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에서 삼청터널을 지나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따라 오르면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고급 주택가가 나타난다. 고급 승용차가 ‘주인’을 실어 나를 뿐 오가는 사람이 없어 도로는 너무나 한적하다. 어른 키 2~3배는 됨직한 담장엔 경비업체가 설치한 도난경보 장치가 반짝인다. 경보장치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골목 골목마다 사설 경비원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4월4일 오후 서울 성북동 주택가의 풍경이다. 성북동은 ‘권력’과 ‘부자’가 모여 사는 ‘부자동네’ ‘권력동네’의 효시다. 한국의 ‘부촌’은 1970년대 재벌과 부유층이 등장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성북동의 ‘주류’도 물론 재벌이다. 구자경 LG 명예회장,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신용호 교보생명 명예회장 등 창업주와 박용오 두산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사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등이 성북동에 터를 잡았다.
70년대 재벌 등장 성북동에 ‘부촌’ 형성
성북동 중에서도 ‘부자동네’는 성북2동 3통, 6통을 가리킨다. 서울의 일반적인 ‘동(洞)’ 면적보다 3배 이상 넓지만 겨우 450여 가구가 거주한다. 땅값은 평당 500만~800만원 선에 불과(?)하지만 건축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매매가격을 단순 추산하기는 어렵다. 대주주 지분정보 제공업체 ‘미디어에퀴터블’(www.equitables.co.kr)에 따르면 성북동 부자들의 주식 시가총액은 9000억원을 넘어선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성북동은 ‘부촌’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자동네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양택식 서울시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부터다. ‘권력’이 모인 곳엔 으레 돈이 모이는 법. 정·관계 인사들의 뒤를 이어 재벌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성북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동네’로 성장한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에서 ‘동빙고동 도둑촌’의 탐관오리와 졸부를 빗대어 꼬집던 시절이다.
성북동에 자리잡은 포스코 영빈관 ‘영광원’은 포스코 유상부 회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아들 홍걸씨가 ‘은밀한 만남’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도 정·관계 인사나 외국의 주요인사들과 회동하는 장소로 현대의 성북동 영빈관을 이용했다고 한다. 권력과 재벌이 만나 성장한 성북동의 과거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해방 당시 8개 구에 인구 90만명에 지나지 않았던 서울은 50여년간 경제개발로 인구가 집중하고 경기도 일원을 집어삼키며 25개 자치구, 인구 1100만명의 도시로 성장했다. 이런 성장 과정에서 성북동 같은 부촌이 등장했고, 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은 자치구 간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켰다. 더 나아가 최근엔 특정 동으로의 권력과 부의 집중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의 대표적인 권력동네 부자동네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동네는 용산구 한남동이다. 한남동이 ‘부촌 중의 부촌’으로 대접받는 것은 삼성가 오너들이 대거 살고 있기 때문. 이건희 회장은 하얏트호텔 아래쪽에 자리한 150평 규모의 2층 저택에 아들 재용씨(삼성전자 상무보) 가족과 함께 거주한다. 한남동 삼성생명 사옥 주변엔 상당수의 삼성가 오너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언론 노출을 몹시 꺼리는 이회장이 언론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곳도 한남동에 자리잡은 삼성 영빈관 ‘승지원’이다. 승지원에서 이회장은 국내 대기업 총수와 회동하거나 외국 주요인사 면담, 계열사 사장단 회의 등을 연다.
이회장 집을 중심으로 한남동엔 200여 가구의 고급주택이 늘어서 있다. 보통은 대지가 200~400평에 이르는 대가(大家)들이다. 구본무 회장은 80평형대의 단층양옥에 살고 있는데, 다른 집들보다 오히려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지역 부동산업자들에 따르면 한남동 주택의 시세는 평당 1500만원 이상이라고 한다. 이회장 구회장 외에도 한남동엔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신격호 롯데 회장, 박삼구 금호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35명의 재벌들이 이회장과 이웃해 살고 있다. 미디어에퀴터블에 따르면 한남동 재벌들의 주식 시가총액을 모두 합하면 2조4000억원 규모로 단일 동으로는 전국 최고다.
강북지역의 대표적 ‘부자동네’가 성북동 한남동이라면 종로구 평창동 구기동은 강북지역 최고의 ‘권력동네’다. 평창동사무소(법정동인 구기동은 행정동으로는 평창동에 속해 있다)에 따르면 평창동의 인구는 1만9000여명이다. 그중 약 10%인 700가구 가량이 풍치가 좋은 산자락에 터를 잡아 부촌을 형성하고 있다.
박준규 전 국회의장, 정몽준 김기춘 박종웅 현승일 의원, 박세직 최재욱 박재홍 금진호 국창근 전 의원 등 전·현직 의원 20여명과 이광재 청와대상황실장, 최기문 경찰총장, 이규효 전 건설부 장관, 김종인 전 청와대경제수석 등 상당수 전·현직 관료들이 평창동과 구기동 인근에 거주한다. 재벌들은 다른 부자동네에 비해 많지 않은 편으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비롯해 한진 롯데 등의 대기업 오너 가족이 평창동에 터를 잡았다.
국무총리 3명 배출 동부이촌동 ‘관운’ 좋기로 유명
정치인들은 아파트보다는 주택이나 빌라를 선호한다고 한다. 손님 맞이와 보안유지에 주택과 빌라가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평창동 구기동엔 특히 단독주택처럼 지은 주택 여러 채를 묶어 담을 둘러놓고 경비를 공동으로 세우는 속칭 ‘타운 하우스’가 많다. 정치인들이 이곳을 선호하는 것은 ‘권력의 핵’인 청와대와 가까워 권력의 ‘부심’ 노릇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데다 내부순환도로-서강대교를 통할 경우 국회의사당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창동 구기동의 ‘권력’이 가장 막강했던 때는 문민정부 시절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까운 곳에서 보좌한다며 권력 실세들이 모여든 것. 가장 먼저 최형우 전 의원이 성산동 집을 팔고 100여평 규모의 고급주택으로 옮겨왔다. 이어 서석재 전 의원, 이원종 전 청와대정무수석 등이 평창동에 터를 잡는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반포에서 구기동으로 이사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이른바 실세 인사들 중 상당수가 평창동 구기동에 몰려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평창동에 입성한 권력가들의 상당수가 불운을 겪었다. 최 전 의원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서 전 의원은 설화로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치적으로 좌절을 겪었다. ‘소통령’으로 위세를 떨치던 현철씨는 한보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지난해 대선에선 정몽준 의원이 ‘부적절한’ 처신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에선 ‘평창동 지세가 정치인들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김윤환 전 의원은 “평창동으로는 절대 이사하지 말라”고 권하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철씨는 “우리집은 평창동이 아니라 구기동이다. (지세가) 좋지 않더라도 정면돌파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창동에 9년 동안 거주한 민주당 권노갑 전 최고의원도 이곳에서 부침을 겪었다. 숙원이던 정권교체는 이뤘지만 한보사건으로 수감됐으며 당내에서 사퇴압력을 받는 등 우울한 시절을 보냈다. 권 전 최고위원이 평창동 집을 팔고 2001년 용산구 동부이촌동(서빙고동)으로 옮길 때도 “액운을 떼기 위해 평창동을 떠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권 전 최고위원이 ‘발복을 위해’(?) 둥지를 튼 동부이촌동은 강북에 자리잡은 아파트 밀집지로는 유일하게 ‘부자동네’로 분류되는 곳이다. 동부이촌동은 강변북로를 따라 늘어선 아파트촌으로 도심에서 가깝고 발코니를 통해 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평당 1000만원 선을 훌쩍 넘는다. 최근 새로 분양된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2600만원에 이르기도 했다.
동부이촌동은 특히 ‘관운’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노신영 김정렬 황인성 전 총리 등 지금까지 3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해 단일 동으로는 ‘재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권 전 최고의원이 이런 점까지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권 전 최고위원이 거주하는 신동아아파트는 행정구역상으로 관운이 좋은 동부이촌동이 아니라 서빙고동에 속한다.
동부이촌동은 서초구 방배동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모여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코미디언 이경실씨가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한 곳도 바로 동부이촌동이다. 이 밖에 왕년의 은막스타 김지미씨, 최근 종영된 드라마 ‘올인’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송혜교씨 등이 동부이촌동 주민이다.
성북동 한남동 평창동 동부이촌동이 전통 부촌이라면 강남지역 일대엔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부촌들이 자리잡고 있다. 80년대 초 성북동 한남동 평창동으로 상징되던 ‘부촌’은 강북에 뿌리를 남겨두고 강남지역으로 이동한다. 서울시립대 김창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70년대 상류계층(파워엘리트)은 종로구 용산구 중구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그러나 이후 강남지역의 대규모 토지구획사업과 택지개발사업, 도심규제정책 등으로 인해 도심의 파워엘리트 수는 빠르게 줄어든다. 압구정동 논현동 방배동 등이 부와 권력이 모여들어 부자동네 권력동네로 거듭난 것도 이 무렵이다.
新 ‘파워엘리트’ 강남지역 3개구 대거 거주
‘강남’이라고 불리는 강남·서초·송파구 등 3개 자치구의 인구는 160만명으로 서울시민 7명 중 1명이 거주할 뿐이다. 그러나 김교수에 따르면 서울시내에 거주하는 파워엘리트(4급 이상 공무원, 정치인, 교수, 임원급 이상 금융인, 법조인, 차장급 이상 언론인, 과장급 이상 전문의, 저명한 문화예술인)의 절반(48%)이 강남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다.
강남 3구에는 법조인의 61.3%, 의료인의 56.4%, 기업인의 54.0%, 금융인의 52.8%, 공무원의 50.2%, 언론인의 36.2%가 거주한다. 법조계 인사를 보면 집중도를 쉽게 알 수 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강남구 삼성동) 송광수 검찰총장(강남구 압구정동) 정상명 법무차관(강남구 도곡동) 정홍원 법무연수원장(서초구 반포4동) 이기배 공안부장(송파구 방이동) 등 법무부와 검찰의 주요인사들이 모두 강남 3구에 거주하고 있다. 신건 국정원장(강남구 도곡동) 박순용(강남구 압구정동) 신승남 전 검찰총장(서초구 반포동) 신광옥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서초구 서초동) 등 고위직을 지낸 법조계 인사들도 대부분 강남지역 3개구에 거주한다.
강남구의 대표적인 부자동네인 서초구 방배동에는 윤세영 SBS 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이, 압구정동엔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 등 벤처기업인들이 많이 산다. 강남구 청담동엔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서초구 서초동엔 정몽진 금강고려화학 회장 등이 주소지를 두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 서초구 반포동엔 각각 남승우 풀무원 사장,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 등이 거주한다. 박원순 변호사(강남구 압구정동) 지은희 여성부 장관(서초구 반포동) 등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상당수도 강남지역에 적을 두고 있다. 미디어에퀴터블에 따르면 강남지역 부자동네의 주식시가총액은 서초동(28명·4042억원), 방배동(24명·4077억원), 청담동(20명·3656억원), 논현동(20명ㆍ2414억원), 반포동(18명ㆍ2845억원) 순이다.
지방 출신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강남지역에 별도의 집을 갖고 있다. 강남구 역삼동에 42평형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정동영 의원은 서초동에 62평 아파트를 전세내 산다. 박근혜 의원은 강남구 삼성동의 2층 양옥(대지 120평·건평 60평)에 살고 있다.
정의원 박의원처럼 수도권(서울·경기·인천 등)이 지역구가 아닌 국회의원 170여명(전국구 포함) 가운데 수도권에 별도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의원이 150여명에 이른다. 이들 중 100여명이 서울 강남지역과 성남 분당 등 ‘부자동네’에 살고 있다.
정동채(서초구 서초동) 이경재(서초구 반포동) 박병석(서초구 반포동) 김택기(서초구 반포동) 최병국(서초구 방배동) 김태식(서초구 방배동) 최연희(서초구 서초동) 송훈석(강남구 개포동) 심규철(서초구 잠원동) 이완구(강남구 압구정동) 오장섭(강남구 대치동) 정진석(강남구 압구정동) 의원 등이 강남지역에 거주한다.
최돈웅(용산구 이촌동) 김용환(용산구 한남1동) 박상천(영등포구 여의도동) 김경재(영등포구 여의도동) 주진우(종로구 사직동) 의원 등 강남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50여명도 대부분이 용산구나 마포·영등포·종로구 등 국회가 있는 여의도와 가까운 부자동네에 살고 있다.
최근 파워엘리트의 거주지 분포는 특정 동네에 더욱 집중돼 있다. 문화예술인은 평창동, 정치인은 여의도동, 언론인은 일원동 하는 식이다. 파워엘리트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압구정1동이다. 압구정1동은 공무원 기업인 금융인 교육인 의료인 등에서 직군별로 각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김창석 교수는 “동별 저명인사 거주 숫자를 보면 압구정1동이 서울 평균치의 17.45배에 달하는 것을 비롯해 반포본동(10.46배) 잠실7동(10.42배) 압구정2동(9.24배) 등에 파워엘리트가 많이 거주한다”고 밝혔다.
정치인은 여의도동 압구정1동 평창동에 주로 거주하고 법조인들은 서초4동 압구정1동 반포4동에 산다. 기업인은 압구정1동 대치2동 여의도동 순이고, 의료인과 교육인은 압구정1동, 여의도동 잠원동에 주로 주소지를 두고 있다. 공무원은 압구정1동 잠원동 여의도동에 주로 거주하고, 문화예술인의 경우는 평창동 압구정1동 이촌1동에 많이 산다. 파워엘리트로 분류된 직군 중 유일하게 언론인만 압구정동에 거주하는 비율이 낮다. 언론인들은 기자아파트가 있는 일원2동에 가장 많고 여의도동 도곡동이 뒤를 잇는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빈자들은 빈자들끼리 모여 사는 것은 세계 도시들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부유층들의 호화 사치 생활엔 눈살이 찌푸려지게 마련이다. 경기침체 속에서도 부자동네는 호황이라고 한다. 어차피 1%의 나라와 99%의 나라는 따로 존재한다는 듯이.
4월4일 오후 서울 성북동 주택가의 풍경이다. 성북동은 ‘권력’과 ‘부자’가 모여 사는 ‘부자동네’ ‘권력동네’의 효시다. 한국의 ‘부촌’은 1970년대 재벌과 부유층이 등장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성북동의 ‘주류’도 물론 재벌이다. 구자경 LG 명예회장,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신용호 교보생명 명예회장 등 창업주와 박용오 두산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사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등이 성북동에 터를 잡았다.
70년대 재벌 등장 성북동에 ‘부촌’ 형성
성북동 중에서도 ‘부자동네’는 성북2동 3통, 6통을 가리킨다. 서울의 일반적인 ‘동(洞)’ 면적보다 3배 이상 넓지만 겨우 450여 가구가 거주한다. 땅값은 평당 500만~800만원 선에 불과(?)하지만 건축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매매가격을 단순 추산하기는 어렵다. 대주주 지분정보 제공업체 ‘미디어에퀴터블’(www.equitables.co.kr)에 따르면 성북동 부자들의 주식 시가총액은 9000억원을 넘어선다.
문화예술인이 많이 사는 평창동 주택가.
성북동에 자리잡은 포스코 영빈관 ‘영광원’은 포스코 유상부 회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아들 홍걸씨가 ‘은밀한 만남’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도 정·관계 인사나 외국의 주요인사들과 회동하는 장소로 현대의 성북동 영빈관을 이용했다고 한다. 권력과 재벌이 만나 성장한 성북동의 과거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해방 당시 8개 구에 인구 90만명에 지나지 않았던 서울은 50여년간 경제개발로 인구가 집중하고 경기도 일원을 집어삼키며 25개 자치구, 인구 1100만명의 도시로 성장했다. 이런 성장 과정에서 성북동 같은 부촌이 등장했고, 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은 자치구 간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켰다. 더 나아가 최근엔 특정 동으로의 권력과 부의 집중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의 대표적인 권력동네 부자동네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동네는 용산구 한남동이다. 한남동이 ‘부촌 중의 부촌’으로 대접받는 것은 삼성가 오너들이 대거 살고 있기 때문. 이건희 회장은 하얏트호텔 아래쪽에 자리한 150평 규모의 2층 저택에 아들 재용씨(삼성전자 상무보) 가족과 함께 거주한다. 한남동 삼성생명 사옥 주변엔 상당수의 삼성가 오너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언론 노출을 몹시 꺼리는 이회장이 언론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곳도 한남동에 자리잡은 삼성 영빈관 ‘승지원’이다. 승지원에서 이회장은 국내 대기업 총수와 회동하거나 외국 주요인사 면담, 계열사 사장단 회의 등을 연다.
재벌들의 집단 거주지인 성북동(위), 한남동 주택가.
강북지역의 대표적 ‘부자동네’가 성북동 한남동이라면 종로구 평창동 구기동은 강북지역 최고의 ‘권력동네’다. 평창동사무소(법정동인 구기동은 행정동으로는 평창동에 속해 있다)에 따르면 평창동의 인구는 1만9000여명이다. 그중 약 10%인 700가구 가량이 풍치가 좋은 산자락에 터를 잡아 부촌을 형성하고 있다.
박준규 전 국회의장, 정몽준 김기춘 박종웅 현승일 의원, 박세직 최재욱 박재홍 금진호 국창근 전 의원 등 전·현직 의원 20여명과 이광재 청와대상황실장, 최기문 경찰총장, 이규효 전 건설부 장관, 김종인 전 청와대경제수석 등 상당수 전·현직 관료들이 평창동과 구기동 인근에 거주한다. 재벌들은 다른 부자동네에 비해 많지 않은 편으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비롯해 한진 롯데 등의 대기업 오너 가족이 평창동에 터를 잡았다.
국무총리 3명 배출 동부이촌동 ‘관운’ 좋기로 유명
방배동에는 윤세영 SBS 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이 많이 산다.
평창동 구기동의 ‘권력’이 가장 막강했던 때는 문민정부 시절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까운 곳에서 보좌한다며 권력 실세들이 모여든 것. 가장 먼저 최형우 전 의원이 성산동 집을 팔고 100여평 규모의 고급주택으로 옮겨왔다. 이어 서석재 전 의원, 이원종 전 청와대정무수석 등이 평창동에 터를 잡는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반포에서 구기동으로 이사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이른바 실세 인사들 중 상당수가 평창동 구기동에 몰려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평창동에 입성한 권력가들의 상당수가 불운을 겪었다. 최 전 의원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서 전 의원은 설화로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치적으로 좌절을 겪었다. ‘소통령’으로 위세를 떨치던 현철씨는 한보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지난해 대선에선 정몽준 의원이 ‘부적절한’ 처신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에선 ‘평창동 지세가 정치인들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김윤환 전 의원은 “평창동으로는 절대 이사하지 말라”고 권하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철씨는 “우리집은 평창동이 아니라 구기동이다. (지세가) 좋지 않더라도 정면돌파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창동에 9년 동안 거주한 민주당 권노갑 전 최고의원도 이곳에서 부침을 겪었다. 숙원이던 정권교체는 이뤘지만 한보사건으로 수감됐으며 당내에서 사퇴압력을 받는 등 우울한 시절을 보냈다. 권 전 최고위원이 평창동 집을 팔고 2001년 용산구 동부이촌동(서빙고동)으로 옮길 때도 “액운을 떼기 위해 평창동을 떠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권 전 최고위원이 ‘발복을 위해’(?) 둥지를 튼 동부이촌동은 강북에 자리잡은 아파트 밀집지로는 유일하게 ‘부자동네’로 분류되는 곳이다. 동부이촌동은 강변북로를 따라 늘어선 아파트촌으로 도심에서 가깝고 발코니를 통해 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평당 1000만원 선을 훌쩍 넘는다. 최근 새로 분양된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2600만원에 이르기도 했다.
동부이촌동은 특히 ‘관운’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노신영 김정렬 황인성 전 총리 등 지금까지 3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해 단일 동으로는 ‘재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권 전 최고의원이 이런 점까지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권 전 최고위원이 거주하는 신동아아파트는 행정구역상으로 관운이 좋은 동부이촌동이 아니라 서빙고동에 속한다.
동부이촌동은 서초구 방배동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모여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코미디언 이경실씨가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한 곳도 바로 동부이촌동이다. 이 밖에 왕년의 은막스타 김지미씨, 최근 종영된 드라마 ‘올인’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송혜교씨 등이 동부이촌동 주민이다.
성북동 한남동 평창동 동부이촌동이 전통 부촌이라면 강남지역 일대엔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부촌들이 자리잡고 있다. 80년대 초 성북동 한남동 평창동으로 상징되던 ‘부촌’은 강북에 뿌리를 남겨두고 강남지역으로 이동한다. 서울시립대 김창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70년대 상류계층(파워엘리트)은 종로구 용산구 중구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그러나 이후 강남지역의 대규모 토지구획사업과 택지개발사업, 도심규제정책 등으로 인해 도심의 파워엘리트 수는 빠르게 줄어든다. 압구정동 논현동 방배동 등이 부와 권력이 모여들어 부자동네 권력동네로 거듭난 것도 이 무렵이다.
新 ‘파워엘리트’ 강남지역 3개구 대거 거주
‘강남’이라고 불리는 강남·서초·송파구 등 3개 자치구의 인구는 160만명으로 서울시민 7명 중 1명이 거주할 뿐이다. 그러나 김교수에 따르면 서울시내에 거주하는 파워엘리트(4급 이상 공무원, 정치인, 교수, 임원급 이상 금융인, 법조인, 차장급 이상 언론인, 과장급 이상 전문의, 저명한 문화예술인)의 절반(48%)이 강남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다.
강남 3구에는 법조인의 61.3%, 의료인의 56.4%, 기업인의 54.0%, 금융인의 52.8%, 공무원의 50.2%, 언론인의 36.2%가 거주한다. 법조계 인사를 보면 집중도를 쉽게 알 수 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강남구 삼성동) 송광수 검찰총장(강남구 압구정동) 정상명 법무차관(강남구 도곡동) 정홍원 법무연수원장(서초구 반포4동) 이기배 공안부장(송파구 방이동) 등 법무부와 검찰의 주요인사들이 모두 강남 3구에 거주하고 있다. 신건 국정원장(강남구 도곡동) 박순용(강남구 압구정동) 신승남 전 검찰총장(서초구 반포동) 신광옥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서초구 서초동) 등 고위직을 지낸 법조계 인사들도 대부분 강남지역 3개구에 거주한다.
강남구의 대표적인 부자동네인 서초구 방배동에는 윤세영 SBS 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이, 압구정동엔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 등 벤처기업인들이 많이 산다. 강남구 청담동엔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서초구 서초동엔 정몽진 금강고려화학 회장 등이 주소지를 두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 서초구 반포동엔 각각 남승우 풀무원 사장,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 등이 거주한다. 박원순 변호사(강남구 압구정동) 지은희 여성부 장관(서초구 반포동) 등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상당수도 강남지역에 적을 두고 있다. 미디어에퀴터블에 따르면 강남지역 부자동네의 주식시가총액은 서초동(28명·4042억원), 방배동(24명·4077억원), 청담동(20명·3656억원), 논현동(20명ㆍ2414억원), 반포동(18명ㆍ2845억원) 순이다.
지방 출신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강남지역에 별도의 집을 갖고 있다. 강남구 역삼동에 42평형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정동영 의원은 서초동에 62평 아파트를 전세내 산다. 박근혜 의원은 강남구 삼성동의 2층 양옥(대지 120평·건평 60평)에 살고 있다.
정의원 박의원처럼 수도권(서울·경기·인천 등)이 지역구가 아닌 국회의원 170여명(전국구 포함) 가운데 수도권에 별도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의원이 150여명에 이른다. 이들 중 100여명이 서울 강남지역과 성남 분당 등 ‘부자동네’에 살고 있다.
각 직군별로 특정 동에 몰려 사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큰 원은 직군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정동채(서초구 서초동) 이경재(서초구 반포동) 박병석(서초구 반포동) 김택기(서초구 반포동) 최병국(서초구 방배동) 김태식(서초구 방배동) 최연희(서초구 서초동) 송훈석(강남구 개포동) 심규철(서초구 잠원동) 이완구(강남구 압구정동) 오장섭(강남구 대치동) 정진석(강남구 압구정동) 의원 등이 강남지역에 거주한다.
최돈웅(용산구 이촌동) 김용환(용산구 한남1동) 박상천(영등포구 여의도동) 김경재(영등포구 여의도동) 주진우(종로구 사직동) 의원 등 강남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50여명도 대부분이 용산구나 마포·영등포·종로구 등 국회가 있는 여의도와 가까운 부자동네에 살고 있다.
최근 파워엘리트의 거주지 분포는 특정 동네에 더욱 집중돼 있다. 문화예술인은 평창동, 정치인은 여의도동, 언론인은 일원동 하는 식이다. 파워엘리트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압구정1동이다. 압구정1동은 공무원 기업인 금융인 교육인 의료인 등에서 직군별로 각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김창석 교수는 “동별 저명인사 거주 숫자를 보면 압구정1동이 서울 평균치의 17.45배에 달하는 것을 비롯해 반포본동(10.46배) 잠실7동(10.42배) 압구정2동(9.24배) 등에 파워엘리트가 많이 거주한다”고 밝혔다.
정치인은 여의도동 압구정1동 평창동에 주로 거주하고 법조인들은 서초4동 압구정1동 반포4동에 산다. 기업인은 압구정1동 대치2동 여의도동 순이고, 의료인과 교육인은 압구정1동, 여의도동 잠원동에 주로 주소지를 두고 있다. 공무원은 압구정1동 잠원동 여의도동에 주로 거주하고, 문화예술인의 경우는 평창동 압구정1동 이촌1동에 많이 산다. 파워엘리트로 분류된 직군 중 유일하게 언론인만 압구정동에 거주하는 비율이 낮다. 언론인들은 기자아파트가 있는 일원2동에 가장 많고 여의도동 도곡동이 뒤를 잇는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빈자들은 빈자들끼리 모여 사는 것은 세계 도시들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부유층들의 호화 사치 생활엔 눈살이 찌푸려지게 마련이다. 경기침체 속에서도 부자동네는 호황이라고 한다. 어차피 1%의 나라와 99%의 나라는 따로 존재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