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곰소항.
한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는다. 이맘때면 지나온 시간, 앞으로 맞이하게 될 시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세월의 흐름을 겪으며 저마다 살아온 만큼 보냈던 시간여행들….
새로운 시간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번쯤 변산반도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름다운 노을이 있는 바다, 그 바다를 끼고 달리는 멋진 드라이브, 유서 깊은 사찰 등 볼거리도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묵묵하게 견뎌낸 끝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겁의 시간을 거치며 겹겹이 쌓인 돌덩이들이 독특한 멋을 자아내는 채석강, 도량 곳곳에서 속 깊은 아름다움을 발하는 내소사, 오랜 시간 곰삭아 제 맛을 발휘하는 곰소항 젓갈. 이 모든 것들이 시간 앞에서 겸허함을 갖게 해준다.
부안군 진서면에 위치한 곰소는 원래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 군수물자와 농산물 반출을 위해 제방을 축조, 인공적인 육지가 되면서 만들어진 항구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북에서 군산 다음가는 큰 항구였는데 토사가 쌓이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이 떨어져 지금은 작은 포구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제방 축조그러나 곰소포구는 여전히 싱싱함을 간직하고 있다. 곰소항은 인천 소래포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젓갈 산지다. 그 명성만큼 포구를 따라 대규모 젓갈단지가 조성되어 주말이면 젓갈을 사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변산반도 남쪽에 포근히 안긴 곰소항은 황석어, 꼴뚜기, 주꾸미, 밴댕이, 전어, 새우, 소라 등 각종 잡어가 들어오자마자 즉석에서 젓갈로 가공된다. 특히 곰소염전에서 나온 천일염에 버무려 장기간 자연 숙성시키는 전통 재래식 염장법으로 만든 곰소젓갈은 인기 만점.
각종 젓갈과 회를 맛볼 수 있는 곰소항의 젓갈정식.
명란·창란·오징어·꼴뚜기·바지락·어리굴젓·아가미젓·갈치속젓 등 저마다 특유의 맛을 지닌 젓갈은 입맛 없는 겨울철, 미각을 돋우기에 그만이다. 대개 남녘 사람들은 곰삭은 갈치속젓을 좋아하는 반면 수도권 지역 사람들은 담백한 오징어젓, 창란젓 등을 좋아한다고 한다. 재료 특유의 맛을 느껴보고 싶으면 가리비로 만든 소라젓이 좋다.
곰소항은 김장철에 특히 북적거리지만 지금은 한적한 포구의 멋까지 온전히 맛볼 수 있다. 곰소포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자리한 곰소염전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철을 비켜선 염전엔 정적만이 감돌고 인적 없는 소금판 위엔 새하얀 구름만 떠다닌다. 한적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인 곳. 요즘엔 눈을 흠뻑 맞은 염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네모 반듯한 염전 샛길마다 하얀 눈이 쌓여 독특한 경계를 짓는 모습과, 눈으로 뒤덮인 소금창고들이 줄줄이 늘어선 모양새가 이국적이다.
천일염을 생산하는 곰소염전은 겨울철을 맞아 적막함을 느끼게 한다.
염전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곰소항 젓갈단지. 포구 안쪽으로 들어서면 밧줄을 엮어 만든 울타리가 아기자기한 멋을 자아내고, 포구 앞에 펼쳐진 갯벌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 또한 진풍경이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포구의 모습도 포근해 보인다. 올겨울은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려 눈 덮인 포구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아담한 포구 앞에는 방파제를 이용해 만든 항공모함 조형물이 떠 있다. 그 위에 출격 준비를 마치고 금세라도 하늘로 떠오를 듯한 모습의 미니제트기 14대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항구 끝에 자리한 세 그루의 예쁜 소나무 옆에 있는 벤치엔 겨울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는 사람들도 간간히 볼 수 있다.
☞ 곰소항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줄포 IC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710번 지방도)-줄포 방향으로 가다 처음 만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23번 국도)-보안영전사거리에서 좌회전(30번 국도)-7km 정도 들어가면 곰소항 어귀.
맛집·갈곳
| 곰소항의 맛
곰소항에는 3개월 숙성된 어리굴젓부터 2년 곰삭은 갈치속젓까지 수십 가지의 젓갈 맛을 볼 수 있다. 판매 가격은 500g 기준으로 오징어젓 6000원, 낙지·꼴뚜기·밴댕이젓 7000원, 어리굴젓·가리비젓 1만원, 명란젓 2만원, 청어알젓 1만5000원. 젓갈단지 내에선 협정가격으로 어느 집이든 값이 똑같다. 집집마다 손끝 맛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이곳의 별미는 젓갈백반(1인분 7000원선). 작은 종지에 10여 가지의 젓갈이 한 상 가득 나오는 젓갈백반은 그야말로 맛보기로 한 가지씩 집어먹는 동안 밥 한 그릇이 뚝딱 비워진다. 특히 아삭아삭한 알맹이가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청어알젓을 뜨끈한 밥과 함께 김에 싸먹으면 겨울철 별미로 그만이다.
내소사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자리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경내 어귀까지 600여m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특히 눈 오는 날 이곳을 찾으면 하얀 눈을 뒤집어쓴 전나무길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내리는 눈발에 촉촉하게 젖은 나무의 향은 더욱 싱그럽다. 향기 가득한 매력적인 산책로를 지나 안쪽에 살포시 들어앉은 대웅전은 단청이 없어 더욱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물 제291호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이 건물의 백미는 바로 꽃창살. 연꽃과 국화꽃 문양들이 대웅보전의 여덟 짝 문살에 아담한 꽃밭처럼 섬세하게 새겨져 있어 언제 가도 마음의 꽃을 담아올 수 있다. 이곳에서는 겨울산사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문의 063-583-7281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촬영지
줄포 IC에서 나오자마자 좌회전하여 2km 정도 가면 왼편으로 ‘프라하의 연인 촬영지’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입간판을 따라 3km 정도 더 들어가면 줄포자연생태공원. 넓은 갈대숲 사이에 영우(김민준)의 작업실이었던 하얀 집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내던 곳이다. 이곳에는 드라마 마지막 장면을 위해 ‘소원의 벽’으로 나오던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 있는 얀 후스 동상도 재현되어 있다. 또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꾸민 대형 바람개비가 일렬로 늘어선 모습과 손바닥을 오므려 만든 돌의자 등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세트장이 들어선 겨울 들판이 다소 썰렁하긴 하지만 곳곳에 펼쳐진 생태 갈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이색적인 맛을 안겨준다.
아울러 이곳에서 곰소를 거쳐 모항포구 끝에 자리한 언덕 위에는 드라마에서 새집이 주렁주렁 달려 있던 ‘소원의 나무’가 서 있다. 지금은 새집도 몇 개 남지 않고 나뭇잎도 다 떨어졌지만, 하얀 등대와 함께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프라하의 연인들처럼 소원의 나무에 나름대로 소원을 빌어보는 것도 좋을 듯.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