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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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홍콩의 별 영화 속엔 영원히

섬세한 연기·강렬한 인상 ‘명작 10選’

  • 전찬일/ 영화평론가 jci1961@hanmail.net

    입력2003-04-10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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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간 홍콩의 별 영화 속엔 영원히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 ‘진짜 배우’라는 평을 들었던 장궈룽.

    장궈룽(張國榮·46). 그는 조국 홍콩(중국)은 물론 이국 땅 대한민국에서도 그 누구 못지않은 사랑을 받아온 스타였다. 무엇보다 연기력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과찬만은 아닌 ‘진짜 배우’였다. 그런 그가 4월1일, 마흔일곱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자살한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450억원에 달하는 유산을 애인에게 남겼다는 따위의 선정적 유서 내용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종교의 눈이 아니더라도 흔히 자살은 죄악이라고들 하는데 그저 고인의 선택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4월1일 밤 인터넷을 통해 비보를 접했을 때 처음엔 덤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밑바닥에서 일말의 안타까움이, 슬픔이 요동쳤다. 그보다 먼저 자살의 길을 선택한 커트 코베인, 김광석 등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비정전’을 비롯해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등 유작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이들은 그의 작품 속에 이미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단서 혹은 징후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의 파장은 결코 적지 않다. 20대 초반의 한 대학생은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이제 그의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돼 유감스럽다”며 “비록 나와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세대 정서를 공유한 연기파 배우인 그의 자살은 충격적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액션·멜로·코믹물까지 다양한 장르서 열연



    사회 초년생인 한 여성도 “한동안 장궈룽이란 이름을 잊고 지냈었는데 오늘 자살 소식을 듣자 예전 추억들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밀려왔다”며 이렇게 적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비정전’을 보고 막연히 영화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화 속에서 장만위(張曼玉)와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우리가 함께한 1분을 잊지 말자’고 속삭이던 그의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잊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아침에 기사를 읽고 그의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건 슬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좀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전북 정읍의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한 영화팬은 2일 저녁 “장궈룽보다 젊은 나인데 나는 왜 그보다 늙었는가? 먼저 간 그를 위해 한 잔”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내 휴대폰으로 보내왔다. 과연 무엇이 이렇듯 세대와 성을 뛰어넘어 동세대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지 궁금하다.

    그 실마리는 결국 폭과 깊이를 겸비한,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그의 연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의 연기세계를 만끽하게 할 10편의 대표작들을 연대 순으로 꼽아봤다.

    1 . 영웅본색 (1985·감독 우위선) ★★★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홍콩 누아르’의 대표작. 이젠 세계적 스타감독이 되어 있는 우위선은 여기저기서 사나이 세계의 의리와 배신, 자기희생 등의 모티브를 차용한 이 지독한 마초 액션물을 통해, 자신은 물론 주연배우인 저우룬파(周潤發)와 장궈룽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뒤이어 나올 숱한 (액션) 영화감독들에게도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에서 장궈룽은 경찰로 등장해 인상적 연기를 펼친다. 하지만 아직은 앳된 모습의 그는, 선글라스와 휘날리는 긴 외투 차림으로 쌍권총을 마구 쏘아대는 저우룬파 등의 카리스마에 가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매력을 좀더 음미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영어 제목처럼 ‘더 나은 내일’(A Better Tomorrow)을 기다려야 할 듯싶다. 그래서일까, 적잖은 이들에겐 속편 ‘영웅본색 2’(87)가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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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천녀유혼 (87·감독 칭수이퉁) ★★★☆

    ‘영웅본색’ 못지않은 아류작을 양산한 기념비적 (처녀)귀신 영화. 니콜 키드먼에 버금가는 절세의 미인 ‘왕쭈셴(王祖賢)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장궈룽은 남자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사는 요괴 섭소천(왕쭈셴 분)을 사랑하는 순진하고 착한 영채신을 열연했다. 화려한 SF(특수효과) 액션에 공포, 로맨스, 코미디 등이 총동원된 퓨전 장르 영화답게 그는 한층 진일보한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여기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여성성이 내포된 멜로 이미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하지만 왕쭈셴의 그늘에 가린 감도 없지 않다. 결국 장궈룽은 다른 배우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적 연기자’라기보다는 조화를 창조하고 유지해 나가는 ‘공존의 배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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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인지구 (88·감독 관금붕) ★★★★★

    홍콩영화가 낳은 최고의 걸작 멜로드라마 중 하나. 왕자웨이와 더불어 포스트 홍콩 뉴웨이브의 간판주자로 평가받는 관금붕의 초기 대표작이다. 홍콩 금마장 최우수여우주연상(매염방)과 촬영상, 미술상 수상이 증명하듯 1930년대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간세계와 공존하는 영혼의 세계를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그렸다. 그 점에서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를 위시해 ‘식스 센스’ ‘디 아더스’ 등의 선배격 작품인 셈이다.

    장궈룽은 30년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기생 여화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누는 부잣집 아들로 등장, 최고 수준의 멜로 연기를 구현한다. 매염방의 연기가 매혹적이어서 다소 빛이 바래긴 했지만 영화에서 감독의 계급적ㆍ성적ㆍ현실정치적 문제의식을 읽어내는 재미도 여간 쏠쏠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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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비정전 (90·감독 왕자웨이) ★★★★★

    신화의 반열에까지 오른 홍콩영화의, 왕자웨이의, 그리고 장궈룽의 대표작 중 대표작.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참패한 ‘저주받은 걸작’이다. 1960년 4월16일로부터 1년 동안 홍콩과 필리핀을 무대로 다섯 중심인물의 줄곧 엇갈리는 사랑을 블루톤의 미장센과 이국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지독히도 쓸쓸하고 허무하게 묘사한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직전 연예계에 대한 회의로 은퇴를 감행했던 장궈룽은 1분을 영원시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생모를 찾아 방황하는 바람둥이 아비 역을 통해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의 연기에는 그러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극단의 고독감과 허무함,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민다. 이 걸작에서만은 예외적으로 그는 장만위·류더화(劉德華)·류가령·장학우 등 여타 출연진의 연기를 압도하는 생애 최고의 열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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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백발마녀전 (93·감독 우인태) ★★★☆

    ‘천녀유혼’ 시리즈에 이은 또 하나의 환상적 무협 멜로물. 왕쭈셴과는 또 다른 임청하 특유의 섹스 어필이 단연 돋보인다. 임-장 투톱의 연기 앙상블 역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중성적 이미지가 감도는 두 스타가 벌이는 러브신은 내가 본 홍콩영화 중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터. 영화에서 장궈룽은 무술의 최고수로서 전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남성적 이미지를 선보이는데, 그것은 ‘동사서독’(94)에서도 재현된다. 그 속에서 ‘동사서독’은 물론 장이모의 ‘영웅’에 등장할 탐미적 이미지들을 발견, 음미하는 재미도 제법 클 듯. 주제 면에서 ‘인지구’와 일맥상통하는 점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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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패왕별희 (93·천 카이거) ★★★★☆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와 공동으로 9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사에 우뚝 선 걸작 시대극. 천 카이거라는 이름과 함께 이른바 ‘중국 제5세대’라는 용어를 세계적으로 통용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때까진 아시아의 스타에 머물렀던 장궈룽이 세계적 배우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이 영화에서 장궈룽은 여장남자 경극배우 데이로 분해 감독적인 동성애 연기를 펼쳤다. 그는 천감독, 궁리 등과 함께한 ‘풍월’(96)에서도 ‘패왕별희’ 못지않은 성숙하고 매혹적인 열연을 펼친다.

    7. 금지옥엽 (94·진가신) ★★★☆

    ‘첨밀밀’(96)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진가신 감독의 수작 로맨틱 코미디. 남장여자 임자영(원영의 분)을 축으로 인기 작곡가 샘(장궈룽 분)과 로즈(유가령 분) 사이의 삼각관계(?)를 코믹하면서도 진중하게 묘사했다. 장궈룽은 이 영화에서 페이소스 짙은 코믹 연기를 멋들어지게 구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연예계의 화려함 속에서 끊임없이 평범함을 추구하는 샘이라는 캐릭터가 장궈룽의 페르소나를 투영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지점에서 그의 자살 모티브를 찾아낼 수도 있다. “마음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感情所困無心戀世)”는 유서의 한 구절과 연관지어 말이다. 사랑하면서도 자영이 남자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샘의 진술이 심히 ‘보수적’으로 비치기도 하나, “남자든 여자든 난 널 사랑한다”는 최후의 선언이 더 길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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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동사서독 (94·왕자웨이) ★★★★

    왕자웨이가 장궈룽을 비롯해 양가휘, 장만위, 량차오웨이(梁朝偉), 임청하, 유가령, 장학우, 양채니에 이르는 화려한 배우들을 대거 동원해 완성한 무협 멜로 액션물이란 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화제작. 8명의 캐릭터가 얽히고 설키는 복잡한 플롯도 그렇지만, 베니스 영화제 최우수촬영상 수상에서 알 수 있듯 왕자웨이 특유의 탐미적 영상미가 보는 이의 호흡을 가쁘게 한다.

    장궈룽은 여기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멋쟁이 연기를 선보인다. 개봉 당시 과잉 스타일로 인해 적잖은 비판을 받았으나 ‘영웅’과 비교해보면 그다지 과잉이라 하기 어려울 듯. 김성수 감독의 ‘무사’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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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해피 투게더 (97·왕자웨이) ★★★★☆

    단지 동성애를 솔직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국내 수입이 금지되는 등 수난을 겪은, 제50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재회에 관한’ ‘어긋난 사랑’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장궈룽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고 과감한 동성애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 점에서 영화는 양성애자였던 장궈룽이 커밍아웃하는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영화 속 세 연인 아휘(량차오웨이 분)와 보영(장궈룽 분), 장(장진 분)이 각각 중국과 홍콩, 대만 출신이란 점에서 영화를 세 중국에 대한 메타포로 읽을 수도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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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색정남녀 (99·이동승) ★★★

    제47회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제목이 시사하듯 장궈룽 출연작 중 가장 ‘야한’ 작품. 특히 장궈룽과 막문위가 벌이는 도입부의 정사 장면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야한 성애물쯤으로 생각하지는 말 것. 3류 에로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애환을 적나라하지만, 때론 코믹하고 때론 구슬프게 그린 문제작이니까. 여러모로 박중훈, 송윤아 주연의 ‘불후의 명작’과 비교된다.(제목 옆 ★은 평점으로 ★★★★★가 만점, ☆은 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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