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월급명세서 원천공제 내역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공단 관할 지사를 찾아가 상황 설명을 들은 김씨는 더욱 기가 막혔다. 공단측에 따르면 김씨가 전에 다닌 회사에서 자금 사정으로 국민연금을 원천징수하고도 이를 공단에 내지 않고 편취했다는 것. 회사는 직원들에게 이런 사실을 숨겼을 뿐 아니라 회사측이 내야 할 절반의 국민연금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김씨를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회사측이 편취한 돈을 자신이 대신 낸다 하더라도 차후 연금 급여상의 불이익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단에 “왜 그런 기업을 그냥 두냐”고 항의했지만 “가압류해 놓았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불이익 받는 수급자 2만명 넘어
이처럼 자신의 월소득에서 매달 4.5%의 국민연금 보험료를 꼬박꼬박 원천공제하고도 회사측이 이를 납부하지 않아 연금 급여상의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다. 하지만 법적 구제책이 전혀 없어 이들 연금 가입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근로자의 입장에서 보면 월소득 일부를 회사에 떼이고 연금 혜택은 받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구조는 연금보험료 납부의무가 본인에게만 있는 지역가입자와 달리 직장가입자의 경우 월급에서 원천징수된 연금보험료(4.5%)를 회사측이 받아 회사측의 몫(4.5%)을 합쳐 공단에 납부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즉 직장가입자의 국민연금 보험료는 납입 의무자인 사업주가 납부를 거부하거나, 납부할 능력이 없으면 가입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납된다.
문제는 보험료를 체납했더라도 정상적으로 혜택(보험금 또는 수당)이 돌아가는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과 달리 국민연금은 사용주가 보험료를 근로자의 전체 연금 가입 대상기간의 3분의 1 이상 체납하면 해당 근로자의 연금 지급이 제한된다는 점. 그 상태에서는 근로자가 장애를 입거나 사망해도 장애연금이나 유족연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또 사용주가 근로자의 노령연금 수급 개시 시점인 60세 이전에 미납분을 갚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압류할 회사의 재산이나 채권이 전혀 없는 등 미납분의 회수가 불가능할 경우는 연체기간 동안의 연금 혜택은 평생 받지 못한다.
1999년 2월 교통사고로 하반신 장애인이 된 박종문씨(39·가명)는 93년 8월부터 월급명세서상으로는 계속 국민연금을 내왔지만 회사가 97년 1월부터 박씨 모르게 연금을 체납해 장애인이 되고도 장애인 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박씨가 연금에 가입한 기간은 5년6개월. 하지만 회사측이 연금을 연체한 기간이 2년을 넘어 결국 연금 지급이 제한된 것이다. 회사는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공단측이 강제 집행할 만한 압류물이 전혀 없어 박씨는 아직까지 보험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박씨는 “회사가 체납한 돈을 사후에 한꺼번에 내면 안 되느냐고 통사정했지만 공단 직원들은 법 규정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중 노령연금이나 장애인연금은 연금이 미납될 경우 그 기간만큼의 연금혜택을 받지 못한다.
박씨는 “본인의 잘못 없이 납부의무자인 사용자의 귀책사유만으로 보험급여가 침해되고 사후납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가 납득할 수 있겠냐”며 “IMF 외환위기 당시 연금을 체납한 업체가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피해를 다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지 궁금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공단측은 ‘기여가 있는 곳에 급여가 있다’는 것이 연금보험의 원칙이고, 사용자가 고의로 추후납부제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측면에서 현행 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공단 가입자관리실 임용택 차장은 “88년 국민연금 보험료가 부과된 이후 총 보험료 부과금 73조원 중 사업장의 12개월 이상 누적 연금 체납액은 1400억원으로 체납률이 0.2%에 지나지 않는다”며 “1년 미만의 보험료 연체 사업장은 그 기간 안에 납부하는 경우가 많고, 체납액의 대부분은 수십년이 걸리더라도 사업장의 재산을 끝까지 추적하기 때문에 노령연금의 경우는 피해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고발돼도 벌금형 ‘솜방망이 처벌’
지난해 7월 공단이 국회 국정감사 자료로 제출한 통계에 따르면 사용자의 사망, 휴·페업 후 소재 확인 불능 등의 사유로 징수가 불가능한 사업장이 총 3219곳이었고 징수불능 미납액은 126억7500만원에 달했다. 또 2000년 말부터 사업장 연금보험료 누적 체납액은 매년 700∼800억원씩(1년 미만 단기체납액 포함) 늘고 있는 추세다.
2001년 공단의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회사의 연금 보험금 편취에 따른 피해가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됐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7월 현재 국민연금을 수령하고 있는 수급자 중 회사의 보험료 체납으로 인해 연금 급여상의 불이익을 받고 있는 체납 수급자만 2만5444명. 총 체납 월수는 11만8815개월(1인 평균 4.6개월), 총 체납 금액은 63억9683만원(1인 평균 20만144원)에 이르렀다. 이들 체납 수급자들이 회사가 연금을 체납하지 않았을 경우 정상적으로 받아야 할 월평균 연금은 31만5670원이지만, 체납으로 인해 현재 받고 있는 월평균 연금은 그보다 4790원이 적은 31만880원. 이들이 앞으로 평균 10년을 더 산다고 가정할 경우 피해금액은 1인 평균 57만4800원으로 전체 피해액은 144억여원에 이른다.
회사가 2년여 동안 연금보험료를 연체해 2000년 연금 수혜자가 된 뒤에도 정상적으로 받아야 할 액수보다 매달 2만원의 연금급여를 손해보고 있는 이중개씨(62·가명)는 “회사에 보험료를 뺏긴 것도 억울하지만 그 사업주가 아직도 버젓이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며 “왜 체납액을 강제징수하지 않는지 이상하다”고 말했다.
사실 경찰과 공단은 98년 1월과 99년 5월 이들 국민연금 유용 사업주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대표적인 업주 몇 명을 구속하는 수준에서 수사를 종결했다. 2000년 이후에도 2002년 8월까지 전국적으로 196개의 사업장이 고발됐지만 이중 처벌을 받은 사업장은 52개 사업장뿐이었고 그것도 모두 벌금형이었다.
공단 징수부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법 104조에도 부당 납부의무자에 대해 징역 1년 이하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규정돼 있지만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다고 둘러대면 처벌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놓았다.
공단 노조 이계문 정책실장은 “보건복지부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연금 직장가입자의 대상을 5인 이하 사업장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며 “이는 영세사업주의 연금보험료 납부 거부나 연금체납으로 이어져 더 많은 근로자의 피해를 부를 것”이라고 경고했다.