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30일 서울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통일교 창립 50주년 행사와 문선명 목사.
당시 국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에 항의하는 촛불집회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그해 4월15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노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야당 정치인들은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들어야 했다. 이 분위기는 5월1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기각 결정으로 이어졌으니, 열린우리당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창립 50주년 행사장 곳곳에는 여야 정치인과 학자, 새터민(탈북자) 등 초청된 비(非)통일교인이 적지 않았다. 문 총재는 대체로 원고에 있는 내용을 읽어갔으나 가끔씩 원고에 없는 것을 즉흥적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문 총재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라 강한 액센트의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즉흥 연설 중에서 압권은 그가 이 사투리로 토로한 다음과 같은 지적이었다.
“여기 열린우리당 의원들 있는데, 당신들 닫힌우리당 되지 마시라우야.”
“우하하하.”
그랜드볼룸이 떠나갈 듯한 박장대소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내부 행사라고는 하지만 초청된 ‘귀’와 ‘눈’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정치권엔 그와 통일교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을 텐데 저런 말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그의 언변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정치인 출신의 저명한 노(老)보수운동가, 명문 대학 총장을 지낸 노학자, 국가원수를 지낸 외국인, 그리고 다른 종교 단체의 대표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해가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냈다.
문 총재와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 총재가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사실일 듯했다. 연로한 사람이 자기 잔치에서 하는 말이기에 이들은 웃고 넘어가주는 것일까. 아니면 통일교의 교세를 의식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통일교인이거나 통일교에 가깝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일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지만 누구든 문 총재와 맞대면하면 그의 드센 위세에 눌릴 가능성이 크겠다는 느낌은 지우기 어려웠다.
‘저 정도의 카리스마와 철학이 있으니 그가 숱한 이단 시비에도 통일교를 빠르게 성장시켜 왔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교를 향한 세간의 관심 중 하나는 누가 문 총재의 뒤를 이을까 하는 것이다. 문 총재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2명이 세상을 떠나 5명이 남았는데 이 가운데 누가 후계자가 될지, 그리고 문 총재 이후의 통일교가 과연 지금과 같은 교세를 유지해나갈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통일교 안에서 이 이야기는 금기사항이다. 이유는 문 총재가 여전히 열정적으로 통일교를 이끌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1991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 호형호제하기로 한 문선명 총재.
미국 주류 사회에 성공적 편입 … 언론 사업도 ‘착착’
미국 주류 사회가 동양 문화의 급속한 침투에 급제동을 건 유사한 사례로는 인도 출신의 유명한 명상 지도자 라즈니시(1931~90) 사건이 꼽힌다. 명상이라고 하는 동양 문화를 들고 81년 미국에 들어간 라즈니시는 물질문명에 지쳐 있던 미국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미국인에게는 생경하기만 한 명상에 적잖은 젊은이들이 빠져들자 미국 사회에서는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해 미국 주류 사회는 1985년 그를 출입국위반 혐의로 기소함으로써 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었고 그 후 미국 안에서의 라즈니시 세력 성장은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그러나 통일교는 달랐다. 라즈니시 세력은 미국 주류 사회에 스며드는 데 실패했으나, 통일교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미국 보수여론을 선도하는 워싱턴 타임스지.
알다시피 워싱턴DC를 대표하는 신문은 워싱턴 포스트다. 워싱턴 포스트는 진보적인데, 워싱턴DC에는 공화당원을 비롯해 보수성향의 정치인도 적잖게 포진해 있다. 문제는 워싱턴DC에는 이들의 발언을 실어줄 매체가 없다는 것. 워싱턴 타임스는 이를 알고 적극적으로 보수 정치인들에게 발언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사설도 이들의 의견을 옹호하는 쪽으로 쓰게 되니 자연 이 신문은 워싱턴 포스트의 대척점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를 능가할 수는 없지만 워싱턴 포스트도 무시할 수 없는 언론이 된 것이다. ‘시류와 무관하게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통일교를 관류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이고 다시 기반을 확대해가는 것이 통일교의 성장 비결이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워싱턴DC에서 ‘깃대’를 꽂는 데 성공한 통일교는 이 성공을 기반으로 적절한 시기에 한국 정부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천주평화연합을 만들기 위해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알바니아를 방문해 행사를 갖고 관계자를 만난 문선명 총재 부부(위부터).
북한에서 자동차·호텔 사업 등 그들 식 통일운동
평소에는 김정일 정권의 북한 주민 인권탄압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던 신문이 ‘한국은 공산주의와 맞서고 있는 최전방 국가다. 따라서 한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치고 나오자 워싱턴DC의 보수 정치인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그들과 성향이 다른 한국 대통령을 환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통일교에 대한 한국 정치권의 인식도 서서히 변화하게 되었다.
통일교식 ‘마이 웨이’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둔 방식이기도 하다. 1980년대 대학가는 주사(NL)파와 민중민주주의(PD)를 따르는 좌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통일교는 각 대학에 조직된 원리연구회를 동원해 승공운동을 펼쳤다. 이념 대립이 첨예하던 시절 ‘보수꼴통’을 자처하고 나선 것. 그런데 이 조직의 수장인 문 총재는 91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12가지 사항에 합의하고, 호형호제하며 돌아왔다.
원조 주사(主思)와 승공(勝共)의 대부가 형제가 되기로 한 것은 참으로 해석하기 곤란한 사건인데, 아무튼 이 일을 계기로 통일교는 북한을 아주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북 파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데는 통일교 측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통일교는 지금도 북한에서 평화자동차사와 보통강 호텔 등을 운영하며 그들 식 통일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교가 최근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세계적인 평화운동 조직인 천주(天宙)평화연합을 만들어 문 총재가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 120개 도시를 돌고 있는 것. 한국 내 통일교 조직을 이끌고 있는 곽정환 통일그룹 재단 이사장은 통일교의 정식명칭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인 것을 강조하며 “지상에는 가정연합이 있으니 우주에는 천주연합이 있어야 하고, 이 둘을 결합시켜야 세계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말로 천주평화연합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통일교 측은 천주평화연합을 만드는 운동이 2005년 9월12일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날 문 총재가 미국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천주평화연합 창설식을 하고 이어 미국 12개 도시에서 같은 행사를 연 것이 그 시작이라는 것. 그러나 이 운동은 그 이전에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2004년 6월 국내 언론은 워싱턴 포스트를 인용해 그해 3월 문선명 총재가 미국 워싱턴DC의 상원(上院)빌딩에서 ‘평화의 왕’ 대관식을 행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대니 데이비스 하원의원(민주·일리노이주)이 흰 장갑을 끼고 문 총재 부부에게 평화의 왕관을 전달했고, 문 총재는 연설에서 “5대 종교의 창시자와 영적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지도자인 마르크스와 레닌,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도 내 가르침에서 힘을 얻고 마음을 바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보도는 코믹하게 읽혔지만 통일교 측에서는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는 대사건이었다.
이 행사가 있기 전인 2003년 12월22일 통일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모시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 두 행사는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예수가 이루지 못한 세계 평화의 꿈을 문 총재가 이루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통일교 측은 지금 일어나는 분쟁의 원인을 종교에서 찾고 있다. 미국이 벌이고 있는 이라크 전쟁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시 대통령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갈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문 총재 방문국마다 정상급 인사들과 만나
세계의 모든 종교는 평화를 강조하는데, 이것이 독선적 원리주의로 흐르면 타 종교를 타도하는 강력한 운동세력이 된다는 것이 통일교 측의 인식이다. 따라서 작금의 세계 갈등을 줄이려면 종교 간 장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천주평화연합 운동을 펼치게 됐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운동을 향한 문 총재의 열정이다.
2005년 9월 미국의 주요 도시 순방을 끝낸 그는 10월 한국에 들어와 12개 도시를 돌았다. 같은 기간 그의 부인 한학자 총재도 일본의 12개 도시를 돌았는데, 한일 순방을 끝낸 부부는 10월16일부터 11월28일까지 몽골을 시작으로 CIS(독립국가연합) 국가와 유럽,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 순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 하루를 쉬고 다시 대만, 필리핀을 거쳐 태평양 국가와 남미 국가 순방을 강행했다. 일부 도시는 곽정환 이사장이 방문했는데 이들이 거쳐가는 도시는 총 120개다.
관심을 끄는 것은 문 총재의 편력(遍歷)에 대한 방문국의 환대다. 그는 방문하는 나라마다 그 나라의 정상급 인사와 만났다. 2005년 11월30일 대만 타이베이(臺北)시 장제스(蔣介石)문화회관에서 열린 대만 천주평화연합 창설식에는 천수이볜(陳水扁) 총통과 함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당선된 뤼슈롄(呂秀蓮) 부총통과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국회의장)이 참석했다.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는 말라카냥 궁에서 아로요 대통령을 만나 30여분간 환담했다.
통일교 관계자들은 천주평화연합을 ‘정신적인 유엔’이라고 설명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대전쟁을 벌인 것이 제1, 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후 세계는 정치·경제적 갈등으로 인한 전쟁을 줄이기 위해 유엔을 만들었다. 그러나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갈등은 종교 갈등에 의해 일어나는 측면이 강하다. 때문에 이제는 종교 간의 장벽, 정신적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신적인 유엔을 만드는 차원에서 천주평화연합을 창설한다는 것이 통일교 측의 설명.
통일교는 이 운동의 대미를 2005년 12월27일 한국에서 장식한다. 일산 국제전시장(KINTEX)에서 민단과 총련계 등 재일동포 1만여명과 이북5도민 지도자, 영·호남 지도자 등 5만여명을 모아놓고 문 총재가 천주평화연합의 역할과 남북통일에 대해 연설한다. 다음 날에는 총련과 민단계 재일동포들이 임진각에서 평화대행진을 펼치며 자매결연을 맺는다.
천주평화연합창설을 통해 통일교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평화. 2006년 문 총재의 나이는 만 86세가 되는데 ‘86세의 청년’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야심 찬 ‘진격’을 거듭하고 있다.
통일교의 한 관계자는 문 총재가 이러한 도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절박하게 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문 총재와 통일교는 세계평화운동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 세계평화를 위한 마이 웨이에 나선 통일교의 장정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