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곤여만국전도팔폭병풍(坤輿萬國全圖八幅屛風). 이수광은 ‘곤여만국전도’를 인용해 조선에 세계 지리를 알렸다.
‘지봉유설’은 모두 20권이다. 1권은 천문·시령(時令)·재이(災異), 2권은 지리·제국(諸國), 3권은 군도(君道)·병정(兵政), 4권은 관직, 5권은 유도(儒道)·경서(經書)1이다. 6권은 경서2, 7권은 경서3·문자(文字), 8권에서 14권까지는 문장(文章)1에서 문장7까지다. 15권은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16권은 언어, 17권은 인사(人事)·잡사(雜事), 18권은 기예(技藝)·외도(外道), 19권은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食物), 20권은 훼목(卉木)·금충(禽蟲)이다. 중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중 8권에서 14권까지 모두 7권, 즉 3분의 1 이상이 문장(문학)이다. 조선이 문인의 나라였던 것을 이런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봉유설’ 이전의 한국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저작은 없었다. ‘지봉유설’은 이런 방면의 최초의 저작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책의 탄생 과정이 너무나도 흥미롭다.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독서광들은 책을 읽으면서 메모의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 또는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듯 게으름을 타고난 탓에 실천은 충동을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드물게 부지런한 독서가도 있다. 중요 부분을 옮겨 적는가 하면, 요약도 하고 비평을 곁들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메모는 더미를 이루고, 그 더미는 스스로 질서를 갖는다. 그 질서에는 독서가의 독서 취향이 자연스럽게 반영돼 있다. 어느 날 메모를 뒤적이면, 자연적으로 생겨난 그 질서는 이제 독서가에게 독서와 메모의 방향을 권유한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메모는 쌓이고, 산이 된 메모는 자연히 책으로 변신한다. 성실한 독서의 결과는 새로운 저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봉유설’이 이런 과정을 거쳤으리라 상상한다. 따라서 ‘지봉유설’은 특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지봉의 독서와 메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그 독서와 메모는 너무나 광범위하다.
등장인물만 2265명 방대한 내용
이수광은 1614년 52세 때 이 책을 탈고한다. 자신이 작성한 범례에 의하면, 이 책은 3435조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등장하는 인명은 2265명에 달한다. 방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인용한 서적의 저작자는 무려 348명이다. 생각해보라. 348명의 저작자가 얼마나 거창한 규모인지는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왼쪽)과 지봉유설을 쓰는 데 인용한 ‘오학편’.
궁금한 것은 이수광이 이런 지식을 얻은 경로다. ‘지봉유설’은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으로도 유명한데, 해당 부분을 읽어보자.
구라파국(歐羅巴國)은 일명 대서국(大西國)이라고도 한다. 이마두(利瑪竇·마테오 리치)란 사람이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바닷길 8만 리를 8년을 항해한 끝에 동월(東)에 도착해 거기서 10여 년을 살았다. 그의 저술 ‘천주실의’ 2권은 첫머리에 천주(天主)가 천지를 창조하고 안양(安養)을 주재하는 도리에 대해 논하고, 그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여 금수와 크게 다름을 논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육도(六道)를 윤회한다는 설의 오류와 천당과 지옥이 선악의 과보(果報)임을 논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사람의 본성은 본디 선함과 천주를 공경히 섬기는 뜻을 논하였다. 그에 의하면 구라파의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고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후손이 없고 어진 이를 선택하여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며, 또 그 풍속은 우의(友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는 또 ‘중우론(重友論)’이라는 책을 지었다고 한다. 초횡(焦)은 “서역(西域)의 이군(利君·마테오 리치)이 ‘벗이란 제2의 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속이담(續耳譚)’에 보인다.
이것이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 기독교, 교황 등 서양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한국 학계의 통설은 이 기록에 등장하는 ‘천주실의’와 ‘중우론’ 등의 서적을 이수광이 직접 수입해 본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믿기 어렵다. 위의 인용 끝에 자세한 내용은 ‘속이담’이라는 책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수광은 ‘속이담’을 축약해 실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봉유설’ 19권 복용부(服用部)의 ‘금보(金寶)’란 조목에서 다시 ‘속이담’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마테오 리치가 8년을 항해하여 중국에 왔고, 올 때 가지고 온 물건 중 가장 기이한 것이 자명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수광의 ‘천주실의’와 ‘중우론’은 그가 구입해 읽은 것이 아니라 ‘속이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안 것일 따름이다. ‘속이담’은 명(明)의 유변(劉)이 지은 책이라 하지만, 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앞의 동남아시아 제국에 관한 그의 기록 역시 다른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는 동남아시아 제국에 대한 정보는 ‘오학편(吾學編)’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바, ‘오학편’은 명나라 사람 정효(鄭曉)의 1599년 저작이다.
서양 이야기가 나왔으니, 약간 첨가하자. 이수광이 1603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파견됐다가 돌아온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 두 사람은 6폭짜리 세계지도를 홍문관으로 보낸다.
원래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은 베이징에서 서적을 구입할 경우 통상 2부를 구입해 1부는 국가 도서관인 홍문관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1부를 구입해도 국가에 소용이 닿는 것은 역시 홍문관에 기증했다. 이때 홍문관에 기증된 세계지도는 마테오 리치의 것으로 1584년 광둥에서 다시 인쇄되어 중국 지식인의 지리관에 큰 충격을 준다. 그 뒤 마테오 리치로 인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이지조(李之藻)에 의해 1602년 베이징에서 판각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에 수장(收藏)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6폭이다. 이 지도는 이수광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 중국과 아시아, 서역에 국한돼 있던 조선인의 세계 지리관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지도는 시각적으로 서양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최초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수광의 가족묘. 맨 위가 이수광과 부인 안동 김씨의 합장묘다.
3차례 사행 통해 신간 서적 구입
이수광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볼 수 있었던가. 구간(舊刊)은 조선에 있을 수도 있지만 신간이라면 중국에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 유희춘(柳希春)의 장서 축적을 다루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중국의 책은 오로지 사신 편에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수광은 이런 점에서 유리했다. 그는 선조 23년(1590)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선조 30년(1597)에 진위사(進慰使)로, 광해군 3년(1611)에는 주청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가 3차례의 사행에서 서적을 구입해왔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봉유설’과 같은 형태의 책은 조선에서 최초의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최초가 아니다. 이런 저작을 유서(類書)라고 하는 바, 유서는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유사한 내용을 분류해 묶은 책을 뜻한다. 당(唐)나라 구양순(歐陽詢)의 ‘예문유취(藝文類聚)’, 송(宋)나라 축목(祝穆)의 ‘사문유취(事文類聚)’가 모두 그런 예다. 그리고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완성된 1만 권이란 무시무시한 규모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도 빠질 수 없다. 조선에서는 드디어 17세기 초반 이수광에 의해 최초의 유서가 탄생했던 것이다.
‘지봉유설’은 학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이수광이 살았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지식인의 최대 관심사는 성리학 연구였다. 퇴계(退溪)가 1543년 ‘주자대전’을 정밀하게 읽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된 성리학 연구는 율곡(栗谷)에 이르러 경전과 성리학 이외의 서적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지식 탐구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학문의 편협화를 두고 급기야 장유(張維, 1587~1638)가 “조선에서는 오로지 성리학만 공부할 뿐 다른 학문이 있는 줄을 모른다”고 탄식했음은 전에 언급한 바 있다.
‘지봉유설’은 이런 점에서 빛을 발한다. 성리학이 성(性)과 리(理), 기(氣)와 같은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를 도구로 삼아 오직 관념의 조작에 몰두한다면, ‘지봉유설’은 지시대상이 분명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과 ‘리’와 ‘기’를 가지고 아무리 사고한들, ‘곤여만국전도’에 나타난 서양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봉유설’의 세계는 성리학과는 대척적 공간에 놓인 지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재래의 해석은 ‘지봉유설’을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나온 실학의 비조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이 책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지식 문화의 축적에서 나온 것으로 성리학과는 다른 지식 공간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이 지식 공간에서 뒷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宋南雜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등이 탄생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지식 공간에서 최초로 탄생한 ‘지봉유설’로 조선은 좁은 틈으로나마 세계사의 변화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