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시내로 진입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이슬람 부흥주의자 테러 걱정 ‘양비론’ 등장
이런 시점에서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이라크를 지원해온 아랍국가들은 어떻게 종전 이후를 준비하고 있을까. 아랍국가들은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랍의 실리를 찾아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종전 후 미국은 새로운 중동질서란 큰 틀 속에서 패권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모든 아랍국가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질서에 편입되면서 미국식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아랍국가들은 미국의 직접 개입을 반대하고 더욱이 군사적 점령을 강력히 거부한다. 그러나 이들은 종전 후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의 발흥과 체제 전복 기도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전히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황태자는 아랍연맹회의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천명한 뒤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고, 이 문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유엔 안보리)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이라크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목적은 석유가 아니다”라며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으며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우호적이란 점을 강조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전 종전 후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이 자행할지도 모르는 테러를 경계해야 하고 이들이 체제 전복을 꾀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편 아랍연맹 외무장관회의는 미국과 영국의 침략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첫째,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헌장, 국제법, 적법성, 세계평화, 안전보장 위반이며, 아울러 이것은 국제분쟁에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세계언론에 대한 도전이다. 둘째, 미군과 영국군은 즉각 무조건적으로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하며 이라크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도덕적·법적 행동이 보장돼야 한다. 셋째, 미국이나 영국이 이라크 내부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말아야 하며 아랍국가들은 침략군들의 공격 중지와 철수를 유엔 안보리에 요구한다. 만약 유엔 안보리가 미국과 영국군의 침략행위 중단 요구를 거부한다면 아랍국가들은 임시유엔총회의 개최를 요구한다.
연합군의 바그다드 공격으로 후세인의 행방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슬람 성직자들의 태도 역시 다분히 이중적이고 양비론적이다. 이집트 아즈하르 이슬람사원의 셰이크 무함마드 사이드 탄타위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압제는 테러다”라고 후세인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사담 후세인의 사임은 많은 무슬림의 희생을 막을 것이며, 이번 전쟁은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전쟁이 아닌 만큼 빨리 종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이 이라크 국민에 대한 불의의 침략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국민들의 명예가 훼손됐고, 그들이 흘린 피는 또 다른 테러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후세인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라크 국민을 위해 세계 각처에 있는 무슬림들이 침략군을 격퇴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이라크전과 자살공격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해석한 부분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사실상 이슬람 율법의 이름으로 테러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개전 이후 지금까지 연일 이라크전쟁을 톱뉴스로 다뤄온 아랍언론들의 보도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개전 초기에는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이 ‘미국과 이라크 전쟁’ 또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었으나 지금은 ‘미국의 이라크 파괴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는 아랍언론들이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통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21세기 팍스아메리카나를 위해 조지 W 부시가 추구하는 신보수주의가 이제는 비밀이 아니다”라는 식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랍언론들은 종전 후 미국의 직접적 개입에 반대하고 대신 중립적인 입장의 유엔을 앞세우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사냥하고 있다” “종전 후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를 가져간다” “종전 후 이라크문제는 유엔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라크전이 끝난 후 이라크는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이라크 국민을 해방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했다면 이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종전 후 실질적으로 이라크 국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라크의 석유자원은 이라크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앞으로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국민이 주도하는 시민정부가 맡아야 한다” “이라크 국민은 석유를 통제할 힘이 없기 때문에 유엔이 이를 맡아야 한다”는 등이 아랍언론의 시각이다.
또 아랍언론은 종전 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직접통치는 미국과 미군에 대한 게릴라전과 자폭공격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한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좌절됐던 인티파다(봉기)가 일반화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아랍언론은 미국이 종전 후 막강한 패권을 행사하면서 미국에 우호적인 아랍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철저히 언론을 통제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아랍국가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때 파병을 결정한 한국도 대외적인 명분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북핵과 미국의 북한 공격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파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일반 아랍 국민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일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 치료와 전후복구를 위해 파병했다는 명분을 재천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아랍국가 내에 있는 한국인과, 앞으로 아랍에 진출할 한국인들에 대한 배려다. 이미 파병을 결정한 이상 부대의 명칭을 아랍어로 ‘적십자’에 상응하는 ‘히랄 아흐마르(적초생달) 부대’로 정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