 케이블 TV ‘푸드 채널’의 ‘원더풀 초대방’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으면서 조금씩 요리를 하게 된 경우. “내세울 만큼 잘하는 요리는 아무것도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표씨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나 후배, 친구들을 위해 부엌에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전문적인 요리는 못 만들고 산채비빔밥이나 찌개를 끓이는 정도예요. 저희 집에는 틴틴파이브나 신동엽씨 같은 개그맨 후배들이 많이 놀러 오는데 그럴 때 김치볶음밥이라도 직접 해주면 모두들 좋아하죠. 그런 광경을 보면 참 기뻐요.” 표씨는 “하지만 내 요리는 아내의 솜씨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솔직히 음식은 얻어먹는 게 더 맛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남성들의 ‘주방 습격 사건’

    탤런트 이정섭은 요리책을 낼 정도로 전문가에 가까운 요리실력을 자랑한다(왼쪽). 케이블 TV ‘푸드채널’의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개그맨 표인봉.

    화가들 가운데에서도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남성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홍익대 미술대 학장인 이두식 교수는 대표적인 요리 애호가. 국 끓이기가 특기라는 이교수는 “한국 요리는 불 조절이 중요하다. 중국 요리는 센 불에 볶거나 튀기면 되지만, 한국 요리는 센 불로 일단 가열한 후 약한 불로 뜸을 들이는 등 불 조절 과정이 맛을 좌우한다”고 말할 정도로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

    “미술의 ‘아름다울 미’와 ‘맛 미’는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화가들은 대부분 입맛이 발달해 있어서 맛있는 요리를 좋아하고 만들기도 잘 만들어요. 로트레크 같은 화가는 대단한 요리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어떻게 부엌에 들어가느냐 운운하는 것은 과거의 사고방식일 뿐이죠. 만드는 과정도 먹는 과정도 즐거운 요리를 전통적 사고방식 때문에 포기할 수야 없잖습니까?” 이교수는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해도 손맛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게 요리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남성들은 대개 30대 전후다. ‘나가서 놀기 바쁜’ 20대는 굳이 집에서 무언가를 해 먹기보다는 간편한 외식을 택한다. 또 직장인보다는 전문직 종사자, 사업가 등 시간 활용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남성들이 요리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직장인에 비해 사람을 만날 일이 많기 때문에 요리 실력은 대인관계를 넓히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직장인 중에서도 아마추어 요리사들이 적지 않다. 최영현씨(36)의 직장 동료들은 최씨네 집들이 때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손님들을 맞은 최씨가 직접 앞치마를 차려입고 모든 요리를 코스식으로 완벽하게 차려낸 것. 이날 이후로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는 “최씨네 집에 마누라를 데려가면 절대 안 되겠더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대인관계 넓히는 ‘무기’로도 사용

    “맏며느리셨던 어머님이 손맛이 좋으신 편이었어요.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면 어머님께서 하신 요리를 먹은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요리라는 일의 가치를 깨달았죠.” 대학 시절 MT 가서부터 발휘되기 시작한 그의 요리 실력은 이제 일체의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저는 경상도 집안의 종손입니다. 당연히 주위에서 ‘장손이 왜 그렇게 부엌일에 열심이냐’는 소리를 하죠. 하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요즘은 할인매장에 장을 보러 가면 장을 보는 남자들이 부쩍 많아져서 ‘동지의식’도 느껴요.” 최씨는 요리를 할 때면 반드시 장도 직접 본다. 재료를 고르는 것 또한 요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씨처럼 요리를 굳이 즐기지 않더라도 맞벌이를 하면서, 또는 혼자 살면서 요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남성들도 많다. ‘매일 사 먹을 수 없어서 조금씩 해보니까 요리도 재밌더라’는 식으로 요리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이다.

    케이블 TV인 ‘푸드 채널’의 한동철 PD는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남자를 섭외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만큼 남성 시청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라며 변화된 트렌드를 전했다.

    이 같은 시청자층의 변화 때문에 요리책이나 요리전문 TV 등에서 소개하는 레서피도 복잡한 정통요리보다는 간편하고 빠른 요리들, 예를 들면 반조리식품과 통조림 등을 이용한 간편 요리들이 많아졌다고.

    “어쩌면 진짜 주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요즘의 요리 레서피는 좀 한심할지도 몰라요. 볶음밥이나 통조림을 이용한 요리 등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간편조리 선호 경향’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합니다. 외국의 요리 프로그램은 거의가 다 남자 사회자를 쓰죠. 주5일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요리를 즐기는 남성층은 더욱 급격하게 늘어날 거라고 봅니다.” 한PD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남자의 취미가 요리라는 것은 곧 경제적인 윤택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 한 요리책 기획자는 “제대로 된 부엌을 꾸미고 요리책을 사 보며 요리를 익히는 계층은 중산층이 아니라 중상층이다”라고 말한다. 매일 해 먹는 요리가 고달프지 않고 즐거우려면 그만큼 경제적, 정신적으로 삶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점을 감안한 여성들이 요리가 취미인 남성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그는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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