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마을 식구들에게침을 놓고 있는 권기록 교수.
더듬더듬 힘겹게 “교·수·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손에 든 과자봉지를 자랑하는 정신지체 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얼싸안는 다운증후군 환자, 굽은 등을 더 굽히며 정성스럽게 인사를 하는 꼽추 환자 등으로 소쩍새마을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올해로 7년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주일에 한 번씩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의료봉사 활동을 해온 상지대 한의대 권기록 교수팀을 맞이하는 인사였다.
“교수님, 여기 아파”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환자에게 “가만히 있어요. 내가 고쳐줄게”라고 말하며 침을 놓고 한약을 처방하는 권교수는 소쩍새마을 식구들의 몸 상태를 훤히 꿰고 있다.
“일력이라는 승려 때문에 후원금이 끊어지는 등 한때 버림받았던 소쩍새마을 식구들의 처지가 가슴 아파 지금까지 50여명의 장애환자들을 지속적으로 보살펴왔어요. 그러다 보니 환자들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증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 알 수밖에요. (한 환자를 가리키며) 저 분은 정상인에 비해 노화가 두 배나 빨리 진행되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인데 치료를 받지 못했으면 아마 4년 전에 저세상에 갔을 겁니다. 여든 살 노인처럼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마흔 살입니다.”
권교수는 200여명의 장애인이 모여 사는 소쩍새마을에서 자신이 의술을 펼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마을 식구들로부터 배운다고 말했다.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이 마음의 행복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한다는 것. 또 자신과 함께 의료봉사 활동을 하는 제자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값진 임상 경험을 이곳에서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사재를 털어가며 소리 소문 없이 ‘사랑의 인술’을 베풀어온 권교수는 사실 지방 중소도시에 조용히 숨어 사는 무명의 의사가 아니다. 그는 루게릭병과 류머티즘 관절염 같은 난치 질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한방 명의다. 권교수에게 직접 치료받기 위해 캐나다, 일본의 환자들이 원주까지 찾아올 정도다.
특히 영국의 천문학자 스티븐 호킹이 앓는 병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일명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의 경우 권교수는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치료술을 선보였다. 루게릭병은 중추신경계 중 운동근육을 지배하는 신경세포들이 파괴돼 근육이 힘을 잃어가는 퇴행성 신경병증이다. 처음에는 어깨·팔·다리 등 신체 일부의 근육이 위축되기 시작해 진행이 되면 움직일 수도, 음식을 삼킬 수도 없게 되고, 급기야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다. 그간 서양의학계에서도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했던 이 병의 치료에 한방의사로서 처음 도전한 이가 바로 권교수다.
2001년 권교수가 루게릭병 환자를 대상으로 원주 상지대 부속 한방병원에서 6개월간 공개 임상연구한 과정이 국내 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이 질환 환자들은 포기했던 생명의 불꽃을 되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권교수의 말이다.
다운증후군 환자(왼쪽)와 함께한 권교수.
권교수가 루게릭병의 치료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이웃 일본에까지 전해져 올해 초 한국인 의사로는 최초로 일본인 변호사, 교수, 기업체 대표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후원회가 결성됐다. 권교수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비영리활동법인인 ‘난치병을 지원하는 모임’(www.id-support.com)이 그것이다. 수년간 만성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던 일본인 기업인 이시카와 아이코(石川愛子)가 한국으로 건너와 권교수에게 치료를 받은 뒤 그의 명성과 의료봉사활동을 일본에 알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외국인 의사를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후지TV와 산케이 신문 등 일본 언론들이 이 후원회를 소개하기도 했다. 후원회 회장인 이와하라 다케시(岩原武司) 변호사는 “권교수의 루게릭병 연구는 매년 2000명 정도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사망하고 있는 일본인 루게릭병 환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권교수가 루게릭병이나 류머티즘 관절염 등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는 전통적인 침과 한약 처방 외에 약침(藥鍼)요법과 봉독(蜂毒)요법(혹은 봉약침요법)이란 독특한 노하우가 있다. 대한약침학회 부회장이기도 한 권교수의 약침요법에 대한 설명이다.
“인체의 경혈(침을 놓는 자리)에 단순한 침이 아닌 한약 진액을 투입해 치료하는 것이 약침요법입니다. 이것은 침술과 한약 치료의 장점을 결합한 것으로 한의학의 새로운 치료법으로 부상하고 있는 의술이죠. 또 제가 15년간 독자적으로 연구해온 봉약침은 벌의 독을 추출해 치료에 사용하는 법입니다. 소쩍새마을 환자들에게는 봉약침을 많이 사용합니다.”
약침요법으로 루게릭병 치료 도전
권교수는 약침요법과 봉약침요법을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사용한 결과 몸을 옴짝달싹 못하던 환자들이 움직이는가 하면, 호흡곤란증 환자의 폐활량이 증가해 호흡능력이 증가하는 등 놀랄 만한 효과가 있었다고 밝혔다. 권교수는 “이들 요법은 루게릭병 같은 진행형 질환의 치료뿐만 아니라 말기암 환자의 통증 완화에도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말기암 환자의 경우 서양의학에서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말고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진통제마저 나중에는 효과가 없어 환자들은 심한 고통 속에서 생명을 잃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약침요법에서는 천연약물의 투입만으로 통증을 완화하는 데 큰 효과를 보인다는 게 임상실험에서 증명되었습니다.”
권교수는 약침요법의 뛰어난 효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만큼 약침요법에 대한 열정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그는 의사의 입장이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에 도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열린 자세’를 가진 의사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말기암 환자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곳인 오당한의원(원장 박치완)의 면역약침(일명 K-약침)에 대해 스스로 동물실험을 한 후 그 결과를 정식 논문으로 공개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사실 저는 한방의사이면서도 한약으로 암을 치료한다는 데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한 한의원에서 말기암 환자를 면역약침으로 고친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그 약침으로 동물실험을 해봤는데 암에 대한 저의 회의적인 시각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죠.”
K-약침의 항암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폐암과 복강암을 일으킨 동물 임상에서 약침을 투여한 실험군은 그렇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생존율이 44.74% 증가했고 면역시스템인 NK세포 활성도와 인터루킨-2 반응에서도 유의할 만한 반응이 나타났다는 것. 권교수는 “한방 약재로 이 정도 결과가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라면서 “K-약침이 기존 약침에 비해 독성이 강하다는 특성이 있으나 특이적으로 암세포에 작용해 통증을 억제하고 생존율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권교수는 또 현재 1차 임상실험에 이어 2차 임상실험을 준비중이며, K-약침의 독성은 매우 흥미로운 과제라고 밝혔다.
“저는 15년간 개인적으로 벌의 독을 연구해오면서 ‘독으로써 독을 치료하는(以毒制毒)’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직 국내에서 누구도 도전해보지 못한 분야지만 독에서 난치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또 이 분야는 우리의 한의학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겁니다.”
권교수의 냉장고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다. 벌 독에서부터 코브라 독, 전갈 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이 그의 보물 1호. 이들 독을 모으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이는 바람에 아내의 눈치를 보고 산다는 그에게서 ‘열정이 있는 연구자’라는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인술을 실천하는 의사’라는 분위기와도 묘하게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