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왓사이 수상시장을 돌아보는 관광객들.
한국전쟁 때 철원 부근의 폭찹 고지전투에서 태국군 1개 대대가 중공군 1개 사단을 격파해 유엔군으로부터 ‘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었던 용감한 남자들, 그리고 다소곳이 ‘와이’를 하는 여자들이 있는 곳, 태국에 도착했다. ‘자유의 땅’이란 뜻을 가진 태국은 100여만명에 이르는 중국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고, 각각 20만명에 달하는 일본인과 인도인이 경제의 한 축을 이룬다. 한국인은 유동인구를 포함해 1만3000여명. 지난해 태국을 찾은 관광객 1000만명 중 한국인 관광객은 65만명에 이른다. 한국인 여행사 200여개, 한국인 여행안내자 3000여명이 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73년 유학길에 잠시 들렀다가 정착
‘제너럴 삭스’ 이정우 사장.
최근 들어 태국에서는 한국인 관련 각종 범죄 사건이 늘어나 한국·태국 정부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한국에서 파견한 총경급 간부 한 사람이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에 상주하고 있다. 비자를 연장하지 않은 채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은 점도 골칫거리다. 태국한인회 전원수 회장은 “태국 교민들 중 제대로 자리잡고 사는 한국인은 전체의 5% 정도밖에 안 된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런 그가 인터뷰를 한 후 얼마 뒤 방콕의 한 호텔에서 자살을 했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었던 걸까. 이국땅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분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래도 돈 한 푼 없이 태국에 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이 적지 않다. 방콕에서 사업을 하는 이정우씨(58)가 대표적인 인물. 그는 30년째 방콕에 살며 ‘제너럴 삭스’라는 양말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직원 150여명이 일하는 양말공장 외에 2개의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세 군데 사업체의 연평균 매출이 6000만 달러. 양말공장에서 월 36만 켤레의 양말을 생산해 태국 백화점 등에 100% 판매한다. 이는 태국 양말공장 전체 생산량의 3% 수준이다.
현재 이정우씨는 부인 임재복씨(52)와 5층짜리 건물에서 단출하게 살고 있고 두 아들은 한국에 있다. 이씨는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2년 동안 교편을 잡다 1973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잠시 방콕에 들러 쉬었다 간다는 것이 그만 눌러앉게 되었다.
방콕 차오 프라야 강을 따라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배낭족의 메카 카오산 거리에 사이버 카페들이 생겨나고 있다. 남국의 대표 과일 둘리안을 파는 시장 상인(왼쪽부터).
그는 3년간 삼촌의 쇼핑센터에서 일하다 독립해 오퍼상, 잡화점 등을 해보았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 출장길에 우연히 한국양말이 유럽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양말공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한국의 양말공장을 전전하며 운영기법을 배운 뒤 78년 드디어 3명의 동업자와 함께 양말공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만에 동업관계가 깨져 다시 80년에 상가 한켠을 빌려 독자적으로 양말공장을 차렸다. 투자금액 2000달러에 직원 5명, 중고 편집기계 5대가 전부였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이씨는 “하루도 울지 않고 잠든 날이 없었다”고 말한다.
“양말공장은 양말 짜는 기계, 다리는 기계, 포장 기계 등 기계설비에 우선 투자를 해야 물건이 제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전 돈 한 푼 없이 시작했으니…. 돈을 빌리려고 방콕에 사는 한국사람들을 100명도 넘게 찾아다녔는데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한국으로 말하면 ‘어음’을 발행해 기계를 들여놓고 원자재도 사왔습니다. 또 태국의 양말 도매상들을 쫓아다니며 싸게 납품하는 조건으로 선금을 받아 쓰기도 했어요. 그게 모두 빚이었죠. 새 기계에서 새로운 패턴의 양말을 생산한 것도 아니고 고물기계로 남들이 만들던 것을 값싸게 만들다 보니 양말이 팔리지 않았어요.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하다 집에 들어가면 그날 막을 어음 걱정 때문에 눈물 반 한숨 반으로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때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더라고요.”
“태국은 창녀의 나라 오해와 편견”
이민생활 30년에 접어든 이정우씨의 소박한 사무실
그런데 3년 뒤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태국인 기술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우연히 쓰레기통 속의 양말 하나를 보게 된 것이다. 기술자가 고물 편집기계로 양말을 짜다가 잘못해서 버린 ‘이상한 디자인의 망사양말’이었다. 그것을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던 이씨는 곧바로 바이어를 찾아갔다. 결과는 대성공. 바이어들은 이씨의 공장에서 나온 최초의 신제품(?)에 반해버렸다.
행운은 잇따라 찾아왔다. 신제품이 나오면 보통 2주일 후 모방제품이 시장에 깔려 매출이 뚝 떨어지게 마련인데 ‘이상한 망사양말’은 두 달이 지나도록 경쟁상품이 나오지 않았다.
“저도 처음엔 2주만 만들고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바이어들의 주문이 폭주하는데 두 달이 지나도 모방제품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나중엔 바이어들이 편집기계를 더 늘려 물건을 많이 보내달라고 성화였어요. 그래서 3년 동안이나 그 제품을 팔았죠.”
쓰레기통에서 주운 ‘이상한 망사양말’로 기사회생한 이씨는 3년 후 빚 50만 달러를 모두 갚고 승승장구했다. 지금은 신축공장을 설립하고 사업 다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때 더 싼 임금을 찾아 방글라데시와 중국시장을 조사했던 이씨는 태국만한 노동력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눈에 태국인들이 느려 보이지만 정직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 좋아요. 한국에서 태국이 창녀의 나라로 알려진 게 안타깝습니다. 일반 가정의 처녀들은 해가 지기 전에 모두 집으로 돌아갈 만큼 정숙하고 가정교육이 엄격해요. 상류층 사람들을 만나보면 얼마나 점잖고 유식한지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예요.” 태국 생활 30년 만에 성공을 거머쥔 이정우씨가 앞으로 할 일은 한국에 태국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