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천동 향군회관에서 저소득 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송년 잔치를 열고 있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원들과 보광훼미리마트 직원들.
3~4개월 만에 기부함이 꽉 차면 양 씨는 이를 털어 봉사단체 ‘행동하는 양심’에 기부한다. 몸으로 하는 봉사도 즐겨, 이웃 독거노인들을 돌보고, 월요일 저녁이면 영등포역 앞에서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준다. 양 씨는 “기부함을 만든 뒤부터 가게 분위기가 더 훈훈해졌다”며 “손님들과 좋은 일을 함께한다는 것이 팍팍한 삶에 다시없는 위안이 된다”고 했다.
쉽고 즐겁게, 지속적으로 나누기
몇 년 전만 해도 ‘기부’ 하면 부자들이 거금을 희사하거나 할머니들이 평생 삯바느질로 모은 돈을 대학에 쾌척하는 그림들만 연상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 달 수익의 1%를 정기 기부하고, 동창회·조기축구회 할 것 없이 기회 될 때마다 모금에 나서며, 특정 보험 들기나 상품 구입을 통해 이웃돕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힘들게 쥐어짜고 어렵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즐겁게, 일상에 밀착된 방식으로 나눔을 생활화하고 있는 것. 바야흐로 기부가 ‘누구나 당연히 지녀야 할 습관’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다.
2005년 12월23일 서울 관악구의 한 예식장에서 독거노인들을 위한 송년잔치를 마련한 김윤철 서울 관악문화원 부원장.
김 씨는 요즘도 다양한 기부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맘이 바쁘다. 2005년 7월에는 ‘나눔의 향기’란 제목의 시집을 내 1000권은 아름다운재단에, 200권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책 가져가는 이들이 기부금을 내면 좋고, 내용을 보다 나눔에 동참하게 되면 더 좋은 일 아니냐”는 것. 연말에는 가게에서 만든 화환 판매금액의 5%를 주문자 이름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서울에 사는 이복동(62) 씨 일가 역시 보기 드문 ‘기부 가족’이다. 60대인 이 씨 부부부터 생후 8개월 된 손자 승훈이까지 모두 자기 명의로 기부를 하고 있다. 이 씨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전 전남 여수의 한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사회의 큰 도움을 받은 셈이죠. 1년에 한 번씩 책과 과자를 보내주시던 후원자가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워요.”
‘서울 연탄은행’이 지탱할 수 있도록 힘쓰는 이들도 수많은 기부자와 자원봉사자들이다.
이 씨는 손자 승훈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한 기부를 통해 할아버지의 ‘고마운 기억들’을 물려받길 원한다. “어린 시절 나눔의 기억은 큰 행복이자 추억이 될 겁니다. 승훈이의 아들, 그 손자까지도 기부 습관이 쭉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어린이들에게 나눔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든든한 보험이다. 아름다운재단 등에서 나눔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나눔 교육을 실천하는 유치원, 초등학교들도 늘고 있다. 서울 길음동 웅지어린이집도 그중 하나다.
2005년 12월20일 웅지어린이집 원생 94명은 3월부터 소중히 키워온 돼지저금통 100개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어린이집 측은 “그냥 저금만 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떤 목적으로 돈을 모으는지, 그걸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밝혔다.
장기 기부자들 중에는 유난히 힘든 시절을 이겨낸 이들이 많다. 김윤철(65) 서울 관악문화원 부원장 또한 고교 1학년 때 학업을 포기해야 할 만큼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에겐 “20대에는 결혼을 하고, 30대에는 자식을 낳고, 40대에는 열심히 벌어 50부터는 남을 위해 살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주신 부모님이 계셨다. “그것이 덕을 쌓는 길이며, 내 맘이 편해야 하는 일도 더 잘된다”는 소박한 가르침이었다.
부모님 말씀대로 김 부원장은 자수성가한 뒤, 50세부터는 지역사회 봉사와 장학회 사업 등에 매달 700만~800만원의 거금을 내놓고 있다. 동아꿈나무재단에만 해도 1990년부터 무려 155회에 걸쳐 2억9430만원을 기탁했다. 김 부원장은 “운이 좋아 그만큼 써도 될 정도로 돈을 벌었다”며 “하지만 벌기만 하면 뭐 하나, 잘 쓰는 데 돈 번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달 문구점 수익의 1%를 기부하고 있는 오완금 씨.
김 부원장의 이런 통 큰 기부에 비하면 서울 공릉동에서 ‘도날드문구.com’을 운영하는 오완금(47) 씨의 기부액은 초라하기만 하다. 한 달에 5000원, 1만원. 그러나 이 정도도 오 씨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당뇨로 걷기조차 불편해지면서 할 수 없이 배달 일 없는 문구점을 하게 됐어요. 프랜차이즈로 시작했는데 그게 그만 사기여서 살기가 더 어려워졌죠.”
장사가 너무 안 돼 가게세도 못 내는 지경이지만 ‘수익 1% 기부’ 원칙만은 6년째 철저히 지키고 있다. 오 씨는 “힘든 사람 속은 힘들게 살아본 사람이 안다. 나는 아직 굶지 않으니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않게 닥친 불행을 기부와 봉사를 통해 이겨나가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전남 고흥군에서 농사를 짓는 김광부(64) 씨는 87년 생때같은 아들을 잃었다. 군대에서 사고를 당한 것. 웃음을 잃고 살던 어느 날 TV에서 1% 나눔 운동을 접했다. 아들 앞으로 나오는 연금이 생각났다. “3년 전부터 매달 아들 명의로 7만원, 내 이름으로 1만원씩 넣고 있어요. 죽은 아들도 내는데 산 아비가 가만있으면 안 되지, 허허.”
기부를 시작한 뒤 김 씨 부부의 마음은 많이 편해졌다. 김 씨는 “우리 아들은 죽어서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살았으면 더 큰일을 했을 것”이라며 “그래도 이젠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기부는 받는 이 못지않게 주는 이에게도 행복이 된다. 미국 미시건대학 사회과학연구소가 5년간 423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년에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수명이 40~60%까지 늘었다. ‘기부정보가이드’ 정선희 대표는 “기부를 하면 엔도르핀이 나온다 한다. 무엇보다 자신과 사회를 긍정하게 된다.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며, 그런 이들의 삶은 밝고 건강하다”고 말했다.
집안 경사에 기부 접목 ‘행복 뻥튀기’
결혼 축의금을 모두 기부한 박준호-최재정 씨 부부.
이영민(32), 박은하(32) 씨 부부는 아이 돌잔치 때 들어온 선물과 축의금 일부를 소외아동을 위해 기부할 생각이다. 박 씨는 “내 아이가 소중하면 다른 아이도 마찬가지”라며 “그럼에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 아이가 받은 축복을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나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난 사람들끼리 손잡고 기부에 나서는 일도 늘고 있다. 2004년 큰 인기를 끈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이하 ‘미사’) 팬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모임 ‘소임회’(주연을 맡았던 배우 소지섭과 임수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은 모두 열렬한 입양기관 후원자다.
모임 운영자인 ‘젊은느티나무’는 “‘미사’의 주인공 ‘무혁’은 친어머니와 입양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혁’은 그토록 외롭고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때문에 우리 회원들은 이 드라마의 주제를 그냥 ‘사랑’이 아닌 ‘사랑의 나눔’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소임회 회원들이 다른 ‘미사’ 인터넷 모임 회원들과 함께 ‘성가정입양원 돕기 바자회’ ‘입양아 돕기 연합 영상회’ ‘소지섭 기증품 바자회’ 등을 열어 수익금 전액을 기부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회원 중에는 매주 성가정입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울산지역 구두수선업 종사자들이 만든 ‘개미봉사회’ 회원 강주신(55) 씨는 “이웃과 손잡고 하는 봉사와 기부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는 해본 사람만이 안다”며 “나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지만 아직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